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364화-흑성(黑星) (11)
“가, 가주님!”
“네년! 가주님을 놓아라!”
머리채를 붙잡힌 구마가주의 모습에 무인들이 발작하듯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런 발악이나 마찬가지인 검에 뚫릴 벽이 아니었다.
“네놈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칠가(七家)다.
아무리 정파의 오대세가와 신흥삼가에 밀리는 사파의 가문이라고 해도 사파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이다.
이 자리에 모인 무인이 전부인가?
그럴 리가.
지금도 사방에서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활을 챙긴 자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
거기다.
“아버님!!”
구마가의 소가주, 구마용의 등장에 무인들의 사기가 다시 한번 들끓었다.
“네 이년! 지금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잔뜩 흥분해 달려온 소가주의 외침에 가주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백유는 쓱 고개를 돌렸다.
부들부들 떨며 흥분해 있는 사내.
나이는 어리지 않다.
소가주라고 해도 후기지수를 벗어난 나이대로 보이는 청년.
그 청년의 얼굴을 마주한 백유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불효를 입에 담을 입장은 아니지만, 당신 자식 농사 한번 거하게 말아먹었네.”
낄낄 웃으며 구마가주의 뺨을 툭툭 치는 백유.
그런 백유를 살의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구마가주였지만, 이미 그 몸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뇌전에 지져지며 지혈은 됐으나, 성대가 뜯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있나.
과다 출혈로 죽진 않겠지만,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가능성이 컸다.
“뭐, 내 알 바는 아니긴 하지.”
부들부들 떠는 구마가주를 대충 내팽개친 백유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위압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벽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가주.
히죽 웃은 백유는 정문 위의 설천위를 올려봤다.
“들여보내 줘.”
“그래.”
소가주가 휘두른 검이 허무하게 벽을 가르고.
갑자기 사라진 벽에 얼떨떨하게 서 있던 소가주는 고개를 들고 마른침을 삼켰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섬뜩한 미소로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는 백유.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외모 때문에 절로 발걸음이 향할 고혹적인 자태였으나, 소가주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분리된 상황.
적은 상처 하나 없고, 가주는 죽기 직전의 폐인이 됐다.
명백하지 않은가.
‘……비, 빌어먹을!’
하는 척만 하며, 가문 사람들의 민심을 잡으려고 했던 건데……!
가주조차 상대가 안 되는 강자와 일대일로 마주하게 된 소가주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살길을 찾아 눈알을 돌렸지만, 이미 주변은 다시 검은 벽으로 막힌 상태.
살짝 뒤로 내민 발뒤꿈치에 단단한 벽이 닿는 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직접 검을 뽑은 아들이라니, 감동해서라도 상대해 줄 수밖에 없잖아.”
조금 전에 봤던 싸늘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백유는 성큼성큼 소가주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노옴!”
[자, 잠시 대화를 하는 게 어떻소! 거래! 거래를 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소이까?!]
거세게 외치고 기세를 끌어 올리는 것과 달리 백유에게 들리는 전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살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조차 애걸하는 모습이라니.
“하…….”
그 모습에 백유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마저 지웠다.
“내가 쓰레기를 치우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더러우면 손대는 것도 찝찝한데…….”
짜증이 가득한 얼굴.
거기다.
“허, 허업!”
살을 에는 듯한 강렬한 살기.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밀한 살기에 소가주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떠는 사이.
“일단, 머리부터 박고 시작할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백유의 발이 소가주의 다리를 쓸었다.
허무하게 자빠지는 소가주.
“헙!”
겨우 손으로 땅을 짚어 얼굴이 처박히는 것은 피했으나, 백유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녀석이 난 좋은데.”
거침없이 소가주의 머리 위로 올라간 발이 그대로 땅을 향해 떨어진다.
당연히 덩달아 함께 떨어진 소가주의 얼굴은 거세게 땅과 마주했다.
“커헉!”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르는 핏방울.
침착하게 승부를 걸었다면, 몇 번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땅에 머리가 처박힌 소가주를 비웃으며 백유는 주위를 둘러봤다.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된 소가주의 모습에 당황하는 무인들.
저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몇이나 될까.
용서해 줄 가치가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아도 되는 놈이 몇이나 될까.”
섬뜩한 살기로 일렁이는 백유의 두 눈을 마주한 무인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고 뒷걸음질쳤다.
“사, 살려 줘! 살려 주십시오!”
동료의 이상한 모습에 곁에 있던 무인이 그를 붙잡았지만, 이미 정신이 억눌린 무인은 아예 주저앉아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다른 무인들 사이에서 당황과 공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흑성.”
백유의 부름에 여전히 정문 위에 앉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설천위가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검은 벽.
단숨에 가주를 죽이고, 소가주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원수와 마주하게 된 무인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세웠다.
허나, 그들의 살의는 흔들리고 있었고, 피어오르는 공포는 그들의 의지를 좀먹고 있었다.
검 끝이 흔들리고.
시선이 방황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분명 여기에 있는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덤빈다면, 백유라고 해도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겠지만.
“뭐 해? 안 덤비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죽는다.
그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여유로운 목소리와 숨통을 조이는 짙은 살기.
가장 먼저 나서는 순간.
‘……확실하게 죽는다!’
그 직감이 수십 명의 발을 그대로 묶어 버렸다.
자신들의 수장이 폐인이 되어 땅바닥을 뒹굴고.
그 후계자의 머리가 그 발밑에 짓눌려 있는데도.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인간의 본능이 그들의 용기를 찍어 눌렀다.
“근성 없는 놈들.”
그 모습에 가볍게 혀를 찬 백유는 자신의 발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의 살기와 패기에 완전히 짓눌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
이딴 놈도 시간이 흘러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을 우러러보는 놈들을 비웃으며 떵떵거리며 살아갈 것이다.
