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7화
356화-흑성(黑星) (3)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것 같은 여유로움.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오는 백유의 모습에 고창수는 이를 악물었다.
저 오만한 낯짝을 보라.
“백유, 드디어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어머, 언제부터 우리가 친했다고 외간 남자가 내 이름으로 막 부르나?”
“여유가 넘치는군. 지금 이딴 짓을 하고도 네년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응,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까득.
장난기 가득한 대꾸에 고창수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사이에 사방을 포위한 벽고문도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소홍문이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이곳에는 문주가 있다.
거기다 이 구강을 주름잡는 문파 중 하나인 백사문의 문주까지.
사천맹에서 이름을 날린 맹주의 제자라고 한들 아직 어린 계집일 뿐이다.
“오냐, 그 오만함을 이 자리에서 짓밟아 주마.”
그렇기에 흉흉하게 기세를 뿜어내는 고창수의 눈짓에 부하들은 이를 악물었다.
짧게 각오를 다지고 달려 나가는 문도들.
백유와 설천위를 향해 거칠게 돌진하는 문도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백유는 거칠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래야 사파지!”
대빵끼리의 정정당당한 승부?
그딴 게 어디 있는가?
머릿수에서 우위에 있다면, 그걸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지.
상대의 힘을 최대한 빼고 될 수 있는 한 유리해진 상황에서 싸워야지.
오히려 고창수가 바로 나섰다면 실망했을 거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사파의 영역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달려오는 문도의 검을 가볍게 쳐 낸 뒤 그 목을 움켜잡은 백유가 비틀린 미소와 함께 땅을 박찬다.
잡고, 비틀고, 때리고, 부순다.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다.
문주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달려드는 불쌍한 문도?
정파라면 그런 작자가 있을지 몰라도, 사파에는 그딴 거 없다.
강자의 밑에서 그 단물을 열심히 핥아 놓고, 마지막 순간에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만큼 역겨운 것도 없지.
“끄륵!”
목이 뜯겨 나가서 쓰러지는 적을 지나쳐서 다음 적을 붙잡으려던 백유는 뒤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약해 보였나?”
팔짱을 낀 채 흉흉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설천위는 포위만 당했을 뿐 아무도 공격하고 있지 않아서다.
움찔거리며 거리만 살짝 좁혔다가 다시 슬쩍 멀어지는 머저리들.
지금 당장에라도 문주의 호통이 날아와야 할 광경이지만…….
“이쪽으로 넘어오시오. 보상은 저년이 제시한 것의 배를 지불하지.”
문주조차 문도들을 나무라기는커녕 영입을 제안하고 있었다.
“……가면 때문에 분위기가 살아서 그런가?”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백유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고창수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강자다.’
어쩌다 백유의 곁에 서게 됐는지 몰라도 확실한 건 사천맹의 인물은 아니었다.
만약 저 정도 인물이 백유와 친했다면 반드시 소문이 났을 테니까.
즉, 은거하고 있던 기인일 확률이 높았다.
낭인 출신이든, 사파 출신이든.
은거한 고수들은 많았으니까.
백유가 무엇을 대가로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만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승산이 있었다.
“저런 애송이가 주는 것보다 훨씬 큰 대가를 지불하겠소.”
자신만만한 고창수의 말에 문도 하나의 가슴을 함몰시킨 백유가 이죽거렸다.
“어떻게? 나 정도 되는 미녀는 쉽게 못 구할 텐데?”
장난스러운 말투.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묘한 열의에 고창수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장난스럽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사실이었으니까.
백유는 그 강함만큼이나 뛰어난 미모로 유명한 인물.
그 아름다움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나름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들이댔다가 호되게 망신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높은 자존심을 가진 절벽 위의 꽃.
그게 바로 백유인데.
그런 여자가 자신을 약속했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대가에 고창수가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헛소리 그만해라, 백유.”
단호한 음성으로 그녀의 장난을 끊어 낸 설천위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슨!’
