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351화-혈천 (6)
검과 주먹이 맞부딪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딪치진 않았다.
검과 주먹을 감싼 강기(罡氣)가 서로를 격렬하게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인의 증거. 압도적인 폭력의 상징.
검기를 두른 검조차 잘라 버릴 수 있고.
전신에 내공을 두른 무인조차 가를 수 있는 힘.
닿지 못한 자들에겐 공포의 상징이며,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허나,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제천대성조차 천신(天神)은 넘을 수 없었거늘.
인간에게 절대적 힘이란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 세상의 구 할 구 푼의 무인이 동경하는 화경의 고수도 그 옆이 있고, 그 위가 있는 법.
‘강하군.’
남궁현강은 상대를 빠르게 인정했다.
강기(罡氣)에도 격이 있다.
이제 막 화경에 오른 이의 강기와 수십 년 동안 자신의 강기를 다듬은 이의 강기가 똑같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남궁현강은 후자에 속한 인물이다.
강기(罡氣)라는, 극도로 연비가 안 좋은 힘을 수십 년 동안 연마한 고수.
딸에게 검기(劍技)는 점점 따라잡히고 있을지언정, 검기(劍氣)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리 장담하는 이가 바로 남궁현강이다.
그렇기에 남궁현강은 솔직하게 적을 인정했다.
자신의 강기(罡氣)에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주먹을 지키는 적의 강기(罡氣)였으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겠군.’
민간인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신과 상대의 충돌은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웬만하면 인적이 없는 평원이나 숲에서 싸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상대가 아니군.’
몸에서 짙게 흘러나오는 혈향.
거기다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확실했다.
인간이 아니다.
염천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혈천이라고 지칭했으니…….
아마도 염천을 먹어 치운 무언가일 확률이 높겠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면, 장기전은 좋지 않다.
전투가 장기전으로 이어지면 이쪽이 먼저 지칠 확률이 높으니까.
빠르게 끝내야 한다.
‘……눈치가 빠르군.’
민간인의 대피와 함께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불살대라고 했던가.
이끌고 있는 건 중이 아니니, 부대주인 정규철이란 인물인가.
최대한 이쪽이 자유롭게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려는 게 보인다.
적은 인간이 아닌 만큼, 아군의 피해에 무감각할 가능성도 높으니까.
다만.
‘생각보다 깔끔하군.’
그게 이상하다.
보통 이렇게 짙은 피 냄새를 풍기는 놈은 이성을 잃고 마구 날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상대는 지금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꽤나 차분하게 싸우고 있다.
주변을 신경 써야 하는 적이 있다면, 주변까지 부숴 버릴 정도의 공격을 하는 게 정상이다.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가 힘을 쓰는 것만으로 상대의 힘을 소모시킬 수 있고, 잘되면 빈틈까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사파 혹은 마도를 걷는 놈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인데…….
생각을 이어 가던 남궁현강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적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보다 이 상황을 빠르게 끝내는 게 더 중요하다.
자신이 데려온 창궁대주가 적을 끌어당기며 벌린 거리만큼, 불살대도 상당한 거리를 벌렸다.
애초에 적들은 오직 공격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자신들의 머리와 거리가 벌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있기에 가능했던 상황.
“염천은 그리 부하를 아끼는 인물은 아니었다만.”
“그렇군.”
“너는 어째서 아끼는 거지?”
자세를 고치며 묻는 남궁현강의 물음에 혈천의 미간을 찡그렸다.
“아껴? 무엇을?”
“주위를 신경 쓰며 전투를 이어 가고 있지 않나.”
격렬하게 충돌해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사실 이 정도면 상당히 절제한 편이다.
남궁현강 본인만 해도, 마음먹고 부수기 시작하면 웬만한 장원쯤이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자신이 있으니까.
남궁현강의 물음에 혈천은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아, 그렇군.”
깨달았다.
남궁현강이 한 말의 의미를.
그리고 자신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내 욕망은 아직 본능보다 못하군.”
염천이라면,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전투를 하려면 주위를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부하들의 목숨 따위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끊어 내야 함을.
그렇다고 해도 부하들이 원망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는 거다.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오히려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 것이다.