이자보다 재능이 있고,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가문의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자의 발밑에 고개를 박는 이가 생긴다.
그것이 잘못됐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재능이 그렇듯, 가문 또한 타고난 운이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가문이 모든 것이 되진 않지.”
서서히 발에 힘을 더하며, 백유는 주위를 둘러봤다.
“뭐 해? 너희 소가주 대갈통 깨져. 빨리 덤벼야지?”
고작 발을 떼게 만들면 된다.
몇 명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덤빈 놈들 중 몇 놈은 확실하게 목이 뜯기겠지만.
소가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는 손해 아닐까?
“뭐야, 너희 얘한테 감정 있구나? 살리기 싫은가 보네?”
움직이지 않는 무인들을 보며, 백유는 피식피식 웃었다.
“야, 애들이 너 살리기 싫단다. 이거 기회를 줘도 움직이질 않네.”
조롱 가득한 백유의 목소리에 소가주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완전히 제압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소가주.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나 보고 있는 무인들.
“아아.”
흥이 식는다.
이대로 무인들을 정리해 봤자, 그건 단순한 학살이다.
못 할 것도 없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다.
겁에 떨며 검도 제대로 못 휘두르는 놈들을 죽여 봤자 아무런 감흥도 없을 테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건 나름 보람찬 일이지만, 역시 하기 귀찮은 일이네.
짜증과 함께 백유가 발에 힘을 더하려던 그 순간.
“이쪽이오!”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가 십수 명의 사람을 이끌고 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검댕이가 곳곳에 묻은 몸.
곳곳에 보이는 화상의 흔적.
“하핫!”
그 모습에 백유는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깃든 고통, 죄책감, 긴장감.
그 모든 감정 뒤로 한 가지 감정이 읽혔다.
안도.
그의 뒤를 따르는 노예 같은 행색의 인물 십수 명을 구한 것에 안도하는 표정.
“네, 네놈!”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소리치는 무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저 사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감히 그놈들을 지상으로 꺼내 와? 네놈이 정녕 죽고 싶구나!”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드는 무인의 검이 번뜩였지만, 사내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앞으로 나와 자신의 몸으로 뒤에 있는 이들을 가린다.
“난! 짐승으로 죽지 않을 거요! 천벌이 이곳에 내린다면! 나는 사람답게 죽겠소!”
강렬한 의지로 이글거리는 눈동자.
무공 하나 익히지 않았음에도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고 무인의 기세에 당당히 맞섰다.
그 당당한 모습에 기가 찼는지, 무인은 사내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헛소리!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흉흉한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무인.
백유에게서 멀어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들이 숨기고 있던 것이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무인은 백유의 기세로 억눌려 있던 공기 속에서도 사내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꺄하하하하하하!!”
시원하게 터져 나온 웃음과 함께 무인의 머리통도 터져 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유에게서부터 무인이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기다란 공백이 생겼다.
“끄아아아악!”
“내, 내 팔이!!”
누군가는 어깨가.
누군가는 턱이.
누군가는 머리의 절반이.
누군가는 목이.
누군가는…….
열 명에 가까운 이들이 단숨에 목숨을 잃거나,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백유는 환하게 웃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좋아. 네가 구마가의 총관을 해라.”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백유의 발에 힘이 더해진다.
퍼석!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순식간에 반항으로 꿈틀거리던 소가주의 몸이 축 늘어진다.
끈적이는 피로 발자국을 만들며, 백유는 성큼성큼 걸었다.
신법은 구태여 쓰지 않았다.
자신이 갑자기 사내의 앞에 나타나면 놀랄 테니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과 싸우고 있던 무인들을 병풍으로 만든 백유는 사내의 앞에 섰다.
“이름은?”
“……소가입니다.”
“그래, 소 총관.”
웃으며 소가의 어깨에 팔을 올린 백유는 무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서 살려 둬도 될 만한 놈들은 누가 있지?”
“그, 그걸 어찌 제게…….”
뜬금없이 자신에게 와서 살 사람을 고르라는 백유의 행동에 소가가 몸을 벌벌 떨었지만, 백유는 웃으며 어깨를 두들겼다.
“그야, 너 아니었으면 전부 죽일 놈들이었으니까.”
히죽 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백유.
그 모습에 현재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무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무기를 움켜쥐었다.
지금 저 말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죽이겠다는 소리 아닌가.
살기 위해 살의를 품은 무인들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한 순간.
“얘들아, 너희 뭐 하나 잊고 있지 않냐?”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백유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뭔가 멈췄지?”
멈췄다.
그 말에 무인들은 바로 변화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장원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벼락이 어느 순간 딱 멈춰 있었다.
술사의 술법이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술사는 왜 상황이 끝나지 않았는데, 술법을 끝냈는가?
가능성은 두 가지다.
술사의 힘이 다 고갈됐거나.
다른 술법을 준비하고 있거나.
몇몇 머리 회전이 빠른 무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순간.
“이, 이게!”
수십 개의 벽이 무인들을 갈랐다.
수라는 힘을 무력화시키는,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 가장 좋은 방식.
“밤은 길지.”
반투명하게 밖이 보이는 검은 벽 속에 갇힌 무인들은 성큼성큼 걸어오는 백유의 모습에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살 가치가 있는 놈은 살고, 없는 놈은 죽는다.”
백유가 다가간 순간 벽이 열리고 다급하게 휘두르는 검이 그녀를 노렸지만, 간단히 제압한 그녀의 손은 거침없이 상대의 목을 꺾었다.
뒤이어 함께 갇혀 있던 이들까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소 총관, 아직도 못 골랐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백유가 뒤를 돌아보며 비틀린 미소로 웃었다.
“그럼 전부 죽일 수밖에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