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355화-흑성(黑星) (2)
“일단, 먼저 정리할 건 소홍문이야.”
“이유는?”
“가장 약해.”
구강(九江)의 외곽.
허름한 객잔에서 소면을 먹으며 설천위와 백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주는 겨우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허접.”
“초절정이 언제부터 허접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단순해. 정문으로 들어가서 싹 정리한다. 끝.”
“……너무 단순한데.”
아무리 그래도 둘이서 쳐들어가는 건데, 어느 정도의 계획은 필요하지 않나.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단순한 게 나아.”
“그건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는 건?”
“나, 꽤 유명인이라서 말이야. 아마 구강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이미 퍼지고 있을걸?”
“그 정도야?”
“응.”
도망치기 전에 꽤나 화려하게 하고 도망쳤나 보구나.
역시 백유는 백유네.
“그래서, 지금 이거 먹고 나면 바로 움직일 거야.”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 아직 환자인데?”
“걱정 마. 넌 문주만 처리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게 걱정인데.
이 몸 상태로 초절정 고수가 상대라…….
이길 수 있나?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해 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여기 맛없네.”
“뭐, 이런 객잔의 음식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간을 세게 해서 살짝 짜고, 국물에선 미묘한 냄새가 나는.
정성이 부족한 음식이 그렇지 뭐.
그래도 뭐, 물고기나 구워 먹다가 먹으면 그리 나쁘지 않은 맛이지만.
인간 세계의 맛이라고 해야 하나.
“됐다. 가자.”
“가자고?”
“어. 슬슬 움직여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설천위의 팔을 잡아끌고 객잔 밖으로 나간 백유는 순간 우뚝 서서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왜?”
“좀 가릴까?”
“뭘?”
“나름 무림맹의 단주인데, 사파의 내분에 개입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
응. 많이 그렇지.
“천위, 권법도 꽤 썼지?”
“어느 정도는?”
현태중과 소백진의 검과 도를 배운 뒤로는 잘 쓰진 않았지만,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다.
“좋아. 그럼 그걸로 가자.”
“가긴 뭘 가?”
“사파의 어둠에서 움직이는 영웅, 흑성(黑星)!”
……그건 또 뭔 개소리야.
히힛, 웃으며 헛소리를 내뱉은 백유는 이내 빤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뭐?”
“빨리 가려.”
“……그러니까 뭘?”
“얼굴. 검이나 도는…… 대충 가려서 뒤로 묶어 숨기면 되려나?”
흠흠, 고개를 주억거린 백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얼굴은, 그 검은 상자를 만드는 거로 잘 가려 봐. 가면처럼 만들 수 있지?”
“그게 되겠……네.”
응. 가능할 것 같네.
될 것 같으냐고 되물으려다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연스럽게 영력으로 얼굴을 가렸다.
검은 가면.
별다른 무늬 같은 것 없는 가면이 얼굴을 가리자, 백유는 손가락으로 가면은 쓸었다.
“나쁘지 않은데……. 너무 밋밋한데.”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쓰는 가면인데, 이 정도면 충분…….”
“버들로 하자.”
“……말 좀 들어라.”
한숨을 내쉬면서도 설천위는 착실하게 영력을 움직였다.
가면 위로 수놓아지는 유려하게 늘어진 버들 문양.
“좋아!”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은 백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걷던 것은 이내 달리기로 변하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어느새 바람을 휘감고 나아간다.
그리고.
쾅!!
“이리 오너라!!”
단숨에 정문을 발로 차 부수며 진입한 백유가 부서진 정문의 잔해 위에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다들 배때기가 불렀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구나.”
소란과 함께 순식간에 몰려드는 무인들.
백유의 노골적인 조롱에 무인들의 기세가 한층 더 흉흉해졌다.
“네년!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사람 사고파는 곳이지.”
사람을 사고파는 것.
사파에서도 경멸받는 최악의 장사 수단.
돈에 눈이 멀어 손을 대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자신들도 그게 걸리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숨기려는 노력 정도는 하는 장사.
소홍문은 그런 장사를 하는 사파 중 하나다.
