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350화-혈천 (5)
단숨에 무너진 간이 벽에 정규철은 즉각 반응했다.
“쏴라!”
적은 강 위로 걸어오는 괴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배에 스물이 넘는 이들이 몸을 싣고 있었다.
저들이 전부 이 부두에 상륙하는 순간, 일방적인 학살이 펼쳐질 터.
최대한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놈의 힘을 빼야 한다.’
이 화살이 저들에게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저 괴물이 조금이라도 힘을 쓴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화살이야 얼마든지 날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정규철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강 위를 걷는 혈천은 화살을 향해 어떤 수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조차도 손을 들어 막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을 감싼 무형의 힘에 막혀 힘없이 튕겨 나올 뿐.
그의 뒤에 있는 무인들이 열심히 검을 움직여 화살을 쳐 내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
“……후.”
호신강기(護身罡氣).
화경급 고수 중에서도 완숙한 강자들이나 구사하는 그 기예를 목도한 정규철은 한숨과 함께 도를 뽑았다.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줘 떨림을 멈추고.
가슴에 크게 호흡을 불어넣는다.
“전원!! 이 악물고 버텨라!!”
구체적인 지시?
없다.
있을 수가 있나.
전력 차이는 가히 절망적.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7척의 배로 100척의 배를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백 마리의 개미로 한 마리의 코끼리를 이길 순 없다.
지금 이 양측의 전력 차이는 그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렇기에.
“으, 으아아아!”
“빌어먹을!”
정규철은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지 않았다.
보통의 전장이라면 명령 불복종으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고름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의 도주를 인정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런 개죽음은 싫소!!”
가장 앞서서 이 자리를 지켜야 할 놈도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허겁지겁 도망치는 지부장의 뒷모습을 짧게 일견한 정규철은 도를 쥐고 자세를 갖췄다.
도망치는 놈들은 머릿속에서 지운다.
애초에 남아 있어도 방해만 됐을 놈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자.
“부대주님.”
그렇기에 자세를 갖춘 정규철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너는 도망쳐도 되는데.”
“헛소리를 하는군요.”
겨우 병상에서 일어난 주제에 당당하기 그지없군.
호쾌해.
‘연인이 있다고 했던가.’
웬만한 남자보다 큼직한 뼈대에 탄탄하게 붙은 근육.
솔직히 연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취향 참 독특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내면이 중요한 거지!”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요.”
“하하하! 음, 그건 맞는 말이군.”
씩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한 정규철은 적을 향해 도(刀)를 겨누며 호탕하게 외쳤다.
“여기에 아직 앞날이 창창한 새댁이 있는데, 먼저 앞으로 보낼 모지리는 없겠지!!”
“예에?! 새댁이었어요?!”
“결혼했던 겁니까?!”
“정말로?!”
“안 돼!!”
중간에 절망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긴 했지만, 불살대 모두가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무기를 뽑았다.
어느새 부두로 거의 접근한 적의 배와 그 뒤에 서서 걸어오는 괴물.
죽음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불살(不殺)! 불멸(不滅)!! 흑룡의 송곳니!!”
악을 쓰는 불살대의 기세가 부두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오냐! 잘 알고 있구나!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악(惡)을 물어 찢어발기는 것!!”
“우리의 신념은 무엇이냐!”
“정도(正道)! 불살(不殺)!”
“그럼 싸워라! 죽을 각오로 적을 저지해라! 죽을 각오로 모두를 살려라! 우리가 지켜야 할 이들이 우리의 뒤에 있다!!”
“우아아아아아아!!”
거친 포효와 함께 대기하던 불살대가 부둣가로 튀어 나간다.
배에서 뛰어오르는 적들과 순식간에 충돌하는 불살대.
벽을 만들고 방어에 집중하려던 계획이 틀어졌으니 남은 것은 정면 승부뿐.
그것을 위해 최대로 사기를 끌어올린 정규철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를 부탁한다.”
“……예.”
