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55화 (355/624)

제355화

354화-흑성(黑星) (1)

어둡다.

마치 삭월의 밤처럼.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발밑으로 흐르는 잔잔한 파문만이 느껴진다.

이 파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지만, 걸어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왜일까.

어두운 곳을 걸을 땐 발밑을 조심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어째서.

의문은 그저 짧게 스쳐 지나갈 뿐.

몸은 당연하다는 듯 움직인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삭월(朔月)은 현월(弦月)이 되고.

현월(弦月)은 상현(上弦)이 되고.

상현(上弦)은 만월(滿月)이 된다.

그리고 가득 차오른 달빛이 사방을 비추자 설천위는 볼 수 있었다.

잔잔하게 퍼지던 파문이 시작된 곳을.

그 원인을.

[――――――!]

[―――!]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이지러진 혼들의 외침.

허나,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원망.

증오.

살의.

명백하게 자신을 향하는 그 일그러진 혼들의 외침에 설천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뭐, 어쩔 건데?”

조롱.

조소.

그 반응에 혼들의 외침은 더더욱 격렬해졌지만, 설천위는 담담히 나아갔다.

만월의 아래에서.

외침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혼들의 사이를 담담히.

아무렇지 않게 나아간다.

그리고 가장 앞으로 나온 혼의 손이 이제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뻗어 나왔음에도,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이유가 없었다.

[――――!]

닿지 못하고 스러지는 팔을 부여잡은 혼이 온몸을 비틀었지만, 설천위는 무시했다.

앞으로, 또 앞으로.

쉬지 않고 걸어가다 보니 금세 끝에 도달했다.

이 세상의 끝이 아닌, 설천위가 도달하고자 하는 끝.

공간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철문.

흑룡이 새겨진 그 철문 앞에 서서 설천위는 뒤를 돌아봤다.

비틀리고 어그러진 혼들이 이쪽을 향해 기어 온다.

얼굴이 기억나는 이도 있는가 하면, 기억나지 않는 이도 있었다.

“내 재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자신이 죽였던 이들의 면면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많이 죽였네.

어느새 살인에 이렇게 익숙해졌구나.

쓰게 웃은 설천위는 돌아섰다.

저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작 후회 따위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죽인 이들의 혼까지 거둔 자신의 재능에는 조금 놀랐지만.

지금은 그것을 써야 할 때.

“패융.”

[크르르르르.]

자신의 몸을 타고 올라오는 패융을 느끼며 설천위는 철문에 손을 댔다.

“전부 먹어 치워.”

[크르르.]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어야지.

패융의 몸이 거대해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설천위는 철문을 열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날 때다.

* * *

[……진짜 멀쩡하네요?]

[말하지 않았느냐?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몸은 전부 회복됐으니 문제는 혼에 가해진 충격인데…….]

고작 그딴 걸로 이 녀석이 당할 리 없지.

뒷말을 아낀 신의는 나룻배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에게 종속된 자신들은 그의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설천위에게 달라붙었던 악령들.

반쯤 설천위가 억지로 끌어당겼던 것이지만, 그것들이 전부 사라졌다.

조잡하지만, 확실한 악의와 살의를 품고 있던 것들인데.

“오, 천위 일어났네?”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두 시진 정도?”

“생각보다 길었네.”

창백했던 얼굴에 어느새 혈기가 돌기 시작한 설천위는 아예 일어서서 배에서 내렸다.

백유가 적당한 강변에 올려놨던 배에서 내린 설천위는 자연스럽게 움직여 모닥불 앞에 앉았다.

“추적은?”

“없었어.”

“생각보다 쉽게 포기했는데.”

이쪽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겁먹은 건가?

아니면…….

한 놈을 구해 도망친 혈귀를 떠올린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때다.

“부하들은?”

“일단 약속 장소로 가라고 해 놨어.”

“얼마까지 숨어 있을 수 있지?”

“멍청한 놈들은 아니니까 우리가 가기 전까지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어.”

“그건 듬직하네.”

백유의 확신이 담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백유가 건넨 꼬치를 받았다.