자신의 부하 즉 자신의 주변 사람을 지키는, 무리를 이루는 동물로서의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순간.
혈천은 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인간을 뿌리로 삼고 있군.”
그 본능을 자극한 것이 자신의 뿌리임을.
고통 속에서 죽어 간 혼들의 결집체의 영향이 그 본능을 더 키웠음을.
“그건 썩 좋은 소식은 아니군.”
인간을 뿌리로 삼고 있다는 혈천의 말에 남궁현강은 씁쓸한 얼굴로 검을 세웠다.
가슴부터 머리까지.
하늘을 향하게 검을 쥔 자세는 검술의 시작이 되는 기수식(起手式)이라기보다는 예식을 위한 자세 같았다.
그 허술하기 그지없는 자세를 마주한 순간.
혈천은 반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혈천의 안에 깃들어 있는 염천이 반응했다.
절대 당해서는 안 된다는 듯, 단숨에 땅을 박찬다.
검(劍)이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휘두르기 좋은 무기.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파고드는 혈천의 몸은 단숨에 남궁현강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이대로 손을 뻗는다면, 눈을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검사(劍士)와 권사(拳士)의 싸움에서 이 정도면 검사 쪽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해도 될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커헉!”
처음 해 보는 마른기침과 함께 혈천의 몸이 밀려난다.
십수 걸음을 그대로 밀려나는 몸.
그러고도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몸을 비틀어 발을 땅에 박고 나서야 겨우 멈추는 데 성공했다.
“허.”
하지만, 남궁현강은 그 모습에 오히려 놀랍다는 듯 탄식했다.
“그렇게나 반응이 늦었는데, 용케 살았군.”
검을 세운 순간, 혈천이 반응했지만…….
사실 그것조차 늦었다.
그나마 염천의 기억과 힘이 있었기에 늦게라도 반응했던 것일 뿐.
“……이해할 수 없군.”
“과연, 보는 눈은 염천보다 못한가.”
그 힘과 기억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 모든 경험과 지식까지 체화한 건 아니니까.
아직까지 정확하게 이쪽의 수를 파악하지 못하는 혈천을 보며 남궁현강은 고민했다.
한 번 더 같은 수를 써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이번에도 막힐 경우에는 완전히 읽힐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도 대비하고 있을 테니…….
‘흠.’
한 번 쓴 기술을 두 번 쓰진 않을 거란 적의 방심에 기대는 건 역시 좋지 않겠어.
세웠던 검을 옆으로 눕히며, 남궁현강은 담담하게 혈천을 바라봤다.
“와천(臥天).”
순간, 하늘이 떨어진다.
혈천은 그리 느꼈다.
그렇기에 역으로 몸에 힘을 더해 자세를 꼿꼿이 하려 했지만.
“하늘이 눕는데, 네가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옆으로 서 있는 남궁현강의 물음에 혈천은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쓰러지고 있음을.
쾅!!
반사적으로 땅을 후려친 손이 그대로 몸을 띄운다.
전신에서 강렬하게 뿜어지는 혈기(血氣)가 적의 힘을 날리고 자신을 되찾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겨우 몸의 주도권을 되찾고 똑바로 선 혈천의 질문에 남궁현강은 허허 웃었다.
“남궁세가에서는 어릴 때부터 중검(重劍)을 가르치지.”
“헛소리를…….”
“중검을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하늘을 담기에 가장 좋은 검이기 때문이야.”
자신의 말을 끊는 남궁현강의 모습에도 혈천은 반발하지 못했다.
어느새 조금씩 남궁현강이 눕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멀쩡한 남궁현강이 누울 리 없으니……!
“흡!”
양팔을 활짝 펼치며 다시 한번 혈기를 내뿜은 혈천은 일그러진 미간으로 남궁현강을 노려봤다.
“하늘을 품었다면, 굳이 검(劍)일 필요는 없지.”
그 살벌한 살의(殺意)에 남궁현강은 여유롭게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검을 쓰지 않는 건 아닐세.”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혈천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친다.
대체 언제?
단순히 빠른 공격이라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혈천은 공격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즉시 움직였다.