그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의자에 기겁한 고창수가 눈을 부릅떴다.
초인 중의 초인인 화경급 고수들이나 가능한 묘기 아닌가.
심지어 그들도 내공의 소모가 심해 거의 하지 않는 묘기인데…….
그걸 이런 상황에서 거침없이 펼치다니.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고창수가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설천위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안 도와주게?”
그 모습에 살짝 삐진 것 같은 백유가 볼을 부풀리자, 설천위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한 번 더 빌려주지.”
“뭘? ……아!”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감탄하는 백유.
그리고.
“응. 이거면 충분하겠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아…….’
뒈지겠다.
의자에 앉은 설천위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내상이야 천천히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완벽히 치료된 건 아니었다.
[회복]은 개사기 스킬이지만, 설천위의 내공은 개사기가 아니니까.
지금도 내공에 여유가 있으면 최대한 [회복]을 돌리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몸 곳곳에 구멍이 나고, 무리한 검술의 사용으로 관절과 근육을 극한까지 쥐어짰다.
내상은 뭐 기본이고.
아무리 설천위라고 해도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아니, 설천위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죽었을 거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야지.
‘일단, 조금 지켜봐도 되겠어.’
그렇기에 설천위는 자신을 포위했던 적들이 머뭇거리자, 즉시 자리에 앉았다.
나름대로 포스 있게 서 있었는데, 역시 서 있는 건 좀 힘들었다.
정신력이 굳건하니 통증을 무시하고 전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니까.
그리고.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백유는 거의 플레이해 본 적이 없으니…….
적진을 마구 헤집고 있는 백유의 등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그녀에게 좋다고 깃든 패융을 바라봤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영체 상태로 그녀에게 달라붙은 패융.
그녀의 상체를 휘감고 좋다고 볼에 얼굴을 비비는 꼴이라니…….
‘패룡(覇龍)은 무슨…….’
귀엽긴 하다만, 패(覇)를 논할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뭐, 백유는 아직도 영안을 개안 못 했는지 제대로 보진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볼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는 건 인지했는지 살짝 의아한 눈빛이다.
“흥!”
패융이 내뿜는 패기를 받아 가며 거칠게 전장을 누비던 백유의 곁에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다가가지 않게 됐다.
그 모습에 가소롭다는 듯 걸어 나오는 고창수.
그 흉흉한 눈빛이 문도들을 노려보자, 겁먹은 이들이 움찔거렸다.
“이딴 놈들도 부하라고…….”
“죽기 싫은 거야 뭐, 누구든 똑같지.”
이죽거리며 손을 거둬 허리춤을 짚은 백유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당신이라고 뭐가 다를까?”
명백한 조롱.
사파이기 이전에 무인(武人).
강함이라는, 무인이 추구하는 근본을 부정하는 노골적인 조롱에 고창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계집.”
그렇기에.
소매에서 팔을 빼 상의를 벗어 버린 고창수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군살이 넉넉하게 끼어 있던 소홍문 문주와는 전혀 다른, 단련을 거듭해 온 육체.
강함이라는, 사파의 최대 가치를 인지하고 있기에.
“그 주둥이를 뭉개 주마.”
고창수는 이 자리에 지금껏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성격이 맞지 않은 백사문주 종무가 기꺼이 이곳까지 걸음을 한 이유.
단순히 그가 강하기 때문이다.
구강(九江)이라는 작은 도시에 갇혀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꺄하! 응! 나쁘지 않네!”
그런 고창수의 거센 기세에 웃음을 터트린 백유는 천천히 양팔을 펼쳤다.
“전에는 그냥 휘감기만 했었지.”
고창수는 이해하지 못 할 말을 내뱉으며 백유는 천천히 양팔을 모았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기수식.
허세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쓸데없이 느리고 큰 동작.
보통이라면 한참 어린 무인이 저런 짓을 하면 ‘무슨 속셈인지 보자’라는 식으로 지켜보겠지만…….
