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54화 (354/624)

제354화

353화-혈천 (8)

옛날에 죽은 친우의 등장.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친우의 모습에 남궁현강조차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지만.

“과연, 그 괴물의 부하인가.”

그 뒷이야기를 모르는 혈천은 담담히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했다.

베인 어깨를 잠식하던 기운을 밀어내고, 상처를 회복한다.

본래라면, 즉시 회복되었어야 할 상처가 기운을 집중해야 겨우 회복되는 상황.

단순한 무인의 공격이 아니다.

무엇보다.

본능의 단계에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저 적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런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건 그 괴물이 아직 회복이 덜 됐다는 소리군.”

확신이 생겼다.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던가.

설령 그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존재일 터.

그런데 직접 나타나지 않고 이런 방식을 썼다는 것.

직접 움직이지 못하는 몸 상태라는 걸 스스로 말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괴물 놈이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헛수고다.”

큰 벽이 될 수 없다.

단숨에 사라진 혈천의 몸이 현태중의 앞에 나타난다.

고작해야 술사가 만들어 낸 허상.

수백의 제물을 바쳐 완성된 존재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로 파고드는 혈천의 공격이 현태중을 후려친다.

술법으로 만들어 낸 존재라고는 믿기 힘든, 경악스러운 물리력.

심지어 거기에 담긴 혈기(血氣)는 영에 직접적으로 침범하는 힘이다.

술사가 만들어 낸 허상 나부랭이가 버텨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애송이, 하나 알려 주마.”

분쇄됐어야 할 적의 담담한 목소리에 혈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약간, 비스듬히 서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현태중.

“어떻게?”

“닿지 않으면, 어떤 힘도 의미가 없다.”

혈천의 물음을 무시하며, 검을 위로 긋는 현태중.

담담하기 그지없는 그 검술에 혈천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턱을 손을 들어 가로막았지만.

“하?”

막은 손에는 아무런 감촉도 없이, 왼쪽 턱에서부터 볼까지 단숨에 상처가 벌어졌다.

만약,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단숨에 눈까지 갈라 버렸을 무시무시한 일격.

거기까지 당하고 나서야 혈천은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염천의 기억.

다변(多變)을 넘어.

진실조차 거짓이 되고.

거짓조차 진실이 되는.

정파에서는 신선의 검 놀음이라 불리던.

그리고 적에게는.

“귀검(鬼劍)……!”

귀신의 검이라 불리던 그 검(劍)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혈천은 즉시 태도를 바꿨다.

공격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다스린다.

동시에.

자신이 보고, 느끼고, 들은 것들.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믿어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육감.

인지를 벗어난 감각.

이성적으로 근거를 논할 수 없는, 무지의 힘.

그것만을 믿고.

서걱!

나아간다.

어깨를 베고 지나가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혈천은 움직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달려온 남궁현강의 검을 피하며, 동시에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비튼다.

조금이라도 늦는 순간, 살이 갈라지고 피가 솟구친다.

공격의 우선순위를 정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궁현강의 공격으로 입은 상처는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었고.

현태중의 공격으로 입은 부상은 재생하는 데 꽤나 힘의 소모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완전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종류의 검이 바로 이 변검(變劍)이다.

극에 이른 변검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가 멎고 고정되는 것은 육체에 닿기 직전 찰나의 순간뿐이니.

그 순간만을 정확히 포착해 완벽히 피하거나 막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밀린다.’

혈천의 몸에는 점점 더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남궁현강과 싸울 때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성에서 오는 우위였을 뿐이다.

영적인 존재에 가깝기에 가능한 재생 능력.

남궁현강의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오는 이점.

거기다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가 아니기에 지치지 않고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유리함까지.

그런 장점들이 더해져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혈천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 증거로, 분명 유리한 것은 맞았지만 남궁현강과의 전투에서 혈천은 그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남궁현강의 공격이 혈천에게 잘 통하지 않듯, 혈천의 반쪽짜리 무력으로는 남궁현강의 방어를 제대로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균형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현태중의 검(劍)을 휘감은 패기는 영체에 직접 스며들었고.

그 힘을 밀어내고 회복하기 위해선 혈천이라고 해도 꽤나 많은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지칠 일이 없지만.

영체가 베이고, 영력이 깎여 나간다면 얘기는 다르다.

피로는 찾아올 것이고.

힘은 점점 더 고갈될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상황.

‘길어.’

거기다 오래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는 적이 아직까지도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쪽의 목을 치기 전까지 절대 사라질 일은 없다는 듯 흉흉하게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적.

불리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을 넘어서서 위험하다고 본능과 이성이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안 되겠군.”

본능과 이성 둘 다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다면, 그걸 따르는 것이 옳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혈기.

붉은 기운을 양팔에 휘감은 혈천의 주먹이 순식간에 남궁현강을 덮친다.

즉각 방어에 나서는 남궁현강.

검을 들어 주먹을 마주한 남궁현강은 닿는 순간, 깨달았다.

‘빠져야 한다!’

이건 검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무(武)가 아닌 술(術)!

이상을 감지한 남궁현강이 즉각 몸을 빼는 순간.

늦었다는 듯 붉은 혈기가 검을 타고 팔을 휘감았지만.

“독하군.”

어디선가 날아온 무형의 검이 붉은 혈기를 갈랐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는 조금 짧게 잘랐군.”

혈천의 오른팔의 팔꿈치 부분을 잘라 냈다.

기운의 통로가 된 팔이 잘리는 것과 동시에 남궁현강이 내공으로 그 기운을 밀어내는 사이.

