제369화
368화-흑수(黑獸) (3)
팽팽한 피부, 반짝이는 머리.
부드럽게 휜 가는 눈.
우락부락하지만, 튼실하다는 느낌이 드는 체격.
눈에 띄는 거라곤 반짝이는 머리밖에 없는, 보통의 청년이다.
흑수단 특유의 문양이 들어간 검은 무복을 입은 그가 붉은 혀로 입술을 핥는 순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중수는 강렬하게 엄습해 오는 오한에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본능이 알리는 경고가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했다.
최대한 멀리 벗어나라.
지금 눈앞에 있는 저것은.
“흑수(黑獸)……!”
인간이 아니다.
흐트러지는 순간, 그의 기척을 확실하게 인지한 검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야말로 아주 잠깐.
고작 반의반 호흡도 안 될 것 같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흡.’
내중수는 자신의 목이 물어뜯긴 것 같은 끔찍한 감각에 한껏 내공을 끌어올렸다.
정신을 침범해 오는 적의 살의를 몰아내고, 뒤틀리듯 찾아오는 심마를 밀어낸다.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 언제 감았는지 자각도 못 했던 눈을 뜨는 순간.
쾅!!
강렬한 바람이 내중수를 밀어냈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사이, 부릅뜬 두 눈에 담겼다.
“탐스럽구나!”
“더럽게 달라붙지 마시지!”
고작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붙은 두 고수의 팔이, 내중수의 안법으로도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일렁인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라면, 내중수라도 흉내 낼 수 있다.
손은 눈보다 빠른 법이니까.
극한까지 끌어올린 속도는 보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의 동작, 시선, 기파(氣波) 등을 감지하고 예측하는 거지.
그러니 만약 단순히 빠르기만 한 싸움이었다면.
‘……허.’
내중수는 이리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재빨리 움직여서 부하들을 모으고 적과의 전투에 대비했을 거다.
흐릿한 잔상이 부딪히는 일순간.
손과 손이 맞닿는 것만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자신조차 영향을 받을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 터져 나오는 공방이 아니었다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경지에 이른 자들이 펼치는 전투.
속도와 힘은 물론이고, 치고 빠지는 모든 동작에 무(武)가 담겨 있다.
무인으로서 어찌 시선을 뗄 수 있겠는가.
보이는 모든 것이 충격이고, 배움이거늘.
허나 그렇기에 내중수는 각오를 다졌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백유를 몰아붙이고 있는 흑수단주를 보며 확실하게 결심을 굳혔다.
혁래문은.
“흑룡.”
흑룡의 뒤를 따른다.
인간으로 태어나 금수(禽獸)로 살아갈 순 없는 것 아닌가.
기이하게 일렁이는 흑수단주의 눈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저런 자와 같은 편이 된다고 한들, 제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저런 자가 위에 선다면, 그것이 과연 인세(人世)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심을 굳힌 내중수는 몸을 돌려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 * *
손과 손이 맞부딪친다.
거침없이 가슴을 노리고 파고드는 손을 쳐 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팔을 타고 올라오는 손을 강기로 밀어낸다.
단순한 초식의 교환을 넘어선 초인들의 대결.
처음으로 맞이한 생소한 전투에도 백유는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침착하게, 확실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행동은 조신하기 그지없구나. 겁먹은 게냐?”
“늙은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정도로 도리가 없는 인간은 아니라서.”
적의 시답잖은 도발에 입꼬리를 비틀어 이죽거리면서도 백유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족히 십 년 이상 먼저 초인의 경지에 도달한 괴물.
아니, 나이가 불분명한 흑수단주이니만큼 수십 년의 세월을 초인의 경지에 올라서서 보냈을 거다.
정파와의 전쟁을 직접 겪고 살아남은 노괴 중 하나.
전투의 경험적 측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빈틈조차 꿰뚫을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짐승.
