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62화 (362/624)

제362화

361화-흑성(黑星) (8)

“사화가 움직였습니다.”

부하가 가져온 보고에 사내는 조용히 서신을 펼쳤다.

사파 전체에 선전포고를 하는 오만한 내용.

허나, 동시에 현재 사파의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과연 맹주의 유일한 제자라고 할 만했다.

거기에.

“흑성(黑星)이라…….”

사화 백유의 곁에서 그녀를 돕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고수.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소식이 끊긴 고수 중 그녀와 연이 있는 자가 있으니.

심지어.

“구강(九江)이라……. 놈이 사라진 곳에서 그리 멀지 않군.”

각성한 것이 감지된 이후, 홀연히 사라진 혈귀.

그 혈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구강에서 가까운 무혈(武穴)이었다.

찾아갈 이유야 충분하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에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놈의 상태는?”

“한 시진 전에 먹이를 먹고 얌전해진 상태입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키우려니 여러모로 번거롭군.”

먹이야 은밀하게 잘 구해 오고 있으니 문제없지만, 가끔 놈이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사고를 칠 때가 문제였다.

한두 번이야 어떻게 잘 숨겼지만,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주변에서 의심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묻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넘겨 왔지만…….

‘슬슬 힘들어질 때가 됐군.’

놈의 빠른 성장이 놀라울 정도다.

슬슬 제대로 된 비수로 써도 될 정도로.

그렇기에 반대로 그 기세를 숨기는 것이 어려워졌다.

기감이 날카로운 자가 이 저택을 찾아오면 바로 들킬지도 모를 정도로.

그런 상황이니만큼, 지금은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뒤로 미룬다.’

각성한 혈귀를 놓친 것은 아쉬우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두 마리 다 놓치는 수가 있다.

그쪽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쪽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 판단한 사내는 서신을 삼매진화로 불태우며 부하를 내려봤다.

“사화가 피워 올린 불씨에 적당히 장작을 넣도록.”

사천맹은 사존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곳.

분열시킬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내부의 균열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쪽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거대한 둑을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방법.

“칠가(七家) 중 우리의 영향력이 닿는 이들을 전부 자극하도록.”

전쟁 중 가장 진한 피가 흐르는 내전.

그 피가 자신들의 길을 탄탄하게 다져 줄 것이다.

* * *

“독하네.”

백사문의 지하 뇌옥.

쇠사슬에 묶인 여인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웬만하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걸 듣고 싶은데.”

“……헛수고다.”

술사 주제에 고문에 견디는 훈련을 받은 건지 여인은 초췌해진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미 손발의 뼈는 전부 부서지고 근육은 뭉개졌다.

그 격통은 숨을 쉬는 작은 동작조차 힘들게 할 터.

그럼에도 끈질기게 버티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저어질 정도였다.

[아쉽구나. 우리 중에는 고문을 익힌 이가 없으니.]

[죄송합니다. 소인은 죽지 않게 하는 고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천마와 흑사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태까지 적들은 전부 적당히 고문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죽이고 혼에 대고 물었다.

죽어서 혼이 된 이후에 겪는 고통은 육신의 고통과는 궤가 다르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적당히 하다 안 되면 그냥 포기하고 죽이려 했는데…….

‘독한 놈들.’

술사의 독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술사의 머리에 깃들어 있는 술법.

직접 술사에게 손을 댄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술사의 심장과 혼에 금제가 가해져 있음을.

저 심장이 멈추는 순간.

“혼의 소멸을 각오하다니, 독한 거 하나는 인정해 주지.”

단순히 독한 건지, 맹목적인 광신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의 소멸을 각오한 건 확실히 대단했다.

“그분과 세상을 위해서라면…… 나의 존재조차 하찮으니라……!”

부릅뜬 눈으로 힘겹게 말하는 여인.

그 모습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손을 뻗어 여인의 이마에 댔다.

“그렇다면, 그 각오 끝에 죽어 가라.”

상대의 굳센 각오에 감동해 순순히 죽여 주는 거?

정파의 협객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흑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동안은 사파가 될 거라서.”