자신의 상태로 앞으로 나가 봤자 방해만 될 것을 알기에 여웅은 정규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나간 이들이 쓰러지면.
‘……천강.’
그다음은 자신의 차례겠지.
무인답게 최후를 맞이하자.
그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못 보는 것은 아쉽지만.
무림맹에 같이 들어왔을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 아닌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을 수 있음을.
그 죽음에 무너지지 않기를.
약속했으니까.
“네놈이 머리냐!!”
무모하게 배에서 상륙한 이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가는 정규철의 뒷모습을 여웅은 똑똑히 눈에 담았다.
그가 쓰러지고 나면, 자신이 저 앞을 막아야 했으니까.
내상을 입고, 복부가 꿰뚫린 치명적인 외상까지 입은 상태로 헤엄쳐 부두에 도착한 무해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모든 상황을 전하고 나서야 의식을 잃었으니, 그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도 안 될 정도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이곳에 초절정 이상의 무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정한 현실.
저기 뒤에 있는 괴물이 감정 없는 눈으로 지켜만 보고 있는 지금조차도 상황은 이쪽이 크게 불리했다.
그러니.
‘팔 하나라도 가져간다.’
여웅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정규철이 목숨을 걸고 끌어내는 적의 정보를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이 망가진 몸으로 어떻게든 적을 꿰뚫을 치명적인 비수가 되기 위해.
“끄악!”
“빌어먹을!”
하지만 그런 여웅의 집중과 별개로, 전황은 크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살대는 애초에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부대.
물론 상대도 그리 머릿수가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경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적은 십수 년째 현역으로 활동해 온 전장의 숙련자들.
이쪽은 이제 막 실전을 겪으며 다듬어지고 있는 햇병아리들.
서로의 실력이 비슷비슷해도 실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불살대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설천위와 무해의 신념대로 방어에 집중한 불살대는 막아 내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적을 죽이지 못해 불살(不殺)이라는 이름을 지키고 있는 이들.
그들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던 그 순간.
둥! 둥! 둥!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장강 위로 파문이 생긴다.
내공을 실어서 치는 강렬한 북소리.
그리고.
‘……반응했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괴물의 모습에 여웅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강의 하부.
물의 흐름을 거스르며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배 한 척.
“나, 남궁세가다!!”
누군가의 외침에, 상황 파악을 위해 물러난 적과 대치하던 정규철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가, 맹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각오를 굳히고 자신에게 말하던 부하.
그 부하를 향해 정규철은 흔쾌히 대답했다.
‘안 돼.’
‘……예?’
아니, 여기서는 허락해 줘야 하는 분위기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는 부하 백영의 얼굴에 정규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맹은 너무 멀어. 남궁세가로 가라.’
거기도 멀긴 멀지만, 맹에 비하면 훨씬 가깝다.
무엇보다.
‘남궁 가주.’
그가 있다.
전대 창천단주이면서 이미 한참 전에 화경에 오른 고수.
그라면, 혹시 모를 싸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 판단한 정규철은 백영을 무림맹이 아닌 남궁세가로 보냈다.
그쪽도 사파와 대립하고 있는 전선이 있으니 솔직히 남궁세가가 쉽게 움직일 거란 기대는 안 했는데…….
‘……바로 움직였나.’
백영이 달려가고 도착해서 이곳에 오기까지.
고작 닷새 만에 일 처리가 됐다는 것은 백영의 정보를 들은 남궁세가가 그 즉시 움직여 배를 타고 강을 거슬렀단 소리다.
“과연 창천(蒼天)이군.”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정의(正義).
과연 남궁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남궁세가의 지원이 아니다.
가주가 저기에 동행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아니라면, 저 괴물의 손에 죽는 희생자만 더 늘어나는 꼴이 될 테니까.
마른침을 삼킨 정규철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작게 웃고 있는 적의 모습.
분명 백절생사단의 2번대 대주 등려였던가.
