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357화-흑성(黑星) (4)
전신에 휘감은 뇌전을 다루며 백유는 너무나도 쉽게 고창수를 상대해 갔다.
악을 쓰고 달려들면 쳐 내고.
뒷걸음치면 다가가서 복부에 발차기를 꽂는다.
초절정에 오른 고창수를 너무도 간단하게 압도하는 모습.
그 광경에 종무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세해야 하나?’
고창수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치명상은 없었다.
합공을 위해서라면 더 다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되기 전에…….
“아서라.”
“……흠?!”
대체 언제?
어느새 자신의 뒤쪽에 와서 앉아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종무는 기겁했다.
이렇게 쉽사리 뒤를 잡힌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아무리 백유와 고창수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지만, 이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종무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지만, 설천위는 상관없다는 듯 담담히 그를 바라봤다.
“종무, 백사문의 문주. 나름대로 선을 지키며 영업하는 탓에 재력으로는 구강의 세 문파 중에서 가장 밀림. 맞나?”
“……맞소.”
재력으로 가장 밀린다는 평가에 종무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대답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가면 속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반항할 의지가 서서히 꺾였기 때문이다.
“너는 아직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괜히 아까운 목숨을 버리지 말도록.”
“……그게 지금 무슨 헛소리요?”
지금 어린 백유한테 목숨 구걸이라도 하란 말인가?
싸워 보지도 않고?
딱딱하게 굳은 종무의 물음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그를 쳐다봤다.
“뭐, 죽고 싶다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만.”
잠시 종무를 바라본 설천위는 턱짓으로 백유를 가리켰다.
여전히 고창수와 거세게 공수를 주고받고 있는 백유.
다만 세월에 의한 내공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백유의 기세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반면, 고창수의 움직임은 큰 변화가 없었다.
명백하게 시간을 끌어 백유가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는 광경.
그 광경에 대체 뭘 보라는 거지?
설천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종무가 미간을 찡그리자.
“그래서 네가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 거다.”
냉정한 설천위의 목소리가 그를 나무랐다.
“기세가 약해지고 있는데도 공방의 균형에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허!”
설천위의 설명에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종무는 다급히 백유와 고창수를 다시 쳐다봤다.
공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백유의 동작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고.
‘……말렸다!’
반면, 고창수의 동작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련된 육체와 긴 시간 쌓아 온 내공이 그를 지탱해 주고 있었지만, 그 한계가 머지않았음은 명백했다.
그 증거로, 백유는 아직도 여유로웠지만 고창수의 표정은 점점 더 초조해지고 있었다.
백유의 몸을 휘감은 뇌전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목숨이 중하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슬슬 보이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지적에 종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차마 자존심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쯧쯧, 우리한테 들은 것 가지고 자랑은…….]
[너도 잘 몰라서 불안해하지 않았느냐?]
[눈은 좋은 녀석이 이런 걸 알아채는 건 느려 가지고, 쯧쯧.]
근엄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뒤에서 혼들이 그를 타박하고 있었다.
아마 백화단주 성화린이 있었다면 웃음을 참지 못할 광경이었지만, 설천위는 담담하게 그 모든 말을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기세를 잡는 거니까.
그나저나.
‘……이러라고 준 게 아닌데.’
뭔가 예상이랑 다른데.
그냥 예전처럼 패융을 딱 두르고 적당히 강화된 힘으로 쉽게 적을 쓰러트리라고 준 건데…….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패융의 힘으로 자극받은 패기를…….
설천위가 백유의 기이한 방식에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컥!”
목을 때리는 일격에 고창수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 일격에 당한 순간, 고창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목을 때린 공격이라니.
“이 빌어먹을 년이……!”
“꺄하하! 화났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 사실을 몸으로 깨달아 버린 고창수의 눈이 한층 더 깊어진 살기로 번들거렸다.
“응, 그럼 좀 더 분발해 봐.”
“……그 오만한 주둥이를 반드시 뭉개 주마.”
“좋아, 좋아. 그런 기세야.”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는 고창수를 보며 한껏 웃은 백유는 양손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 앞에 모았다.
“슬슬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거든.”
장난스러운, 뒤틀린 미소.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고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더 이상 나아가면 안 된다는 본능의 외침인가.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털어 낸 고창수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 밀려 허무하게 무너질 순 없다.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 이 자리에 섰던가.
머저리처럼 죽은 부하들은 일이 해결되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소홍문이 무너졌으니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땅의 크기는 더 커졌다.
그래.
이 상황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된다……!’
전화위복이라!
이번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뒤의 세상을 누릴 것이다!
이를 악문 고창수의 몸이 앞으로 나아가고.
뒤를 포기한 필살의 일격을 위해 육체는 다시금 힘을 쥐어짰다.
발은 거칠게 대지를 움켜쥐고.
허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 힘을 전한다.
처음 허무하게 막혔던 일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때려 박은 일격.
주먹을 휘감은 권기(拳氣)는 거칠게 요동치며 적을 찢어발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쾅!!
다시 한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온다.
자신의 주먹이 상대의 손바닥에 막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창수는 거침없이 몸을 비틀었다.
애초부터 한 방에 뚫을 거란 생각 따윈 안 했다.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두 번.
두 번으로 부족하다면 세 번.
세 번으로 부족하다면 네 번.
몇 번이고 주먹을 휘두를 생각이다.
저 건방진 계집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때까지!
쾅!!