“팔 하나 정도는 주지 않으면 못 도망칠 것 같더니.”

진짜였네.

장난스럽게 말하며, 거리를 벌린 혈천은 패기에 막혀 일렁이고만 있는 붉은 혈기를 바라봤다.

확실히 독하다.

팔을 재생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됐겠지.”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전투의 흐름을 완전히 뺏긴 뒤였다.

2번대는 절반도 채 살아남지 못했다.

나머지는 죽거나 기절해 포로로 잡혔다.

대주인 등려조차 적에게 막혀 쩔쩔매고 있으니 그 결말은 뻔하다고 봐야 했다.

“음. 끊어 내는 것도 좋겠어.”

그렇기에 혈천은 망설임 없이 정했다.

여기서 한 번 끊어 낸다.

다만.

“등려, 따라와.”

“……존명!”

한 명 정도는 부릴 사람이 있는 게 좋겠지.

거리를 벌리면서 단숨에 혈기를 뿌려 등려를 빼낸 혈천은 그대로 강을 향해 뛰었다.

“다음에 보자. 귀검(鬼劍), 창천검(蒼天劍).”

“다음엔 네 목이 땅에 떨어질 거다. 애송이.”

혈기를 몰아내며 날카롭게 대답하는 남궁현강의 모습에 혈천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신경 써야 할 게 있지 않겠어?”

목표로 한 적은 없지만, 자신을 만들어 낸 이와 이곳으로 이끈 이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으니까.

입꼬리를 올린 혈천이 강 속으로 사라지고.

등려마저 그 뒤를 따라 강으로 사라지자, 남궁현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등려의 뒤를 따라 강으로 뛰어드는 적들도 있었지만, 혈천이 직접 손을 써서 구해 준 등려와 사정이 달라서 대부분 뒤를 잡히고 있었다.

살아남아 빠져나갈 이는 거의 없겠지.

어떻게든 정리가 된 상황.

남궁현강은 즉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친우를 바라봤다.

“태중, 내가 묻고 싶은 게…….”

“미안하군.”

남궁현강의 말을 끊고, 작게 웃은 현태중의 몸이 흐려진다.

“아무래도 내 작은 주군이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야.”

뭐, 여태까지 버티고 있었던 게 용하지.

담담하게 말하며, 현태중은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작은 주군의 전언일세. 무림맹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게 전해 주게.”

설천위의 전언.

친구와 나누고픈 말이 많았으나,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남궁현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우의 배려에 작게 웃은 현태중은 점점 더 사라져 가는 몸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깽판 칠 테니, 알아서 잘 이용하라고 전해 주게.”

“……허?”

그게 무슨…….

“헛소리…….”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던 남궁현강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진 현태중의 빈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말을 삼켰다.

물어봤자 친구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이럴 땐 순순히 포기하는 게 맞다.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린 남궁현강은 개판이 된 부두를 바라보며 이내 걸음을 옮겼다.

“부상자와 사상자를 집계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즉시 치료를 시작하도록!”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며, 사람들 사이로 스며든 남궁현강은 이내 하나씩 자세한 지시를 내리며 부두를 정리해 나갔다.

부상자의 신음 소리와 강으로 흘러간 피비린내로 가득한 부두.

사파와의 전투는 일단 마무리됐다.

그리고.

“끄, 끝났나벼.”

“아우, 이리 살벌해서 어찌 세상을 살 수 있겠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만, 몸을 부르르 떨며 공포심을 털어 내는 이들 속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이들 또한 있었다.

정보를 나르는 이들.

무림맹에서 수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걸 지키러 온 사천맹의 전력이 무림맹 지부의 전력과 붙어서 패했다.

거기에 섞여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채의 전멸 소식을 전하는 이들까지.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단숨에 두 조직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금의 평화에 만족하던 이들조차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정도로.

* * *

[음, 이건 죽겠군.]

[죽겠네.]

[죽은 것 같은데?]

[아이! 헛소리 그만하고, 잘 좀 해 봐요!]

작은 나룻배 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설천위를 둘러싼 혼들의 장난에 청아가 노인네들의 등짝을 후려쳤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장난이에욧!!]

[에잉! 그렇다고 노인을 때리면 되겠느냐?]

[어차피 죽은 인간들인데, 그게 뭐가 대수예요!]

[어허, 그런 천인공노할 소리를!]

[농담 따먹기 그만하고, 언능요!]

[에잉!]

혀를 차는 신의의 등을 떠민 청아는 목숨에 지장은 없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조용해졌다.

그리고 설천위가 기절하면서 혼들의 실체화가 사라져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백유는 조용히 앉아 설천위를 바라봤다.

숨은 다행히 잘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얼마나 무리했는지 일이 끝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여전히 재미있네.”

그 볼을 손으로 쿡쿡 찌른 백유는 피식 웃으며 노를 잡았다.

정말 재미있게도, 상황이 설천위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 괴물을 잡지 못할 거란 것도.

무림맹이 생각보다 크게 승리할 거란 것도.

전부 천위의 예상대로였다.

그렇다면.

“그다음 예상도 맞는다는 소리겠지?”

힘차게 노를 저으며, 백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하들을 떠올렸다.

맨 처음에는 힘으로 굴복시켰고.

그다음에는 진심으로 자신을 따라온 녀석들.

자신의 뒤를 따라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을 선택한 놈들.

“재미있겠어.”

아무래도 그 녀석들이 선택한 길은 사로(死路)가 아니라.

“어디까지 갈지 한번 가 볼까?”

조금, 아니 아주 험한 활로(活路)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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