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359화-흑성(黑星) (6)
“그래서, 그런 내용으로 서신을 좍 돌렸다고?”
“응.”
연무장.
백유와 마주 보고 선 설천위는 그녀의 당찬 대답에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전쟁이라도 하려고?”
“그것 외엔 지금의 사천맹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장난스럽게 웃은 백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있다고 해도 고르진 않았을 것 같지만.”
투쟁을 추구하는 사파의 흑룡답다.
백유다운 대답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도를 뽑았다.
“그래서, 시험해 보고 싶다는 건?”
“음, 깨달음을 얻었으니 실제로 써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간단한 대답과 함께 백유의 양팔을 타고 뇌전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뇌전은 강기가 되어 그녀의 양손에 맺혔다.
검은 형태의 뇌전을 감은 강기.
그건 뇌전의 속성을 품은 그녀만의 강기가 확실했다.
보통의 화경급 무인도 최소 십수 년은 수련해야 얻을 수 있다는 화강(化罡)을 이리 자유롭게…….
[재능 하나는 확실하구나.]
[과연, 사파의 정점을 노릴 인재로다.]
“칭찬 고마워요.”
혼들의 칭찬에 밝게 웃는 백유.
전에 깨달음을 얻을 때 설천위의 영력을 흡수하며 영안을 개안한 백유는 이제 혼을 보고 만질 수도 있게 됐다.
[뀨웅.]
“그래그래.”
자신의 목 근처에서 애교를 부리는 패융의 턱을 손으로 긁는 백유.
손에 두른 강기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제어 능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설천위는 말없이 흑관을 만들어 냈다.
백유의 앞에 십수 개가 겹쳐져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 흑관.
그 흑관 앞에 선 백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강맹한 기세도, 빠른 속도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뻗어나간 손이 흑관에 닿는 순간.
콰득!
소리와 함께 몇 개나 되는 흑관이 단숨에 부서졌다.
“역시, 생각보다 쉽게 부서지네.”
“상성 문제 같은데.”
“그런가?”
패기를 뇌전의 형태로 품은 강기라니.
아무리 그래도 상성이 너무 안 좋다.
거기다 영력까지 깨달으면서 무의식중에 영력을 담고 있기까지.
아무리 설천위의 흑관이 다용도의 사기 기술이라도 이 정도까지 상성이 안 좋으면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저나 원래도 화경에 도달했던 거야?”
“응? 아니?”
“……아니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화경에 오른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화강(化罡)을 각성할 수 있을 리가…….
“조금 고민하던 것들이 있었지만, 강기를 만들진 못했지.”
……있지.
응.
재능의 격 자체가 다른 주인공급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패기를 완전히 각성한 것 하나만으로 몇 단계를 건너뛴 거냐.
백유의 말도 안 되는 재능에 혀를 내두른 설천위는 뽑고 있던 도를 세웠다.
“그럼 해 보자.”
“좋지.”
히죽 웃는 것과 동시에 거리를 좁혀 오는 백유.
도를 든 순간부터 제공권을 구축했던 설천위의 손은 능숙하게 방어에 들어갔다.
이쪽을 향해 들어오는 백유의 공격을 베어 낸다.
강기를 두른 것이 아니었다면 손이 베였을 날카로운 일격이 쏟아졌지만, 백유는 능숙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 냈다.
고작 며칠 전에 강기를 각성했다고 하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강기를 다루면서.
거기다.
[잘하는구나.]
[훨씬 능숙하군.]
설천위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깔끔한 무술 실력까지.
여러모로 설천위보다 뛰어난 백유의 실력에 혼들이 감탄하는 사이.
“이 정도인가.”
공격을 이어 나가던 백유가 손을 멈췄다.
“응, 이 정도면 됐어.”
“필요하면 좀 더 상대해 줄 수 있는데.”
“아니야. 이 이상은 천위, 네가 다칠 테니까. 환자를 상대로 실험할 단계는 아니야.”