바삭하게 익은 물고기 껍질이 아주 일품이네.

여전히 요리 솜씨는 훌륭하네.

최근에는 유예린도 요리를 시작해서 장원에 있을 때 꽤나 얻어먹었는데.

아직까진 백유 쪽이 요리 솜씨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천위.”

“응?”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정말 할 거야?”

진심이 담긴, 부드러운 눈동자.

미친눈나에서 눈나를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 이렇게 튀어나오네.

따스하면서도 듬직한 그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백유.”

“어.”

“밥이나 먹어. 헛소리 그만하고.”

웃으며 다시 물고기를 뜯기 시작하는 설천위.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백유는 이내 자지러질 듯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 그래! 천위, 그래야지.”

한참을 웃다가 겨우 호흡을 되찾은 백유는 숨을 고르며 꼬치를 흔들었다.

“내가 고른 낭군님인데, 응. 이 정도는 돼야지.”

“누가 낭군님이야?”

“이번 기회에 기정사실로 만들 테니까, 문제없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조금 늦은 거 보니까 조금쯤은 기대하고 있나 보네? 후후.”

“어허, 나는 엄연히 임자가 있는…….”

[맞아요! 마님이 있다고요!]

너 인마, 멋대로 실체화할래?

어느새 실체화해 어깨에 양팔을 걸치고 백유를 향해 항변하는 청아의 이마에 딱밤을 갈겨 준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진짜 헛소리 그만하고 본론부터 꺼내 봐.”

“그래.”

설천위의 말에 장난기를 지운 백유는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내밀었다.

가죽 위에 꽤나 섬세하게 지형이 그려진 지도.

“지금 사천맹의 핵심은 전부 혈교 놈들이랑 엮였다고 보면 돼.”

“더럽게 빠르네. 맹주는?”

“실종. 아마…….”

“시험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지?”

게임에서도 사천맹주의 뜬금없는 실종의 이유로 유저들이 가장 많이 꼽은 것도 저거다.

시험.

자신이 없을 때 사천맹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그런 시험.

뭐, 사천맹주가 사라지자마자 혈교랑 손잡고 옆에 있는 놈들 뒤통수나 후려치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금화에 눈이 멀어 멀리 있는 금화의 산을 걷어차는 전형적인 사파의 모습이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는 녀석들은 생각보다 적어.”

“그렇겠지.”

그 정도 정보 통제도 못 하면 그건 머저리지.

전도울이나 소준극이나.

욕심이 가득해 시야가 좁은 놈들이긴 하지만,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사파에서 자기 배를 채울 수 있는 놈들은 나름대로 다 한가락씩 하는 놈들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

지금 사천맹의 수뇌가 혈교랑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그들의 행보에 불만을 품을 순 있다.

특히, 그동안 이어진 평화 속에서 자기 배를 잘 채우던 인간들이라면 더더욱.

오히려 혈교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자기 구역에서 잘해 먹고 있었는데 딱 봐도 불리한 정파와의 전쟁이 다시 터지면, 전처럼 해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더욱이 전쟁으로 힘이라도 크게 소모된다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놈들한테 밥그릇을 전부 뺏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걸 사천맹이 막아 주냐?

그럴 리가.

사파가 괜히 사파겠는가.

자기 밥그릇은 자신이 챙겨야 하는 법.

사천맹의 힘이 두려워 협력하긴 하겠지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끌어들일 놈들과 쳐낼 놈들은 대충 정리해 놨어.”

“용케 했네. 도망치는 도중이었다면서.”

“정리해 놓은 걸 실행하다가 도망친 거라서.”

“아.”

……여미려가 고생이 많네.

응, 백유를 따라가면 개고생이긴 하지.

“우선 정해야 할 건 네 의사야. 천위.”

“뭐가?”

“그 혈귀를 쫓을 거야?”

혈귀를 쫓는다.

그 말에 설천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도망친 혈귀를 쫓는다.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아니, 사실 해야 맞는 선택이다.

혈귀는 기본적으로 살육을 위해, 살육에 의해 태어난 괴물이니까.

