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352화-혈천 (7)
검은 실의 개입.
그 개입이 만들어 낸 찰나의 틈에 남궁현강은 즉각 반응했다.
방어로도, 공격으로도 이어 가질 못하는 혈천의 왼팔을 단숨에 잘라 낸다.
검에 담긴 힘에 튀어 오르는 팔.
순식간에 적의 팔을 잘라 내는 데 성공했지만, 남궁현강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 무림에서 고작 팔 하나 잘랐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적은 하수밖에 없으니까.
혈천의 팔을 잘라 낸 검을 몸쪽으로 당기며, 즉각 방어에 나선 남궁현강의 몸이 크게 밀려난다.
단숨에 검은 실의 속박을 풀어낸 적이 내지른 일격을 겨우 검신으로 받아 내긴 했으나, 차마 그 힘을 다 흘려 낼 순 없었다.
이쪽이 공격에 들어간 만큼, 적이 방어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완전히 공격에만 힘을 몰아넣은 결과.
덕분에 반격할 여유도 없이 밀려난 남궁현강은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다.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낼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자세를 고치고 적을 바라보는 남궁현강.
“……이건.”
“아무래도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닌 모양이야.”
낯설지만, 묘하게 낯익은 기운.
딱 한 번 보았지만, 너무 강렬해 쉽사리 잊을 수 없었던 그 아이의 기운이다.
약한 주제에 꽤나 패도적인 기세를 지녀 그때도 흥미롭게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먼 것 같은데,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그 기세가 강렬하다.
마치 지금 당장에라도 곁에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흉폭하고 패도적인 기세.
다만, 조금 우려되는 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때 이야기했을 때도 그렇고, 딸이나 아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몸을 사릴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부상이 꽤나 심각하거나, 다른 위협이 있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확률이 높았다.
후자라면 어떻게든 경고를 보냈을 테니,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큰 도움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충분하군.”
적의 팔을 잘라 냈다.
이것만으로도 도움은 충분…….
“과연, 확실히 균형이 안 잡히는군.”
잘리지 않은 팔을 휘적휘적 휘두르며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혈천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팔 하나가 없으면 균형이 잘 안 잡힌다.
전투에도 썩 좋지 않고.
“이 힘은 그 흑룡 녀석이군.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혈천의 왼쪽 어깨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팔은 어느새 한 줌의 붉은 액체로 변해 땅을 타고 흘러 그의 발밑에 도달한 상태.
인지를 넘어서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남궁현강조차 반응이 늦어졌고.
“염천이 목숨을 잃은 이유를 알겠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편 혈천이 다시 남궁현강을 바라봤다.
“고작해야 영력으로 만들어진 실 따위가.”
혈천의 몸을 휘감던 검은 실이 그의 혈기(血氣)에 삭고 끊어져 흩날린다.
“이 싸움에 개입할 여지 따위 없다.”
* * *
“천위, 실패한 것 같은데?”
“아오, 이래서 혈귀는…….”
장강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 위.
가운데 앉아 흑사를 부리던 설천위는 짜증과 함께 눈을 떴다.
“지금 당장 쓸 만한 녀석은 흑사 정도인데…….”
[소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됐어. 다루는 술사의 실력이 부족한 거지.”
고개를 숙이는 흑사를 향해 대충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그에게 영력을 한 아름 건네주고 그 등을 밀었다.
“가서 알아서 도와주고 있어 봐. 방법 좀 생각해 보려니까.”
[예.]
순식간에 사라지는 흑사.
그가 물 위에 서 있던 모습을 꽤나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백유는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래서, 우리 낭군님은 뭘 하려나?”
“낭군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에이, 우리 이미 한 이불 속에서…….”
“어허, 여기에 증인이 있는데.”
[암, 우리가 기를 쓰고 막았지!]
[왕!]
[맞아요!]
나름대로 근엄하게 말하는 암영의적의 말 뒤로 청랑과 청아가 자신했다.