그래, 그 정도 배려는 해 주는구나.
이쪽이 환자라는 걸 잊지 않은 백유의 배려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도를 거뒀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게 정확하게 뭔데?”
“패기(覇氣)라는 힘의 실험.”
패기(覇氣).
기(氣)라는 글자를 쓰고 있지만, 내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다.
영력에 가까운, 혼 혹은 의지가 만들어 내는 힘.
백유가 흑룡학관 시절에 패융으로 경험해 보고도 홀로 재현해 내는 데 실패한 이유가 있다.
단순한 무(武)의 재능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힘이니까.
“역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알기 힘든 힘이네.”
“뭐, 그렇지.”
단순히 타인에게 위압감을 주는 것이 패기(覇氣)가 아니다.
설천위만 해도 그것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을 전투의 기본 전제로 깔고 있고.
백유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애초에 다룰 수 있는 존재가 거의 드문 힘이니 그 사용처를 무리하게 한정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근데 천위,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인데?”
“화경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어제 어떻게 강기를 썼지?”
화강(化罡)이 진정한 화경의 상징이라곤 하지만, 애초에 강기 자체가 화경에 올라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출력을 요구하는 강기(罡氣)는 도저히 벽을 넘지 않고서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임맥과 독맥.
몸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이 두 혈도가 뚫려야 비로소 기의 순환이 크게 열리며 그 출력을 감당할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다.
그렇기에 화경에 오르는 것과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같은 의미로 두는 것인데…….
백유는 화경에 오르기 전부터 강기를 사용했다.
그것도 능숙하게.
설천위가 스킬로 얻은 [소령연화]를 사용하면 그 막대한 기(氣)의 출력을 버티지 못하고 꼬꾸라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
누군가는 영문 모를 존재가 입안에 퍼 주는데도 못 먹고 있는데…….
설천위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에 백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게 뭐 문제가 되나?”
“강기를 만들어 낼 정도의 막대한 내공의 흐름을 임독양맥이 뚫리기 전에 어떻게 감당했지?”
“천위,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백유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강기를 만드는 것과 막대한 내공을 움직여야 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강기를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의 내공이…….”
“이쪽이 끌어낼 수 있는 내공의 양이 1이라면, 그걸로 만들면 될 뿐이잖아?”
단순한 대답.
그리고 그 순간, 설천위는 멍하니 백유를 바라봤다.
머릿속으로 여태까지 스쳐 지나갔던 기억들이 되새겨진다.
자신의 몸을 빌린 혼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냈던 강기(罡氣).
극한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만들어 냈던 [소령연화].
생각해 보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그것들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조용히 입을 다문 설천위는 멍하니 백유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답이 됐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여태까지 이런 당연한 걸 못 깨달았다는 게 더 머리가 아프지만…….”
뭐, 깨달았다면 방법이야 금방 찾겠지.
창의력이란 게 이렇게 중요하단 말이지.
사람이 생각을 못 해서 그렇지,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 * *
……많았습니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일.
창의력은 개뿔.
[우리가 괜히 말해 주지 않은 게 아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구나…….]
죄책감 가득한 혼들의 위로를 받으며 설천위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10의 강기를 만드는 데 10의 출력이 필요하다면.
1의 강기를 1의 출력으로 만들면 된다.
그 본질이 강기라는 점에서 변하는 건 없으니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는 재능충들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능하긴 무슨 개뿔이 가능해?
백유에게 조언을 듣고 곧바로 연습에 들어간 설천위는 그야말로 연전연패.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 실패해서 그나마 나아가던 내상이 다시 도질 정도였다.
입안 가득 올라온 핏물을 삼키고 나서야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재능의 벽……!”
더러운 세상!
정도(正道)를 휙휙 건너뛰는 더러운 재능충 같으니라고!
술사들이 들으면 어이없어할 원망을 하면서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가 됐든, 일단 지금은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화경급 고수를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무리해서 연습할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더럽게 어려워.’
