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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68화 (368/624)

제368화

367화-흑수(黑獸) (2)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남창의 대로엔 기이한 공기가 흘렀다.

길고 널찍한 대로 위를 걷는 이들은 고작 서른 남짓.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야 할 거리를 고작 서른 정도의 사람들이 점령한 기이한 광경.

그러나 그것이 기이할지언정 당연한 일임을 남창에 사는 이들은 알았다.

아니, 이 대륙의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흑수(黑獸)]

무리의 중앙에 선 한 사내가 움켜쥔 깃대 위로 펄럭이는 두 글자가 그들이 누구인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흑수(黑獸).

이 사파에서 악명으론 최고이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짐승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일반 양민일지라도 곧바로 송곳니를 박아 넣는 망종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깃발을 내걸고 당당하게 대로를 걷고 있으니, 남창에서 장사 좀 했다고 하는 이들은 알아서 재빨리 몸을 피했다.

장사치들이 빠지니 손님들도 눈치껏 빠졌고, 눈치 없이 돌아다녀야 할 무인들은 흑수(黑獸)라는 두 글자에 진즉에 꽁무니를 뺐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바로 이렇게 뻥 뚫린 대로다.

거기다.

‘살벌하군.’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한 곳을 향해 직진하고 있는 무인들의 무리를 어느 누가 가로막겠는가.

먼 거리에서 흑수단의 등장을 확인한 내중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보고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부하들에게 소식을 듣고 찾아왔더니…….

‘사전에 미리 움직이고 있었나?’

남창을 점령한 지 고작 닷새째다.

저 멀리 있는 사천맹에서 이곳까지 오기엔 과하게 빠른 속도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

백유가 처음 사파 전체에 자신의 뜻을 알렸을 때 이미 움직였거나.

근처를 지나가던 이들이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왔거나.

‘……나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나쁜 상황은 아니다.

전자든 후자든 단주가 끼어 있을 확률은 낮았으니까.

단주만 없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당장 병력을 모아서…….

쿵!

내중수의 생각이 깊어지려던 찰나.

깃대를 들고 있던 이가 거침없이 창을 대로 한복판에 꽂아 넣었다.

나름대로 다져져 있던 땅과 돌을 거침없이 부수고 박혀 들어간 깃대.

“백유는 들으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자신도 모르게 두 귀를 막고 나서야 내중수는 상대가 전문적으로 음공을 익힌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눈엔 미약한 불신이 담겼다.

‘설마 이런 용도를 위해 음공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무공을 이렇게 분위기 잡는 데나 쓰려고 익혔다고?

흑수단이 아무리 망종 같은 집단이라고 해도, 고작 위협용 고성방가에 이런 투자를 할 리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던 내중수는 언젠가 들었던 소문을 떠올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흑수단은 사파(邪派)의 시작이다.

칭찬이 아니었다.

사파(邪派)란 본디 흑도에서 시작된 것.

양민의 주머니나 털던 이들이 무공을 갖추고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흑도임을 부정하면서 태어난 존재다.

그렇기에 그 뿌리는 흑도에 닿아 있고, 사파의 시작이라는 말은 그 누구보다 흑도와 가깝다는 의미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거짓된 웃음으로 상대를 배신할 수 있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바닥을 기어 상대의 발등에 비수를 박을 수 있으며.

이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족조차 팔아넘길 수 있는.

인생의 바닥을 살며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돈을 움켜쥐기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흑도의 무리.

적에게 압박감을 주기 위해 음공을 익힐 수도 있고.

자신의 악명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잔인하게 사람을 해하며 살아왔을 수도 있으며.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 죽는 척도 할 수 있는.

‘……위험하다!’

그들의 본질을 깨달은 순간, 내중수는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들이 백유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백유는 적에게 포악하고 잔인하지만, 절대 비겁하진 않다.

칠가(七家)의 하나인 구마가를 공격할 때조차 정면으로 쳐들어갔던 백유다.

아마 천성이 그런 정면 승부를 좋아하는 것일 터.

그런 이가,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불사하는 이들과 싸운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적들이 인질을 잡을 수도 있고.

약한 척해서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적들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 백유가 저들과 싸우는 건 불리하다……!

‘돌아가야 한다!’

“네년이 지금 이 강서의 정기를 흐리고 있음을 온 천하가 알고 있으니! 순순히 나와서 네 죗값을 치르라!!”

상황 판단을 끝낸 내중수가 발길을 돌리는 순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로를 뒤흔들었다.

백유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술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건가?’

백유가 자리 잡은 구마가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적의 뻔한 속내에 넘어가 줄 필요는 없지.

일단 구마가 안에서 기다리면서 상황 파악을…….

“꺄하하하하하!”

‘……이런!’

구마가 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내중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정확한 상황 파악도 안 됐거늘……!

“피 냄새가 진한 벌레들이 찾아왔구나.”

문이 부서진 구마가의 정문 위.

당당하게 선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니, 벌레가 아니라 금수(禽獸) 놈들이었나?”

“네년이 백유인가?”

흑수단의 선두, 곰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옷을 입은 사내는 백유를 위아래로 훑으며 입술을 핥았다.

“과연 일품이군.”

“짐승 새끼라서 머리로 가야 할 피가 아래로 쏠렸나 보지?”

너무 노골적이어서 역겹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상대의 도발에 백유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원하는 남자한테는 밀려난 상황인데, 쓸데없는 놈들은 이리 잘도 달라붙는다.

걸리는 점이 있다고 따로 움직이겠다고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백유는 이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할 얼굴은 아니지.

“뭐, 모가지를 꺾어 놔도 눈깔을 그리 잘 움직일 수 있는지 한번 보지.”