이 쾌락의 도시에서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머저리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일주일에 몇 명 정도야 일상처럼 사라진다.
그 원인이 바로 이 눈앞에 있는 놈들이고.
백유의 지적에 흉흉하다 못해 살기로 가득 차오른 장원의 공기.
이대로 죽여 입을 막을 생각에 가득 찬 적들을 보며 백유는 웃었다.
“난 청소가 취미야.”
싸늘하게 비틀리는 백유의 입꼬리와 함께 소홍문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꾸에에엑!”
“어우.”
저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야?
부서진 정문의 잔해 사이를 걸으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네.
훌쩍 뛰어가 그대로 전투를 시작한 백유의 뒤를 따라온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움직였다.
저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는 중년 사내.
주변과는 기도 자체가 다른 것이 딱 보니 알 수 있었다.
“문주?”
“누, 누구냐!”
검에 손을 올리고 외치는 모습.
역시.
“빠져 가지고.”
꽤나 흉흉한 기세에 비해 허술하기 그지없는 대응.
“할 만하네.”
좋은 것을 처먹고 세월로 쌓은 내공으로 꾸역꾸역 초절정에 오른 머저리다.
검기 정도야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함량 미달.
반쪽짜리라고 부르기도 힘든 가짜다.
뒤늦게 대화나 나눌 때가 아님을 깨닫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참으로 가소롭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단숨에 거리를 좁히자,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리기 위해 보법을 밟는다.
하지만 그동안 어찌나 연습을 게을리했는지, 무엇보다 자연스러워야 할 동작에 섞인 어색함이 그 속도를 크게 늦췄다.
내공으로 속도를 올린 저런 보법은 경지가 낮은 이들에게는 충분히 빨라 보이겠지만.
같은 경지에 선 이가 보기엔 가소로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조잡한 몸짓이다.
능숙하게 상대의 보법을 따라간 설천위는 쾌의 묘리를 실은 주먹으로 상대의 몸을 후려쳤다.
상대의 가슴에 박히는 주먹.
한 번 공격에 성공했으니 이제 방어에 치중할 차례.
몸쪽으로 팔을 당기던 설천위는 고통에 일그러지는 상대의 얼굴에 헛웃음을 지었다.
고통에 일그러지다 못해 몸이 움츠러드는 꼴이라니.
아무리 돈놀이로 먹고사는 문파의 수장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이건 진짜 너무한데.
방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설천위는 즉시 공격에 나섰다.
움츠러들어 자신의 턴을 놓친 상대의 몸에 주먹을 때려 박는다.
쾌(快)의 묘리를 담은 주먹은 빠른 만큼 가벼웠지만, 그 양이 많아진다면 얘기가 다르다.
한 방울의 비는 작은 풀조차 적시지 못하지만, 하늘을 뚫고 떨어지는 폭우는 갈라진 대지마저 적시는 법.
수십 번 적의 몸을 두들기는 주먹.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빠져간 적은 내상을 입었는지 몸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하는 눈동자.
그 초라한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대를 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허접했으니까.
“크아아악!”
백유의 손에 찢기고 부서져 죽어 나가는 부하의 모습에 겁을 먹은 걸까.
어떻게든 설천위만이라도 치워 내고 도망치기 위해 문주는 설천위에게 달려들었다.
무식한, 그러나 어찌 보면 과감하기 그지없는 돌진.
원래도 조잡했던 몸짓이 더욱 허술해졌다.
휘두르는 검을 쥔 손을 쳐 내고.
악을 쓰며 차올리는 발을 쳐 내고.
이를 악물고 머리라도 쓰려는 박치기를 피한다.
무식하고, 의미 없는 공격들.
쳐 내고, 피하는 것을 고작 몇 번 했을 뿐인데.
쩡!!
“카학!”
너무나도 쉽게 단전이 열렸다.
수적을 상대로 실패했었던, 발로 하는 단전 부수기.
활인쇄(活人碎).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성공시킨 설천위는 피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문주의 머리를 밟았다.
“이, 이……!”
공포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들.