[당신의 그, 으, 음탕한 속내는 우리가 전부 막았으니까요!]
“너, 나름 남정네를 속여서 정기를 빠는 괴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 그리 숙맥처럼…….”
[그러는 당신도 처녀인 주제에!]
“나야, 내가 마음을 줄 사람이 아직 거절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조용. 지금 집중하는 중이니까 조용히 해 봐.”
작게 실체화한 청아와 그런 그녀를 놀리는 백유의 입을 다물게 한 설천위는 생각에 집중했다.
‘흑사로는 무리라면 패융이 가장 괜찮나?’
암천룡이라면 충분한 위협이 되긴 할 텐데.
‘……아니, 역시 부족해.’
멀리서 조종했다고는 하나, 흑사의 실에 빠르게 적응해 그 속박에서 벗어난 적이다.
암천룡의 가장 큰 무기인 위협적인 기세와 크기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암천룡의 무기는 큰 덩치인데, 염천을 흡수한 적에겐 그 덩치가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상당히 침착해. 완전히 개화가 끝난 거야.’
혈귀의 거의 최종 단계.
단순한 혈교의 꼭두각시를 넘어선 존재.
그 본능과 파괴적인 힘, 특유의 재생력으로 잘하면 화경급 고수까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혈귀다.
물론 그 정도로 잘 만들어진 개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지금 저기서 싸우고 있는 건 그것조차 뛰어넘는 희귀한 케이스.
성장을 거듭한 끝에 혈귀가 강렬한 자아를 지닌 혼을 흡수해 그걸 바탕으로 자신만의 자아를 정립한 경우다.
‘염천의 혼부터 뽑았어야 했는데…….’
숨이 끊어지면 자연스럽게 회수할 수 있다 보니 천천히 했던 게 화근이었다.
짜증 섞인 후회와 함께 설천위는 눈을 떴다.
“역시 내가 직접…….”
“그건 안 돼.”
[그건 안 돼요!]
“왜 이럴 땐 또 죽이 이리 잘 맞느냐고!”
[당연하죠! 그 상태로 싸우러 가겠다는데, 어떻게 안 말려요!]
“천위, 죽기 직전까지 갔던 건 기억하고 있나?”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내공이란 내공은 거의 다 소진하고.
관절과 근육이 뒤틀려 비명을 지르던 상태.
그런 상태에서 지금 이렇게 거동이 가능한 수준까지 고작 닷새 만에 회복되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전투?
전투우우?
“더 싸우겠다고 나대면 재워서 덮쳐 버릴 거야.”
[그래요! 더 싸우겠다면 재워서…….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작은 몸으로 백유에게 달라붙어 그 뺨을 잡아당기는 청아.
그런 청아를 귀찮다는 듯 떼어 낸 백유는 진지한 눈빛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천위, 네가 이상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몸으로 전투는 무리야.”
“……알았다고.”
누가 별명이 누님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너무 믿음직스럽네.
물러설 생각이 없는 백유의 태도에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더럽게 안 차네, 이놈의 내공.’
모든 스탯이 꾸준히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정말 지지리도 느리게 성장하고 있는 스탯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내공이었다.
무공에 재능이 없다고 어떻게든 주장하고 싶은지 일 년이 넘게 중중(中中)에서 오를 생각을 안 하고 있다.
[회복]은 내공을 소모하는 스킬.
내공이 차오르는 속도가 더디니, 몸의 회복도 당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혈귀와의 전투에서 몸에 빙의한 천마가 검에 내공을 담는 것조차 못 할 정도로 내상이 심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의 회복이다.
아마 대부분의 무인은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지.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 해.”
하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다.
지금은 팽팽하게 싸우고 있지만, 남궁현강이 혈귀에게 밀리는 순간 전황은 단숨에 기울어질 게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지 않으면…….
‘밀린다.’
아니, 죽는다.
불살(不殺)을 외치던 이들이.
자신을 믿고 정의를 행할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이들이.
나는.