가볍게 발을 구른 백유의 몸이 부드럽게 떨어진다.

몇십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적들을 향해 담담하게 나아가는 백유.

그 모습엔 긴장도, 경계도 없었기에 내중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고, 흑수단 무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앙탈이 꽤 심하겠군.”

당당하게 걸어오는 백유를 향해 곰 가죽의 사내가 걸어갔다.

마주 보고 걷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멈춰 섰다.

“흑수단의 흑웅이다.”

“원숭이는 잘 지내고?”

원숭이는 잘 지내냐.

그 질문에 흑웅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외팔이 원숭이는 집이나 지키고 있지.”

흑원대주 차분백.

흑수단 소속의 대주라는 신분으로 고작 학생 따위에게 팔이 잘린 병X.

흑원대는 이미 갈가리 찢겨 해체된 지 오래였고, 차분백은 남은 팔 하나로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다.

거기다 가끔 다른 대주들이 짜증 날 때 화풀이로 두들겨 패는 용도로도 이용되고 있고.

다른 놈들과 달리, 기본 실력은 어디 안 가서 꽤나 손맛이 좋아 호평들이다.

흑웅대주 흑웅은 그런 차분백을 가장 많이 두들겨 팬 인물이다.

흑수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응당 치러야 할 대가다.

만약 그때 맹주의 이름으로 보복이 금지되지 않았다면, 그가 나서서 그 어린놈의 팔을 뜯어 버렸을 거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흑원을 평생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겠지만.

검은 짐승은 공포의 대상이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야밤에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벌벌 떠는 것처럼.

흑수(黑獸)라는 이름은 사파의 공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네년의 목은 이 자리에서 받아 가도록 하지.”

흑웅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굵은 허벅지를 튕겨 땅을 박차고.

거대한 덩치를 구태여 낮춰 적의 허리를 노리고 파고든다.

상대에게 이쪽의 등과 뒤통수를 그대로 노출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었지만, 그 속도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그 약점조차 가린다.

당장이라도 빠져나가지 않으면, 그대로 붙잡혀 허리가 쪼개질 것 같은 위압감.

말 그대로 거대한 흑곰이 달려드는 것 같은 모습에 대부분의 적은 거리를 벌리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는 적을 덩치에 비해 훨씬 빠른 신법을 연마한 흑웅이 따라잡는다.

허리를 움켜쥘 필요도 없다.

손목을 붙잡아도 좋고.

소매에 손가락만 걸어도 충분하다.

닿기만 하면 특유의 금나술과 체술로 단박에 적을 제압한다.

내공은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내지만, 그 시작이 되는 것은 결국 뼈와 근육.

관절을 완벽하게 묶어 버리면 어떤 고수라고 할지라도 손발이 묶인다.

이 무림에는 흔하지 않은, 근접 투술을 기반으로 하는 전투 방식.

적의 허를 찌르는 이 방식으로, 흑웅은 수많은 적의 허리를 분질러 왔다.

당연히 백유도 그런 적들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예상했고.

쩡!!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면에 흑웅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손은 제대로 뻗어지지 않았고, 안면은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처참하게 처박힌 흑웅은 재빨리 땅을 짚고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헛!’

일렁이는 땅.

울렁이는 속.

사방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의 어지러움이 동반된 상황.

땅을 짚는 손은 계속 헛손질을 반복한다.

“이걸 버텨?”

감탄한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 위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그렇기에, 흑웅은 더욱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아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생각이 깊어지고,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 순간.

“큭!”

강렬한 통증이 그의 뒤통수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

동시에 진탕된 혈도와 장기의 상태에 스스로가 내상을 입었음을 깨달았고.

‘……부서졌다고? 내 호신지기(護身之氣)가?’

그것이 그가 몸에 두르고 있던 방벽이 무너진 탓이란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깨달은 것과 별개로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흑웅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주급 이상이 쓰는 호신강기(護身罡氣)보다야 당연히 부족하지만, 이쪽은 내공을 온전히 몸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동급의 무인에게 이리 쉽게 깨질 무공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쉽게 깨지기는커녕 적이 이를 악물고 공격을 퍼부어야 겨우 금이 갈까 말까 한 수준인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니, 더욱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찾아온다.

동급의 무인에게는 절대 깨지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던 방어가 단숨에 깨져 버렸다.

뒤통수가 깨지고 내상에 장기가 뒤틀렸으니 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내 호신지기가 단 한 방에 부서진 거라면……!

“네, 네년……!”

“자꾸 말끝마다 년, 년 할래?”

거칠게 내리찍은 발이 흑웅의 머리통을 다시 한번 땅에 처박는다.

힘겹게 들어 올린 머리가 다시 처박히며 짙은 흙냄새를 맡게 된 흑웅이었지만, 지금 그런 건 그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경지에 오른 것이냐……!”

“알면서 왜 물어? 뭐, 아니라고 할까 기대해서 그런 거야?”

땅에 머리가 처박힌 상태로 두 눈을 치켜뜨는 흑웅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백유는 발에 서서히 힘을 더했다.

“뭐, 마침 잘됐어. 너희는 원래 정리하고 싶었거든.”

“크으윽!”

서서히 땅에 박히는 머리.

머리가 으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흑웅이 필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백유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도 비슷할 것 같은데, 안 그래?”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백유.

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가 웃으며 깃대를 내려놨다.

“어린것이 꽤나 솜씨가 좋구나.”

깃대를 대충 뒤에 있는 이에게 던진 이는 팽팽한 피부에 반짝이는 머리를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네 피는 꽤나 맛이 있겠구나.”

흑수(黑獸)가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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