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365화-흑성(黑星) (12)
칠가(七家).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름대로 사파에선 그 명성을 떨치는 일곱 가문.
정파 쪽 대문파의 손이 닿지 않는 남쪽에서 확실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양지와 음지의 상권을 손에 쥐고 덩치를 키운 칠가다.
가진 고수의 질은 오대세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나, 그 숫자만큼은 크게 밀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숫자만큼은 크게 밀리지 않았다.
그나마 쉽게 육성할 수 있는 이류 무인의 숫자는 오대세가와 비슷하거나 더 많았고, 그 위의 일류 무인도 오대세가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하나의 가문이 손에 쥐기엔 충분히 거대한 힘.
그런 거대한 힘을 손에 쥔 것이 칠가(七家)인데.
“끄아아악!”
지금 그 가문들 중 하나가 끔찍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설천위에 의해 몇 명 단위로 나누어져 각개격파를 당하기 시작한 구마가의 무인들.
진법을 펼치고 합공으로 최대한 손해를 덜 보면서 상대의 힘을 갉아먹어야 겨우 이길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 초고수인데.
그런 초고수를 상대로 몇 명씩 따로 싸우다 죽어 나가고 있으니 반격의 낌새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짓밟히고, 찢겨 나갈 뿐.
짙은 죽음이 내려앉은 구마가의 장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설천위는 조용히 대문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벽들이 정렬되며 안에 있는 인간들을 밀어내고 길을 만든다.
정원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며, 설천위는 하나의 벽을 풀었다.
“끄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제, 제게는 처자식이……!”
악을 쓰는 자, 목숨을 구걸하는 자, 자신의 상황을 말하며 동정심을 바라는 자.
수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보였지만, 백유는 담담했다.
“처자식?”
“거짓말입니다. 그자에게는 가족이 없습니다.”
이십 년 넘게 구마가에서 하인으로 일해 온 소가의 증언에 희비가 엇갈린다.
누군가는 악을 쓰며 소가를 저주했고.
누군가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인다.
소가가 모르는 것은 뒤에 있는 하인들에게 묻고, 그들도 모르면 단전을 폐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거침없이 무인들을 정리해 나가는 백유의 처형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공정한 재판 따윈 없는, 야만적인 처형식이 자행되는 한복판을 지나서 정원에 도착한 설천위는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봤다.
짙은 피 냄새에 그저 머리를 박고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허어.]
[어찌…….]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방황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로 나이가 어리거나 젊었다.
제물로 쓰려고 하든, 노리개로 쓰려고 하든 젊고 어린 게 좋을 테니까.
제대로 된 환경에서 지내지 못했는지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몸은 미처 가릴 수 없는 폭력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멍들고 찢어진 상처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확실하게 죽어 있었다.
그렇기에.
“원하는 것이 있나?”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을 보며 설천위는 담담하게 물었다.
공허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이를 악물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어떤 이유로 납치되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순순히 잡혀만 있던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다른 이들의 배는 되어 보이는 상처들.
“복수, 복수가 하고 싶습니다.”
독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말하는 청년의 모습에 설천위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냉정한 눈빛이 청년을 향한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
구릿빛 피부.
노동으로 다져진 차돌 같은 근육의 흔적.
잡혀 오기 전에는 아마 농사를 짓던 이가 아니었을까.
그리 짐작하며, 설천위는 조용히 물었다.
“무슨 복수?”
“이곳에서 팔려 간 제 동생들의 복수입니다.”
설천위의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기세에도 흔들림 없는 시선.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
설천위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감사합니다. 대협!”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거친 걸음으로 나아가는 청년.
그 모습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둘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 저도.”
“저도…….”
하나둘 일어나 독기를 품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치적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라. 흑룡의 이빨이 너희의 한을 풀어 줄 테니.”
* * *
“구마가에 사달이 났다?”
남창을 주름 잡은 세력 중 하나인 혁래문의 문주, 내중수는 부하의 보고에 수염을 쓸었다.
먹구름이 몰리는 괴현상과 함께 구마가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벼락이 떨어졌다.
주위에 있는 일반 백성들은 드디어 천벌이 내렸다며 혀를 차고 손가락질했지만, 지식이 좀 있는 이들은 그리 편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괴물.
술법을 다루는 괴물 하나가 구마가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고작 술사 하나에 무너질 구마가가 아니다.
즉시 사람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염탐을 갔던 이들이 실종됐다.
거기다 구마가의 장원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피 냄새.
한두 명, 아니 십수 명이 죽은 것으로는 절대 날 수 없는 짙디짙은 피 냄새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허겁지겁 살펴보러 나왔던 포졸들은 구마가의 담벼락에서 자신의 위장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내고 물러났다.
관무불가침이라는 흔하디흔한 핑계로 사건을 회피한 것이다.
포졸들을 포섭해 내부의 상황을 알아내려 했으나, 전부 공포에 떨며 고개를 저을 뿐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보내는 부하들이 계속 실종되고, 피 냄새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귀문의 빈자리를 먹어 치우기 위해 노력하던 것조차 뒷전으로 미루고 촉각을 곤두세우길 이틀.
드디어 구마가에 변화가 생겼다.
큼지막한 정문이 열리고, 수많은 수레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우욱!”
“저, 저게 뭐시당가!”
“저, 전부 시체여?”
“어째 피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니……!”
경악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혼란 속에서 내중수는 가만히 그 행렬을 지켜봤다.
몇몇 낯이 익은 무인들이 보인다.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이지만, 확실히 보았던 기억이 있는 구마가의 무인들이다.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인명 피해를 봤지만, 결국 수습한 건가?