남궁세가의 지원은 분명 자신들에게 손해일 텐데, 어째서?
문득 떠오른 의문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정규철은 쓸데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보다 적을 막는 것 그 자체다.
놈들이 이 뒤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해야 하는 최선.
그 뒤는, 말 그대로 그 뒤에 생각하면 된다.
각오를 다진 정규철이 도(刀)를 움켜쥐는 순간.
“허어.”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공간이 짓눌렸다.
여태까지 강하게 정규철을 밀어붙이던 등려가 일순 휘청거릴 정도의 힘.
[제왕검형(帝王劍形)]
이 무림에 너무나도 유명한, 남궁세가의 절기.
악귀처럼 전투를 이어 가던 적들의 무릎이 땅에 닿는다.
그나마 다시 균형을 잡고 선 등려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정규철을 노려봤고.
그 시선에 정규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들려온 탄식의 주인.
“설천위, 그 녀석이 지독하게도 부려먹었구나.”
도저히 전장에 설 상태가 아닌 이들조차 전장에 나서 싸우는 모습을 확인한 남궁현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다른 사람들이 전부 자기 같은 줄 아나 보군.”
재생력이 기이할 정도로 좋았지.
옛날에 한 번 봤던 아들의 친구를 떠올리며, 남궁현강은 몸을 돌렸다.
“그래서, 또 이렇게 연이 이어지는구나. 이번에는 3번 대주가 아닌 2번 대주지만.”
여유로운 목소리로, 어느새 정규철의 옆에 선 남궁현강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 3번대 대주 놈은 어딨지?”
“……죽었소.”
“과연, 그리 길게 살 것 같은 관상은 아니긴 했지.”
고개를 끄덕인 남궁현강은 자신의 앞에 꼿꼿이 서 있는 등려를 바라봤다.
그리고.
쾅!!
“호오?”
정규철은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했고, 등려조차 자신이 당했다는 것만을 겨우 인지한 일격이 튕겨 나왔다.
“이거, 단순히 괴물인 줄 알았더니…….”
자신의 공격을 쳐 낸 적을 바라보며 남궁현강은 섬뜩하게 웃었다.
“부하를 지킬 줄도 아는 놈이었나?”
“남궁현강.”
“오랜만…… 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군. 염천, 맞나?”
염천이 맞냐.
그 물음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분명 염천의 무공을 사용했는데, 염천과 다른 느낌을 풍기니 의문이 들 수밖에.
그리고 그런 남궁현강의 물음에 혈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혈천(血天)이다.”
“꽤나 오만한 이름이 됐구먼.”
혈천(血天)인가.
피로 물든 하늘인가.
아니면, 혈해 위에 선 하늘인가.
여러 의미를 품을 수 있는 이름에 남궁현강은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혈교 놈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는 있었지만, 이리도 빠르게 성공을 거뒀을 줄이야.”
뽑아 든 검을 푸른 검강이 휘감고.
“움직이길 잘했군.”
막대한 중량을 품은 일격이 혈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강렬한 충격이 땅을 뒤집고, 그 여파에 강물이 솟구친다.
압도적인 힘.
이게 진정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파괴력인가 싶은 그 공격에 밀려나 겨우 중심을 잡은 정규철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게 창천검!’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과 함께 밀려난 정규철은 어느새 자신이 상대하던 적에게 중년의 사내가 붙은 것을 확인했다.
아마 남궁세가의 직속 무력대의 대주일 터.
단숨에 적들 중에서도 강한 이들의 손발이 묶인 것을 확인한 정규철은 망설이지 않고 물러섰다.
“부대주님.”
“민간인 대피를 서두르게.”
“알겠습니다.”
괴물 둘이 맞붙은 이상, 전투의 여파가 이곳에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주변에 있는 이들을 최대한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정규철의 지시에 동의한 여웅이 민간인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쾅! 쾅! 쾅!
강렬한 폭음을 동반하는 두 초인의 전투에 부두는 순식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