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348화-혈천 (3)
내장이 비틀리고, 혈도가 꼬이는 기분.
뭐, 사실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얼마 못 버틴다.’
실제로도 그러고 있었으니까.
억지로 끌어올린 [소령연화]는 그 한계가 뚜렷했다.
패기와 살의를 섞어 검은 불꽃의 형태로 억지로 피워 올리긴 했으나 그 뿌리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끌어올린 강기(罡氣).
능숙한 화경의 고수라면 탁월한 내공 제어로 어떻게든 내상을 억누르며 무공을 펼칠 수 있겠지만…….
“캬하하!”
“아오!”
안타깝게도 설천위에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미친 듯이 웃으며 달려드는 혈귀의 손을 도(刀)로 막을 때마다 내부가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강기를 품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힘을 쥐어짜니, 계속해서 상태가 안 좋아졌다.
[천위, 차라리 여기선 나에게 맡기거라.]
[우리라면 충분히…….]
“안 돼요.”
혼들의 제안을 설천위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래, 가능이야 하겠지.
능숙한 화경의 고수인 그들은 이 이상 내상을 악화시키지 않으며 강기를 일으킬 수 있을 거다.
무공 실력도 뛰어나니, 혈귀와의 전투도 더 쉽게 풀어 갈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알잖아요.”
[…….]
설천위의 한마디에 현태중과 소백진은 입을 다물었다.
말 그대로였으니까.
설천위의 몸은 지금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혈귀와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끌어올린 [패룡기(覇龍氣)]에 육체의 겉과 속이 조금씩 치료되고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전투가 가능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빙의를 시행한다면?
영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패룡기(覇龍氣)]의 성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설천위가 멀쩡했을 땐 빙의를 자주 푸는 것으로 그 약점을 보완했지만, 그건 몸이 멀쩡했을 때의 이야기.
이렇게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현태중이나 소백진이 만들어 낸 강기를 설천위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심대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끝.
눈앞의 혈귀를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금, 그런 위험을 짊어질 순 없었다.
“어떻게든 합니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다른 길을 찾았다.
다행이라면 상대는 혈귀.
인간이 아니다.
술법이 크게 도움이 될 거다.
거기다 염천의 부하들을 미리 죽여 놓은 덕에 다른 방해물도 없을…….
‘……무해!’
순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설천위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혼들이 설천위의 집중을 흩트릴까 봐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던 광경이 설천위의 눈에 들어온다.
붉은 피로 물든 가사를 휘날리며 적과 싸우고 있는 무해.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땅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제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기습에 당했는지, 움직임이 이상한 무해는 명백하게 밀리고 있었다.
더불어 상대는 무해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내기 위해 그야말로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
무해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해의 상황을 인지한 설천위는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적의 손을 도(刀)로 막아 내며 이를 악물었다.
‘……살릴 수 있는 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혈귀를 상대하면서 저쪽에 손을 보탤 방법이 있나?
아니, 잠깐이라도 적의 발을 묶어 무해가 도주할 시간을 벌어 줄 순 없나?
극한까지 가속한 사고가 열심히 방법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지금 당장 눈앞의 혈귀를 상대하는 것도 벅찬데 고민한다고 해서 무해를 살릴 방법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출혈량으로 보건대 무해의 상처는 상당히 깊은 수준.
전투가 길게 이어지면 결국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짧게, 눈앞의 혈귀를 제압 혹은 저지하고 무해를 도와 그가 이 섬을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소린데.
‘……빌어먹을.’
너무 현실성이 없었다.
패융을 쓰면 가능할까?
한계까지 몰린 이 육체로 [암천룡(暗天龍)]을 불러내, 무해를 돕고 탈출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눈앞의 혈귀를 상대하면서?
“크하하하!”
점점 변하기 시작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혈귀의 공격 방식도 바뀌고 있었다.
좀 더 깔끔해지고.
좀 더 날카로워진다.
혈귀가 흡수한 염천의 혼이 점점 깨어나거나 혹은 완전히 혈귀와 합쳐지고 있다는 증거.
이대로 가면, 확실히 상대하기 힘든 존재가 나타난다.