조급함으로 생겨나는 찰나의 빈틈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조금 전, 상대의 수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습에 당해 꼬꾸라진 머저리와는 격이 다르다.
아니, 머저리는 아닌가.
머저리는 인간에게 쓰는 말이지.
흑수단주의 발아래 짓밟히고 부서져 고기 조각이 되어 흩어진 흑웅의 흔적은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순식간에 대로를 초토화시킨 흑수단주의 공격에 진즉에 흙먼지와 뒤섞여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에 겁에 질리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어야 할 다른 놈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담담하게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
자신들을 이끌던 대주가 단주의 발아래 육편(肉片)이 되어 흩어졌는데도.
“눈동자가 바쁘구나. 약한 녀석들의 특징이지.”
순간, 턱밑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흑수단주의 팔을 손바닥으로 막아 낸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람은 원래 주변 상황을 살피면서 움직이는 거다. 이 늙은 짐승아.”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춘 두 사람.
찌르려는 손과 막아 낸 손이 서로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그 순간.
“애송이, 함께하는 건 어떠냐?”
뜬금없는 흑수단주의 제안에 백유는 입꼬리를 올렸다.
“꺼져.”
“크크크크!”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리를 벌린 흑수단주의 앞으로 날카로운 찌르기가 지나간다.
비어 있던 백유의 다른 손이 그가 있던 곳을 아예 뜯어낼 기세로 훑고 지나간다.
그 빈자리에 남는 은은한 뇌기.
“익힌 무공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정녕 맹주의 제자가 맞구나.”
“사부님이라곤 잘 안 부르지만 말이야.”
태연한 백유의 대답에 흑수단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도, 네년도 그런 것에 집착할 성격은 아닐 테니 말이다.”
“노인네, 노망났어? 날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알고말고. 네년과 같은 눈을 한 인간을 몇이나 죽였는데, 내가 모를까.”
혀로 입술을 핥으며 흑수단주는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고고한 척, 인간으로서의 선을 지키는 척 훈계해 대고 으스대던 놈들. 정말 수도 없이 많았지.”
사파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정파에 태어나도 천하의 상놈이 되지만.
누군가는 사파에 태어나도 천하의 대협이 된다.
흑수단주는 그런 자칭 대협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아무리 사파라도 이건 아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거다.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의 일에 훼방을 놓던 놈들.
한 놈 빼고, 전부 죽였다.
“기대되는구나.”
강렬한 무언가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백유를 똑바로 응시한다.
“네년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떻게 비굴해질까. 그놈은 너의 죽음에 어찌 반응할까.”
스스로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면, 어떤 인간이든 그 본성을 드러낸다.
비굴하게 비는 놈들은 흔하고.
자신의 몸을 내주겠다고 유혹하는 잡것들도 있었고.
가족이나 동료, 친구를 팔려는 것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도망치겠다고 발악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인간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오로지 하나다.
절망.
체념하고, 포기하고, 절망한 눈동자.
그 눈동자를 짓밟는 순간.
“네년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바닥을 기는 개가 될지, 돼지의 먹이가 되어 죽어갈지.”
인간은 금수(禽獸)가 된다.
태초에 있어야 할 모습으로.
가식도, 위선도 전부 던져 버린,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최대한 재미있게 죽어 가도록.”
거대한 앞발이, 백유의 눈앞을 가득 메운다.
단숨에 펼쳐진 일수.
반 호흡도 걸리지 않은 그 간단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공격에 백유는 본능적으로 양팔을 교차했다.
선명하게 맺힌 강기가 양팔을 휘감고.
단련된 육체를 내공이 강화한다.
그리고.
쩡!!
무언가가 쪼개지는 강렬한 폭음과 함께 백유의 몸이 그대로 뒤로 밀려난다.
몇 걸음 정도의 거리를 대로 위의 돌들을 부수며 깊은 고랑을 남긴다.