[소령연화]의 크기 자체를 줄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애초에 강기(罡氣)를 깨달아서 사용할 줄 아는 게 아니니 [소령연화]로 연습을 해야 했는데, 이게 너무 힘들었다.
화경에 오르기 전부터 화강(化罡)을 통제해 다룰 수 있는 백유가 괴물인 거지.
보통은 무리다.
그걸 까먹고 시도했으니 내상이 다시 도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깔끔하게 미련을 털어 낸 설천위는 밖으로 나가며 천천히 영력을 뿌렸다.
백유가 사파 전체에 광역 도발을 시전한 이상,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사존(邪尊)의 무(武)를 이은 진짜 제자.
그녀가 사천맹의 수뇌를 적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은 서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중이니 아직 제대로 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천천히 주위를 돌던 설천위는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방에 한참을 들어오질 않던데…….
[노력하지 않는 천재란 없다.]
[재능이란 끝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
혼들의 칭찬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조용히 패융을 풀었다.
좋다고 달려가는 패융.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설천위는 다시 주위를 돌았다.
꺄르륵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살짝 무시했다.
* * *
강서성(江西城) 남창(南昌).
구강보다 훨씬 더 큰 도시인 이곳에는 당연히 구강보다도 더 많은 돈이 흘러들었다.
음지에 흐르는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양지에 흐르는 돈의 총량 역시 구강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파양호와 이어진 간강(贛江)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 만큼 흐르는 돈의 양이 달랐다.
당연히 그곳에 자리를 잡고 땅을 갈라 먹은 사파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당연했다.
힘없으면 뺏기는 곳이 사파인데, 이만큼 넉넉한 돈이 흐르는 동네를 차지하려면 강함은 필수 조건이었다.
당연히 그 강함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이들이 이곳 남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백유가 뿌리라고 명한 전언은 당연히 사천맹보다 훨씬 가까운 이곳 남창에 먼저 닿았고…….
“이 주제도 모르는 어린년이!”
분노는 뜨거운 화염처럼 크게 솟구쳤다.
남창을 휘어잡은 문파 중 하나인 안귀문의 문주, 안건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감히 사천맹을 모독하다니! 맹주님의 제자라곤 하나 오만함이 제 목을 조이는 수준이구나!”
안건운은 사천맹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남창의 주도권을 휘어잡고 있는 문주.
당연히 지금의 사천맹에 문제가 있다며 시비를 거는 백유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참으로 오만합니다.”
그렇기에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크게 동조했다.
“그 오만함을 벌하고, 문주님의 충심을 본 맹에 알리는 것이 어떠십니까?”
“으음.”
오만하다고 화를 내긴 했지만, 구강의 소홍문과 벽고문은 나름대로 이 강서성에서 이름 있는 문파들이었다.
그런 문파들이 고작 며칠 만에 멸문되었는데…….
거기다 구강에서 남창이 가까운 편이라고는 해도 말이 그렇지 실제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말을 타고 족히 열흘 이상은 가야 하는 곳인데…….
순식간에 소극적으로 변한 문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있던 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맹주의 제자라고는 해도 순식간에 둘이나 되는 문파를 정리했습니다. 몸이 성할 리 없을 겁니다. 거기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로 욕망을 부추긴다.
“문파가 두 개나 사라졌습니다. 구강은 도시의 크기 자체는 작으나 환락가가 발달해 흐르는 돈의 양이 막대합니다. 그런 곳을 그런 어린 계집이 먹도록 놔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사파인을 가장 잘 흔드는, 돈이라는 단어에 문주의 얼굴이 변했다.
“흑성이라는 정체 모를 고수도 있다고 하던데…….”
상당히 혹한 듯 욕망으로 얼룩진 얼굴.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망설이는 모습.
그 얼굴을 보며 여인은 마무리를 지었다.
“본 교에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사화(邪花)라는 꽃도 꺾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창에서 일단의 무리가 일어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오만하게 피어오른 꽃을 짓밟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