읽을 수 없다면, 적도 자신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게 둬선 안 된다.
단숨에 땅을 박찬 혈천이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는 육신의 내구도로 방향을 꺾는다.
좌우, 대각선을 넘어 아예 직각으로까지 꺾이는, 실로 말도 안 되는 움직임.
인간이라면 무릎과 발목의 인대와 뼈는 물론 근육까지 처참하게 망가졌을 그 괴이한 움직임을 보고 남궁현강은 작게 혀를 찼다.
‘빠르군.’
확실히 빠르다.
아직 미완성인, 조금 전의 기술로는 맞추기 힘들다.
애초에 완성했다면 이렇게 몇 번이나 공격을 중첩시키는 귀찮은 짓도 하지 않았겠지만.
암천(暗天)으로 적이 읽을 수 없는 암경을 써서 적을 밀어내고.
와천(臥天)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그 감각을 뒤흔들고.
허천(虛天)으로 베어 내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쌩쌩한가.’
이쪽은 내공은 물론이고, 심력의 소모까지 장난이 아닌데.
허천(虛天)은 창궁무애검에서도 극후반에 위치한 검식.
공간참(空間斬)이라는 심검(心劍)으로 가는 전 단계에 속한 기술을 구현한 검식이다.
남궁현강도 익히긴 했으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심기체(心氣體)가 극에 이르러야 겨우 재현 가능한 초식.
빠르게 끝내기 위해 꺼내 들었지만.
예상보다 적의 방어가 너무 훌륭하다.
거기다.
‘……빠르군.’
얼핏얼핏 보이는 몸은 이미 회복이 끝났다.
꽤나 깊게 베어 냈는데도.
너무 방향을 격렬하게 꺾어 그 잔상이 환영처럼 남는 혈천을 바라보던 남궁현강은 결국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시키는군.”
강렬하게 빛나는 안광과 함께 남궁현강의 검이 혈천의 주먹과 부딪친다.
강한 기술로 빠르게 끝내는 것이 힘들다면.
“검기(劍技)로 눌러 주마.”
전신에서 무거운 기세를 흘리는 남궁현강의 주위로 바람이 가라앉는다.
중(重).
하늘을 담기 이전에, 남궁의 모든 검수(劍手)가 배우는 것.
쿵!
땅을 내딛는 걸음이 묵직하게 땅에 박히자, 혈천은 허리를 펴고 목을 세웠다.
똑바로 고개를 든 혈천과 남궁현강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본다.
“좋지!”
염천일까, 혈천일까.
적의 의도를 깨부수며 달려오는 사이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혈천의 주먹이 다시 한번 남궁현강의 검과 부딪친다.
무겁다고 해서 느린 것은 아니다.
미친 듯이 파고드는 혈천의 양손을 남궁현강은 오로지 검만으로 쳐 냈다.
최단의 거리로.
최속의 속도로.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게를 실어서!
쾅!! 쾅!!
부딪칠 때마다 사방을 뒤흔드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억누르는 건 끝났나……!’
그 여파가 너무나도 강렬해 이번에야말로 주변을 확실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군과는 꽤나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그들의 안전이 걱정될 정도로.
거기다.
‘……강하군.’
창궁대를 전부 데려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주까지 데려온 상황이다.
그런데도 적들의 기세가 너무 강맹해 아직까지도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마치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이룰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무식하게 달려드는 이들.
특히, 2번대 대주라는 등려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창궁대주까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같은 초절정이라도, 상대가 죽을 각오로 덤벼드니 섣불리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가 없는 거다.
까딱하다간 적이 죽을 각오로 찌른 검에 자신도 죽을 테니까.
팽팽하기 그지없는 전황.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남궁현강은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괴물은 인간이 아니니 지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자신이 밀리는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남궁현강이 굳게 입을 다무는 순간.
끼릭.
무언가가 조여지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잠깐.
그야말로, 찰나(刹那)라는 말이 어울리는 잠깐의 빈틈이 생겼고.
서걱!
남궁현강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잘려 떨어지는 혈천의 팔.
그리고.
그 몸을 속박하는 검은 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힘.
“허어.”
아무래도 흑룡이 강에서 뭍으로 올라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