땅에 단단히 파고 들어간 두 다리를 미처 빼내기도 전에 백유는 교차했던 양팔을 뻗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날카롭게 굽힌 손가락을 한 채 백유의 어깨 위로 떨어지던 양손이 그녀의 양팔에 가로막힌다.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백유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흑수단주의 눈과 마주했다.
자신과 싸우는 적들에게 흔히 보이는 음심(淫心) 같은 건 터럭만큼도 안 보인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로지 하나.
욕망이다.
적을 찢고, 짓밟아 살아남겠다는 욕망.
인간을 떠나, 모든 짐승들이 품는 절대적인 한 가지 소망.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쾌락으로 여기게 된 짐승이 이곳에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흑수단주였다.
손목을 꺾어 자신의 손을 막은 백유의 팔을 노리고 손끝을 세웠다.
즉시 반응해 흑수단주의 손을 털어 낸 백유는 그대로 파고드는 흑수단주의 공격에 다시 양팔을 움직였다.
뜯고, 할퀴고, 심지어는 무는 공격까지.
화경급 고수의 품격 같은 건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는 기이한 전투 방식.
동시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이할 정도로 깊은 무리(武理).
[금수지형(禽獸之形)]
온갖 짐승의 동작을 모방한 흑수단주의 독문 무공.
고상한 무인의 자존심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체면도 버리는.
“캬하핫!”
짐승의 살육이다.
호신강기조차 찢어발길 기세로 파고드는 흑수단주의 손을 쳐 내며, 백유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걸음이라도 더 먼저 방어를 굳히고.
기이한 적의 공격 방식에 휘말리지 않도록 넓은 시야를 유지한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흑수단주의 눈에는 이성이 사라져 간다.
본능에 이끌리듯 손을 휘두르고.
자신의 코앞에 목덜미가 드러나면 거침없이 이빨을 들이민다.
필요하다면 양손을 땅에 짚어 가며 네발로 땅을 박차며 달려든다.
입을 다무는 것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무공의 효과 때문이지 기이한 신음과 괴성이 섞여 흘러나오는 입은 이미 흐르는 침으로 범벅이 된 지 오래.
“캬하!”
오가는 공방 속에서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배어 나와도 멈추지 않는다.
“확실하네. 노망이 났어.”
그렇기에 그 공격을 받아 내며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짐승의 무공?
“개소리하지 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짐승은 위험하면 도망치는 법이야.”
구태여 움직임을 멈춘 백유는 양손으로 흑수단주의 팔을 붙잡았다.
양팔이 붙들린 순간, 짐승처럼 물어뜯기 위해 고개를 들이미는 흑수단주를 향해 백유 또한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어뜯기 위해서?
당연히 아니다.
사람인데, 머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쿵!!
인간의 뼈 중 가장 단단하다는 두개골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진다.
주륵,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백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흑수단주의 눈을 바라봤다.
이성을 잃어 가?
무공에 휘둘려?
그럴 리가.
사천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멀쩡하게 활동하는 화경급 고수다.
그런 허술한 인간일 리가 없지 않은가.
“너 같은 건 짐승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부르는 거야.”
입꼬리를 비틀며 머리를 당긴 백유.
동시에.
“카핫!”
환하게 웃음을 터트린 흑수단주가 양팔을 비틀었다.
백유의 손에서 손쉽게 빠져나온 양팔로 땅을 짚는다.
어느새 몇 보나 되는 거리를 벌린 흑수단주의 신법에 감탄할 새도 없이.
“방심하지 않는 것도 그놈과 똑같구나.”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흑수단주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목과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드는 공격.
막으면 그대로 팔의 살점을 뜯고, 뼈를 부술 공격들.
목과 옆구리를 내어주면?
확실하게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질 것이다.
막기에도 부담스럽고.
당해서도 안 되는 공격.
이 순간 백이면 백, 무인은 회피를 선택한다.
그것을 위해 갈고닦은 보법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캬하!”
뇌전을 두른 강기로 공격을 받아 낸 백유의 모습에 흑수단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