설천위에게서 뻗어 나간 영력과 패기가 상대의 뇌로 파고든다.

신경의 개념을 알고 있는 설천위의 힘은 자연스럽게 뇌에 연결된 무언가를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신경 혹은 혈관.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천위도 알지 못하지만.

그중 일부만이라도 신경이라면.

“끄아아아아아아악!”

“아, 사파인은 약속을 잘 안 지키나?”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

설천위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인 백유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을 바라봤다.

“패기의 응용인가?”

“정확히는 영력에 패기가 섞인 거지.”

낙인의 개조 형태.

겉으로 낙인이 찍히진 않지만, 전신을 내달리는 고통의 수준은 낙인과 같거나 그 이상이다.

아마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신이 무너질 터.

목을 베는 건 그 이후에도 충분하다.

너무 과하게 잔인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시험해 볼 곳이 마땅히 없어서…….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라.”

이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몸을 비틀 뿐인 여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설천위는 손에 남은 감촉을 떠올렸다.

뇌로 스며들어 인체의 곳곳으로 뻗어 나가던 기운의 감각.

낙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부에서 새겨지는 그 감각.

그것을 설천위는 확실하게 기억했다.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낙인의 힘을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큰 성과였다.

물론, 이번에는 뇌라는 가장 좋고 편한 입구로 들어갔기에 수월하게 가능했던 거지만.

조금 더 연습하다 보면 전투 중에도 은밀하게 적에게 낙인을 남길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체 실험을 한 자신의 모습에 잠시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가자.”

“끝났어?”

“망가지면 목을 치라고 전해 두면 돼.”

“그거 나도 할 수 있나?”

“연습하면 아마도.”

“그건 좋은 소식인데?”

히죽 웃은 백유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을 한 설천위에게 다가갔다.

“꼭 알려 줘. 쓸모가 많을 것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다가와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치는 백유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먼저 감옥 문을 나섰다.

“알려 줄 테니 사용해 마땅한 놈들에게만 써라.”

“물론이지.”

히히 웃으며 설천위를 따라가는 백유.

혼과 신경을 찢어발기는 고통에 온몸을 뒤틀던 여인의 눈동자에 이들의 뒷모습이 담겼으나, 이내 그 눈동자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분노도, 원한도, 절망도.

그 어떤 것도.

* * *

“그래서 어떻게 할까?”

백사문 안의 별채.

느긋한 자세로 침대에 누운 백유의 질문에 설천위는 담담히 대답했다.

“움직여야지.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몇 놈 더 올 것 같은데, 여긴 그냥 두고?”

“한 번 지켜 줬으면 됐어. 애들도 아니고 네가 평생 품에 끼고 있을 건 아니잖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 설천위의 모습에 백유는 히히 웃었다.

“그야 물론이지. 나는 아직 아이한테 젖도 못 물려 본 처녀라고.”

“……그게 지금의 대화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매력 발산?”

“네가 처녀인 거랑 뭔 상관인데?”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내 부하들 놈들은 그랬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선후가 틀려먹었어. 아주 나쁜 편견이야, 그거. 처녀여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에게 내가 처음이라 기쁜 거야.”

“뭔 차이야?”

“……사내놈들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특별했으면 하는 바람이 다 있다는 소리다.”

아니,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인데 왜 갑자기 연애 상담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부하들이랑 연락은?”

“서신은 보내 놨으니 알아서 움직이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백유.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백유란 인물의 성격이 원래 저렇다.

패도(覇道)를 나아가는 성격.

딱 한 번 플레이해 봤을 때, 패기(覇氣)를 익히지 못했던 허술한 성장으로도 결말에 도달했었다.

그 과정에서 백유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만을 보여 줬다.

뒤따르는 이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나아간다.

따라올 자가 있다면 따라오게 두고.

떨어져 나간 자가 있다면 떨어져 나가게 둔다.

홀로 온전히 고고할 수 있기에.

아래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여미려의 말을 듣고 조금 다른가 했더니.’

설천위라는 존재가 끼친 영향이 있나 했는데…….