새로운 자아를 얻었다고 해도 그 본능에 새겨진 살의(殺意)만큼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대로 놔두면, 아마 꽤나 많은 희생자가 나오겠지.

“……일단 놔두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리할 수 있느냐?

답은 ‘아니오.’였다.

남궁현궁이 있는 상황에서 이쪽이 가진 걸 다 쥐어짜 현태중까지 보냈는데도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 여파로 마른 적 없던 영력이 일순 말라서 기절까지 했을 정도인데.

그럼에도 잡지 못한 적이다.

혼자 추적해 잡는다는 건 과욕이다.

무엇보다.

“혈교에서 움직일 거야. 다시 만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걸?”

자아를 얻었다고 해도 혈귀는 혈귀다.

혈교는 미친놈들이지 모자란 놈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존재를 제어할 방법도 제대로 못 갖추고 덤벙대는 머저리들이랑은 다르다.

아마 지금쯤 완성의 영역에 들어선 혈귀를 감지하고, 어떻게든 찾아내 교의 제어 아래 두려고 움직이고 있겠지.

혈교가 사천맹과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그놈은 일단 제외하고.”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

“백유.”

“응.”

“바로 움직이자.”

“네 몸 상태를 생각하면 적어도 2주는 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2주도 말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던 설천위의 상태를 떠올린 백유는 멀쩡하게 앉아서 물고기를 뜯는 설천위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괜찮지 않아요! 주인님은 무리하는 게 일상이니까!]

청아가 빽 소리쳤지만, 백유는 그녀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 노리기 좋은 목표는 구강(九江)에 있는 놈들이야.”

“바로 근처군.”

“강을 타고 꽤나 이동해야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이지.”

사파의 영역에서 장강을 끼고 발달한 쾌락의 도시 중 하나.

구강(九江).

몇 개나 되는 호수를 끼고 있어 뱃놀이로도 유명한 풍류의 도시다.

당연히 돈이 넘칠 만큼 있는 곳이라 그곳에 자리 잡은 사파의 세력도 꽤나 큰 편이다.

“한 곳은 포섭하고, 두 곳은 쓸어버리는 거.”

“그게 계획이야? 상황이 틀어지면?”

“전부 쓸어버려야지.”

“……둘이서?”

“둘이서.”

응.

그렇겠지.

부하들이 숨어 있는 곳은 작은 마을.

구강과는 먼 곳이다.

당연히 둘이서 가야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둘이서 정리하는 건 무리이지 않나?”

상대도 나름 강한 문파들 아니야?

무리 같은데?

“천위.”

불신이 담긴 설천위의 물음에 백유는 활짝 웃으며 그 어깨를 붙잡았다.

“그런 건 하고 난 뒤에 고민하는 거야.”

……이런 미친.

아깐 눈나가 붙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미친’만 남은 거냐.

눈깔도 이상하잖아.

* * *

구강(九江)을 주름잡는 사파는 총 세 곳이다.

물론 자잘하게 작은 곳들이 있긴 있지만, 그런 곳들은 무시해도 무방했다.

정말 강한 세 곳이 완전히 구역을 갈라 먹고 있었으니까.

딱 안정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고.

여행 온 부자들의 지갑을 털어 가며 살아가는 삶.

그러니 어찌 풍족하지 않겠는가.

그래.

풍족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삶인데…….

“이, 이게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부서진 정문.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부하들.

웃으며 건물의 기둥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여자.

그리고.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앞에 선 괴물까지.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소홍문의 문주인 소경호는 몸을 떨었다.

상대의 주먹을 막아 낸 충격으로 뒤틀린 내장에서 피가 솟구치는 기분.

충격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소경호는 한껏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대로, 이대로 질 순 없다!

그런 각오와 함께 소경호가 달려들었지만, 고작 십몇 합 만에 바닥을 드러낸 그는 자신의 품을 상대에게 내주고 말았다.

쩡!!

“카학!!”

단전이 부서져 날아가는 소경호를 뒤로한 채, 불타오르는 장원을 바라본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되네.”

진짜 될 줄은 몰랐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