문주가 처맞고 있는 내내 뒤에서 떨고 있던 놈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기어코 이성을 잃고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놈들까지.
그야말로 개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설천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붙잡고, 단전을 부순다.
그 단순한 반복을 몇 번 더했을까.
기절한 문주의 위에 앉아 쉬고 있던 설천위는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정리했어?”
“거의 다 죽였으니까.”
그게 빠르긴 하지.
“뭐야, 안 죽였네?”
“나름 정파인인데.”
“천위, 그건 좀 재밌네.”
농담 아니야.
히죽히죽 웃는 백유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거의 다 죽였는지 살아 숨 쉬는 인간이 거의 없다.
살아 있는 놈들도 사지 중 하나 정도는 잃고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지만…….
“구출은?”
“관아 놈들도 한패야. 지금 당장은 처리 못 해.”
“쯧.”
사파가 득세하는 도시의 관리가 그렇지 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받아먹을 거 받아먹으며 눈감아 주는 게 보통이다.
주머니도 채우고, 사파의 협박에서 몸도 지키고.
일석이조지.
“뭐, 지금만 힘든 거지.”
설천위의 반응에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낸 백유는 활짝 웃었다.
“대충 다 정리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다 정리하면?”
“응. 다 정리하면.”
그냥 봐도 반할 것 같은 외모로 활짝 웃는 백유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밑에 깔린 문주를 바라봤다.
……앞으로 두 곳 남았다고 했나.
다음 녀석도 이런 놈이면 좋겠는데.
* * *
“그 미친년이!”
쾅!
거칠게 탁자를 내려치는 것과 함께 터져 나온 고성에 종무는 미간을 찡그렸다.
“시끄럽소.”
“지금 그딴 게 문제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상대의 모습에 종무는 고개를 저었다.
‘짐승 같은 놈.’
하는 짓부터 성격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놈이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얼굴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을 텐데.
“그 미친년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어찌 화가 안 나겠냐 이 말이오!”
맹주의 제자 중 하나인 백유.
한동안 실종됐던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소홍문을 멸문시켰다.
문도 대부분을 죽이고, 그 문주마저 폐인으로 만든 뒤 문패(門牌)로 달아 버린 광기.
그 강함은 능히 초절정의 완숙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놈이 이렇게 발작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고창수, 이놈이 이끄는 벽고문이 다음 목표로 정해졌으니까.
이 구강(九江)의 사파를 전부 자신의 휘하로 넣겠다는 오만한 말과 함께 날아온 서신.
단전이 부서져 폐인이 된 소홍문의 장로가 가져온 서한을 직접 받아서 읽었으니 화가 솟구칠 만도 했다.
물론.
“당장이라도 먼저 공격해야 하오!”
분노만큼이나 불안감도 치솟은 것 같지만.
악을 쓰는 고창수의 모습에 종무는 고개를 저었다.
“적은 그 계집 말고도 하나 더 있소. 정보를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격하는 건 악수지.”
“고작해야 둘인데, 먼저 치는 것이 무조건 유리하지!”
“그럼 혼자 가서 치시게나. 나는 그리 급하지 않으니.”
“이이! 지금 그게 말이라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종무의 태도에 화가 솟구친 고창수가 악을 쓰려던 찰나.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마치 약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가구들.
“이리 오너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고창수는 거칠게 문을 박찼다.
그런 고창수의 뒤를 따라나선 종무는 부서진 정문의 잔해를 밟고 당당히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무언가 강렬한 기세를 품은 모습.
하지만, 순수하게 그 기세에 감탄한 종무와 달리 자신의 문파가 침범당한 것에 화가 솟구친 고창수는 난폭하게 살기를 끌어올렸다.
“네년……!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구나! 혼자 전부를 상대할 셈이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묻는 고창수의 모습에 백유는 히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돼지 멱따는데 사람이 많이 필요한가? 뭐, 그래도 혼자 오면 심심하니까 하나 더 데려왔어.”
장난스럽게 웃는 백유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설천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설천위의 어깨에 턱 하고 팔을 올린 백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 해, 안 덤비고? 나 빨리 끝내고 밥 먹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