‘……적기인가?’
구마가가 먹고 있던 영역을 집어삼키고 역으로 몸집을 키울 기회가 찾아온 것인가?
살짝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중수는 차분하게 시체의 행렬을 바라봤다.
다만, 좀 이상했다.
적의 습격으로 이렇게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그 뒤에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고작 이틀 만에 장원을 정리하고 저렇게 시체를 밖으로 뺀다?
외딴 산에 구덩이를 파서 버리려는 것도 아니고…….
‘……버려?’
순간 머릿속을 관통하는 생각과 함께 내중수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 만약 구마가를 습격한 자가 승리했다면?
힘과 공포로 구마가를 먹어 치웠다면?
거대한 칠가(七家)를 먹어 치운다니 사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가정도 아니다.
정말 압도적인 힘과 공포로 찍어 누를 수 있다면, 굴복하는 것이 사파의 무인이니까.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힘과 공포가 필요해서 그럴 뿐이지.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내중수가 일단 물러서려는 그 순간.
“마침 잘됐네.”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내중수가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단숨에 사혈을 다섯 곳이나 노리는 절초였지만, 상대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꽤 쓸 만하네.”
느긋한 목소리와 여유로운 미소.
“내가 알아낸 것이 사실이라면.”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내중수를 압박하며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남창의 주인이 되게 해 주지.”
* * *
사파 전역으로 믿기 힘든 소문이 퍼져 나갔다.
구마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생각은 대다수가 비슷했다.
‘도대체 누가 구마가를 멸문시켰는가?’
가주는 폐인이 되어 대문에 걸려 말라 죽었고, 소가주는 머리가 으깨진 시체가 되어 야산에 묻혔다.
잔혹할 정도로 지독한 처리 방식.
원한에 의한 것인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 의심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혁래문의 문주, 내중수가 구마가를 찾아간 모습이 사방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한낮에 대놓고 구마가의 정문을 찾아간 내중수가 무릎을 꿇었고.
정문을 열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백유가 구마가의 멸문과 남창의 지배를 선언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구강에 이어 백유가 남창까지 손에 넣었다.
말도 안 되는 행보.
아무리 무력이 강해도 그렇게 몇 개나 되는 문파를 무너트리고, 그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문파들을 발아래 둘 순 없었다.
단순히 무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
그렇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백유가 아닌 그 뒤에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구강에서부터 백유의 곁에 있었다고 알려진 존재.
“……흑성(黑星)이라.”
구마가에 벼락을 내리고, 수백의 무인을 도주조차 하지 못하게 틀어막은 괴물.
대체 어떻게 이만한 술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도저히 알 방도가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크크큭, 증명했군.”
그녀가 사파 전체에 뿌린 도발이 마냥 허세가 아니라는 것.
그녀가 진심으로 사천맹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사천맹의 대회의실.
오랜만에 단주 대부분이 모인 대회의실에서 야귀단주, 소국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그때 본 어린 녀석이 벌써 그리 컸나.’
무림학관과의 친선전.
그때 살존에게 대들었던 그 어린것이 벌써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소국,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소국의 태도에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쪽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됐는데…….”
짜증이 담긴 목소리에 소국은 가볍게 술병을 흔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변했군.”
조금은 싸늘한 여인의 목소리에 소국은 히죽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럼 변하지 않고 배기겠나?”
소국의 눈에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이 담긴다.
20대 중후반 정도의 젊은 청년들.
한 명은 훤칠한 미남이었고, 한 명은 등이 굽어 조금 음습해 보였다.
“어린놈들이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데, 일할 맛이 나야지.”
“야귀단주!”
소국의 이죽거림에 책상을 치고 일어선 노인이 눈을 부라렸지만 소국은 같잖다는 듯 웃어넘겼다.
“내가 틀린 말 했소? 서귀단주.”
“맹주의 대리를 맡고 있는 제자들이다. 설령 직위는 네가 위라 하더라도 회의에서는 예의를 지켜라!”
“사파에서 예의는 무슨.”
서귀단주의 호통을 비웃으며 소국은 술을 홀짝였다.
“내가 회의 때 조용했던 건 맹주님이 계셔서였지, 저런 어린놈들과는 상관없소.”
“놈! 그 맹주님의 제자들이다!”
“하, 진짜 제자는 밖에서 놀고 있는데, 헛소리 그만하쇼.”
“이놈……!”
예의라곤 개뿔도 없는 야귀단주의 태도에 서귀단주의 눈에 살기가 깃드는 순간.
야귀단주도 자세를 바로 하고 살기를 뿜었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대회의실.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른 단주들은 아예 흥미가 없다는 듯 제 할 일만 열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단주까지 있는 상황.
사천맹의 단주들이 지금 얼마나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상석에 앉은 청년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짝!
“자자, 선배님들 진정하시지요.”
꽤나 무거운 내공이 담긴 박수 소리로 단숨에 이목을 모은 청년, 전도울은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단주들을 쳐다보며 밝게 웃었다.
“그 밖에서 놀고 있는 사제 녀석 때문에 선배님들을 이곳에 모았습니다.”
“흥.”
사제는 무슨.
소국의 노골적인 조소에도 전도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야귀단주.”
살의 한 점 없는 맑은 눈으로 전도울은 아쉬워했다.
“몇 번 만나 보지도 못한 사제가 그리 포악한 짐승이었을 줄이야.”
어느새 소국에게서 시선을 거둔 전도울은 다른 단주들을 쓱 훑어보며 선언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사화(邪花) 백유를 사천맹의 적으로 규정하고, 추살령을 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