두 번째 공격이 막힌다.
이윽고 다시 허리를 비튼 고창수의 주먹이 박히고.
쾅!!
세 번째 공격이 막힌다.
공격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반탄력을 원동력 삼아 거세게 몰아친다.
네 번,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그리고.
“하악! 하악!”
어느새 수를 세는 것조차 힘들어졌을 때.
고창수는 결국 주먹질을 멈췄다.
힘을 잃은 주먹이 허무하게 내려간다.
아니, 내려갔다는 것조차 눈으로 보고 겨우 알아챘다.
이미 주먹엔 아무런 감각도 없었으니까.
완전히 뭉개진 주먹은 차마 두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 되어 끈적한 피를 흘린다.
양팔을 타고 올라오는 미약한 전류는 지금 자신이 팔을 내리고 있는지 올리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고창수는 눈 앞에 펼쳐진 벽 앞에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검은 뇌전을 두른, 검은 벽.
“아, 끝인가?”
그 벽을 손에 두른 채 고창수의 모든 공격을 받아 낸 백유가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녀의 손에 선명하게 맺힌 기(氣).
“이런 식으로 쓰는 거였네. 덕분에 제대로 감을 잡았어.”
그것은 강기(罡氣)였다.
그것도 허술한 강기가 아닌, 정확하게 의지를 품고 만들어진 진짜 강기(罡氣).
시전자의 의지를 품고 그 뜻의 결정체로 화(化)한, 무의 극의.
화강(化罡).
그것을 가볍게 휘둘러 사라지게 만든 백유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고창수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졌습니다.”
“응, 뭐 그건 당연한 거고.”
장난스럽게 웃는 백유를 가만히 바라보던 고창수는 머리를 땅에 박았다.
“당신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복종 선언.
스스로 그녀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고창수의 말에 종무가 깜짝 놀란 순간.
“안 돼.”
백유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거절했다.
“흑룡(黑龍)에게는 품격이란 게 있어.”
땅에 박은 고창수의 머리에 발을 올린 백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해 파는 놈들은 최소한의 품격조차 없지.”
“그건……!”
꽈득!
고창수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거칠게 짓밟은 백유의 발이 그 머리를 뭉갰다.
인간의 두개골 따윈 가볍게 으깨 버리는 그 강한 힘에 감탄해야 할지, 거침없이 패배를 인정한 사람의 머리를 깨부수는 그 잔인함에 경악해야 할지.
종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종무.”
“예, 예!”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한 종무는 이쪽을 바라보는 백유의 눈과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꺾었다.
두 눈이 자연스럽게 땅을 향했다.
왜?
그 잔인한 손속의 목표가 되기 싫어서?
아니면,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뭐가 됐든.
“하명하십시오.”
자신이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부 정리해. 잡혀 있는 이들은 전부 구하고, 이놈들이나 너희가 관리에게 먹인 뇌물 장부를 전부 가져와.”
“예.”
“죽일 놈들은 전부 죽여. 흑룡의 비늘에 오물이 튀게 하지 마라.”
“명을 받듭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백유와 당연하다는 듯 그 명을 받드는 종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천위는 가면 속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패융이 자신에게 돌아와 있는데도 백유의 몸에서 강렬한 패기(覇氣)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보다 훨씬 잘 다루는구나.]
[으음, 군림하는 쪽의 재능은 역시 저 아이가 더 낫구나.]
설천위는 그저 존재를 찍어 누르고 위협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힘이지만, 백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군림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종무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말을 듣는 이유다.
아마 그가 했던 육도(六道)라는 게임에서 거의 유일하게 패기(覇氣)를 다뤘을 주인공.
“과연, 사천(邪天)인가.”
명불허전이다.
설천위가 솔직하게 감탄하는 사이, 종무를 물리고 백유가 그에게 다가왔다.
“흑성.”
아직 보는 눈이 있어서일까.
설천위를 미리 정한 별호로 부른 백유는 그의 소매를 잡고 거침없이 벽고문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격한 움직임에 당황한 설천위였지만, 이내 각오를 굳히고 따라 들어갔고…….
“천위.”
침대 위에 앉은 백유의 부름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이런 순간이 온 건가.
각오를 다지자.
내 반드시……!
“호법 좀.”
짧게 말하고 곧바로 명상에 들어가는 백유.
그리고 이내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요동치는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얌전히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마님한테 이를 거예요.]
반드시 호법을 완수하겠다는 의미였어.
……진짜로.
* * *
“으음…….”
“왜요, 언니?”
“뭔가 방금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는데.”
“네? 어디 속이라도 안 좋아요?”
“그건 아닌데…….”
서하영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수선한 분위기.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분위기가 점점 더 흉흉해지고 있었다.
흑룡단주의 실종과, 수적과 사천맹의 무차별적인 학살.
다행히 큰 피해가 나기 전에 불살대와 남궁세가가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아예 없을 순 없었다.
당연히 맹의 여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일단은 지켜보자는 온건파.
먼저 도발해 온 것은 저쪽이니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강경파.
문제는 강경파 쪽이 이미 우세하다는 점이었다.
성장할 대로 성장한 힘을 주체 못 하는 문파들에게 힘을 분출할 새로운 땅이 필요했으니까.
돈은 강물보단 피와 시체 위에서 더 윤택하게 흐르는 법.
정도(正道)는 돈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준비를 서둘러야겠네.”
이 격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혹은.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