“신파가 싫어.”
왜 슬퍼야 하지?
왜 그런 상황을 겪어야 하지?
능력이 있다면, 가진 모든 것을 토해내서라도 지키는 게 당연하잖아?
사람이니만큼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순 없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순 있잖아?
아끼지 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
내 주변 사람 정도는 지키는 힘.
내 주변 사람 정도는 행복할 수 있는 평화.
그것이.
‘설천위가.’
바라던 것이잖아.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며, 설천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고 실패했지만.
지금 해내야만 한다면.
“귀검(鬼劍).”
지금 해내라.
설천위의 낮은 부름에, 현태중이 조용히 그 곁에 나타났다.
죽어서 육신을 잃은 영체.
애초에 괴이로 태어나 살아온 청랑이나 청아는 그 육체의 실체화가 매우 쉬웠다.
흑사의 경우, 사실 흑사가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설천위의 영력으로 뽑아낸 실을 그가 다루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흑사가 전투에서 오로지 실만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사실 아직 성공한 적이 없었다.
영체의 완전한 실체화.
단순히 혼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생전의 역량을 고스란히 갖춘 실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죽은 이의 부활.
사라진 과거의 재현.
그 옛날, 무림을 홀로 몰아붙였다던 혈패황의 특기.
일보(一步)에 태산이 흔들리고.
이보(二步)에 핏물이 강이 되고.
삼보(三步)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그 괴물의 특기가 죽은 이의 재현이었다.
적이 적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많은 시간의 겹침이 만들어 내는 무한의 무(武).
그것을.
“후.”
실현해 낸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지만.
그게 지금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되진 않는다.
지금의 상황을 바꾸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설천위의 뜻을 읽은 현태중이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강 위로 올라선 그가 천천히 걷는다.
죽어서 이승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의 발은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나.
[……말도 안 돼.]
저 멀리서 시작된 파문이 나룻배에 닿았다.
* * *
격렬하게 이어지는 전투.
흑사의 도움조차 이미 적응한 상대에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치열하게 이어지는 전투는 남궁현강의 힘을 확실하게 갉아먹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단기전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것이 실패한 상황.
이대로 전투가 이어지면…….
‘안 좋군.’
확실하게 이쪽이 불리해진다.
적은 마치 전투를 배워 나가고 있는 것처럼 점점 더 능숙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있었고.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적에 비해 이쪽은 서서히 반응이 느려지고 있었다.
아주 잠깐.
정말 찰나의 시간이 느려지는 거지만.
그 찰나의 틈이 만들어 낸 결과가 어떤가.
이미 몸 곳곳에 당한 부상에서 흐르는 피가 그 결과였다.
미세한 반응의 지연.
그 틈을 파고드는 적의 손끝이 남궁현강의 피부를 가르고, 살점을 뜯어냈다.
아직까지 치명상은 없지만, 명백하게 이쪽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건 사실.
‘……무리를 해서라도 찍어 눌러야 하나?’
고민된다.
아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잘린 적의 팔이 아무렇지 않게 재생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무인(武人)에겐 손쓸 방도가 없는, 괴이의 특징.
무리해서 적을 베었는데, 적이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는 순간 끝이다.
고민이 깊어지고,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하는 그때.
[소적검(消跡劍)]
무형의 검이, 적을 갈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튼 상태의 어깨를 깊게 베고 지나가는 일격.
솟구치는 피가 거짓말처럼 역행하고.
순식간에 아물어 가는 상처와 함께 고개를 돌린 혈천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태, 태중?”
경악한 남궁현강의 외침에 검을 늘어트린 귀검(鬼劍)이 대답했다.
“적의 앞이다. 집중해라. 현강.”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검은 검기가 갑작스레 혈천의 어깨에서 솟구치며 상처를 벌린다.
“과연.”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더 강렬하게 발휘되는 결과에 현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작은 주군의 힘인가.”
현태중의 검엔 그가 생전에 다루지 못했던 검은 패기가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