“흡!”
고창수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백유의 뒤엔 자신이라고 해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강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
마치 백유를 시험이라도 하듯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황.
전투는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것이 최상이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고창수의 발이 단단하게 대지를 붙잡는다.
모든 무(武)의 근본은 하체.
그것은 인간이 땅 위에 서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결코 변하지 않을 진리다.
첫 일보(一步)에 담긴 힘만으로 능히 그 공격이 품은 위력을 읽어 낼 수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고창수가 내디딘 일보(一步)는 단주급의 강자라고 해도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단단하게, 흔들림 없이, 무겁게.
강한 공격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한 그 한 걸음은 이내 다리를 타고 올라가 허리에 닿고, 허리에서 등으로, 등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로, 팔에서 주먹에 닿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흐른 내공이 그 주먹에 실려 거대한 일격으로 변한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초인의 영역에 다다른 거력(巨力).
벽고(劈固)라…….
그것은 철벽의 방어라도 쪼개는 일격.
거기다 말한 것을 지키겠다는 듯 거침없이 파고든 주먹은 명백히 백유의 입을 노리고 있었다.
쾅!!
그리고 터져 나오는 폭음.
밟고 있는 땅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충격에 종무조차 놀라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강하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단순한 힘 싸움으로 그와 붙으면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특기를 살리지 않으면 허무하게 질 수도 있는 그런 강자.
고창수의 실력을 마음속에서 반 단계 더 높인 종무는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구름을 바라봤다.
이만한 힘이다.
여유를 부리던 백유는 제대로 된 회피도 하지 않았던 상황.
요행히 막았다손 치더라도 어디 한 곳은 부러졌을…….
“응, 나쁘지 않네.”
히죽 웃는 백유의 턱 앞으로 검은 뇌전이 흐른다.
그 앞에 도달한 고창수의 주먹은 마치 벽에 막힌 것처럼 멈춰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천맹에 공식적으로 맹주의 제자가 된 이는 십수 명.
전원이 젊은 무인이며, 차기 맹주를 노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들이다.
단, 그들은 사천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는 자격으로서 맹주의 제자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 실제로 사존(邪尊)에게 무공을 하사받은 이는 하나뿐이다.
맹의 중진들이 제안한 수많은 기재들을 거부한 사존이 유일하게 직접 무공을 전수해 준 제자.
“역시 이게 더 낫네.”
그게 바로 백유다.
맹의 말단에 있는 이들이나 밖에 있는 이들은 모르는.
진정한 사존(邪尊)의 후계자.
그것이 곧 맹(盟)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패융.”
그릇된 하늘을 휘어잡은 절대자의 무(武)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백유의 부름에 호응한 패융이 몸을 부르르 떨자, 백유의 내공이 그 기(氣)에 반응했다.
통제 불가능에 가까운 뇌전이 완벽하게 그녀의 의지 아래 통제되기 시작했고.
“컥!”
순식간에 꽂힌 발차기에 고창수의 몸이 쭉 밀려난다.
두 줄기의 고랑을 만들며 십수 걸음의 거리를 밀려난 고창수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 이런 느낌인가?”
검은 뇌전을 휘감고, 찰랑이는 흑발이 허공으로 떠오른 비현실적인 모습.
거기다 가슴을 짓누르는 기묘한 기세.
이를 악문 고창수가 어떻게든 다리를 펴고, 허리를 세우자.
“좋네. 포기하지 않는 근성 좋아.”
그 모습에 히죽거리며 웃은 백유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쾅!
백유가 뻗어 온 손을 겨우 팔을 들어 막아 낸 고창수는 충격에 저릿저릿하게 저려 오는 팔을 휘둘렀다.
뇌전을 털어 내고, 다시 상대를 응시한다.
최선을 다한 공격마저 막혀 막막한 상황.
“좀만 더 해볼까?”
고창수의 적은 여전히 비틀린 미소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