너무 과한 짐작이었나.

잠시 백유를 바라보던 설천위가 작게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그 정도 지시도 못 따를 정도로 멍청하게 키워 놓진 않았어.”

자신 있는 백유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고혹적인 미소로 웃고 있는 백유의 두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부하들은 능력이 꽤 좋거든.”

자신만만한 대답.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 않는 건가.

백유의 대답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은 설천위는 다시 붓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됐고.”

“흐응? 천위, 방금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은데?”

“믿는다. 네가 부하들을 믿듯이, 나도 너를 믿는다.”

“……그럼 뭐, 알겠어.”

살짝 늦게 대답한 백유의 얼굴을 설천위는 보지 못했다.

부적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도 나름 집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천위가 신중하게 부적을 만드는 사이,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백유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부적을 바라봤다.

“천위, 여태까지 한 번도 안 썼으면서 이런 부적은 왜 계속 만드는 거야?”

“연습이다.”

“연습?”

“나는 술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학관을 다닐 때 진법 관련 수업이라도 들을까 했지만…….

빌빌거리던 시기에 낙제한 무공 수업이 너무 많아서 그럴 짬이 안 났다.

진법은 많은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긴 했지만, 일단 분류는 교양이었으니까.

듣기로는 너무 어려워서 필수 수업으로 두면 졸업 못 하는 사람이 속출할까 봐 그랬다던데.

아무튼, 그래서 설천위는 끝내 학관에서 술법의 술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무림학관에도 진법 수업이 있었는데도.

무공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기초 수련과 자잘한 임무 정도만 했다.

술법이야 무림맹에 들어가서 백화단주 성화린에게 본격적으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밖을 나돌아 다닐 줄 몰랐거든. 그래서 일단 배운 것들을 복습하고 있지.”

술사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결계부터 탐지, 염화 등등.

배우지 못한 것들이 천지였다.

그래서 배우지 못했으니 일단 배운 것들이나 더 확실하게 익히기 위해 이렇게 짬이 남는 시간에 부적을 그리고 있는 거다.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짧게 하는 기초 훈련을 끝내면 시간이 남으니 딱 좋았다.

“……술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됐다고?”

그럼 내가 여태까지 본 것들은?

백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지만, 설천위는 알아채지 못하고 웃었다.

“아, 일 년 전에도 배우긴 했지. 그때 배운 것들은 유용하게 써먹고 있고.”

흑관도 그때 배운…… 건 아니고 만든 거였지.

나름 즐거운 추억이 가득했던 학관 시절을 떠올린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다시 붓을 움직였다.

“혈교 놈들은 술법도 꽤 다루니 나름 도움이 될 거야.”

일 년 배운 정도로 지금까지 본 것들이 가능한가. 백유가 의아해하는 사이, 설천위는 부적 하나를 완성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악귀를 쫓는 부적이야?”

“아니? 그런 걸 왜 만들어?”

“보통 부적은 그런 거 아닌가?”

“그건 도사들이 만드는 부적이고, 우리 같은 술사들이 만드는 부적은 좀 다르지.”

히죽 웃은 설천위는 부적을 가리키며 웃었다.

“벼락을 부르는 부적이야. 멋지지?”

“오!”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랑하는 설천위와 원래 그런 건가 하면서 놀라는 백유.

만약 이 모습을 성화린이 봤다면 어이가 없어서 그만 실소를 했을 거다.

‘……설 동생, 내가 언제 그런 걸 가르쳐 줬어?’

이런 허탈한 물음과 함께 말이다.

그녀가 가르친 속성은 물밖에 없었으니까.

설천위는 일 년도 더 전에 성화린이 한 번 보여 줬던 부적의 대략적인 형태와 함께했던 임무에서 느꼈던 성화린의 기운만을 기억 속으로 더듬어 이 부적을 완성한 거니 당연했다.

[……화강을 못 만든다고 억울해하던 이놈의 주둥이에 엄벌을 내렸어야 했거늘.]

이곳에서 그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천마의 허탈한 웃음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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