거기다 조금 전부터 끊임없이 달라붙는 끈적한 힘.
혈귀가 품은 주력(呪力)이 자아에 힘입어 술법의 형태로 틀을 잡아 가기 시작한 거다.
보통의 혈귀는 무의식중에 신체를 강화하는 데 쓰는 것으로 그치는 힘을.
“캬핫!”
눈앞의 혈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설천위의 영력과 패기를 밀어 내고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가는 정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게임 속에서 봤던, 혈교의 주력이 되는 혈귀로 태어나 마침내 혈귀를 벗어난 괴물들을 떠올린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천위.]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설천위는 시선을 돌렸다.
혈귀를 앞에 두고, 너무나도 안일한 행동.
하지만.
[각오는 되어 있느냐.]
단 한마디에 설천위는 눈을 감았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의도가 담긴 물음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융!!”
그리고 즉시 움직인다.
[크롸라라라라라!!]
거대한 용이 솟구쳐 하늘을 휘젓고, 땅을 향해 질주한다.
그런 용의 등장에도 관심 없다는 몸을 밀어붙인 혈귀의 손이 설천위의 어깨에 닿는다.
일순의 틈이 만들어 낸 공격.
단숨에 뼈가 보일 정도로 어깨 근육이 뜯겨 나간 설천위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오히려 술법에 집중했다.
“단주님!!”
거침없이 돌진해 무해를 입에 문 패융이 솟구친다.
허무하게 상대를 뺏긴 적의 눈이 허공을 향했으나, 설천위는 그저 집중했다.
설천위의 영력과 의지를 전해 받은 패융이 미친 듯한 속도로 돌진해 거리를 벌리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거리까지 멀어진 패융의 몸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정정당당하지 못한 새끼…….”
그 짧은 사이에 세 곳이나 살점이 뜯겨 나간 설천위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패룡기(覇龍氣)]를 끌어올렸다.
어깨를 시작으로 복부와 허벅지가 뜯겼다.
어깨나 허벅지는 몰라도 복부까지 뜯긴 건 역시 타격이 컸다.
[패룡기(覇龍氣)]로 회복을 가속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으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부상.
“부하 생각이 갸륵하군. 흑룡단주.”
그렇기에 설천위는 직접 다가와 말을 걸어 주는 상대에게 친절히 대답했다.
“내가 좀 착해서.”
회복할 시간을 주는데, 까칠할 필요가 없지.
“너희들이 뭘 하는지 정도는 알려야지.”
“쓸데없는 짓이다. 저 중놈이 돌아간다고 한들, 지원이 오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터.”
“뭐, 그건 맞는 말이지.”
“너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놈들은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다.”
담담하게 설천위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사내는 십 보(十步) 이상 설천위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거리를 주는 순간, 목숨이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
그 철저함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눈앞의 혈귀를 바라봤다.
“네가 통제하고 있구나.”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그 한마디에 설천위는 작게 안도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란 소리니까.
하긴 만약 완성됐다면 무해를 구하는 순간, 어깨가 아니라 목이 뜯겼겠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도를 집어넣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여유롭군. 포기한 건가?”
“뭐, 비슷하지.”
너무나도 덤덤한 그 모습에 사내, 흑사채주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설천위는 담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이란 게 말이야. 참 뜻대로 안 되는 거더라고.”
죽음을 받아들인 건가.
뜬금없는 헛소리를 시작한 설천위의 모습에 흑사채주는 더더욱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설천위에게는 특이한 회복력이 있다.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최상.
설천위가 눈치채지 못하게 혈귀에게 신호를 보낸 흑사채주가 안전을 위해 거리를 벌리려는 그 순간.
“진짜 하기 싫었는데.”
살짝 짜증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비틀렸다.
살아오면서 처음 느끼는 기이한 감각.
뭔가, 뭔가가 달라졌다.
‘……뭐지?’
혈귀는 여전히 통제를 따르고 있고.
설천위는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
딱히 변한 거라곤 없는 상황인데.
대체 뭐가 변한 거지?
무언가가 변했다는 이 강렬한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지?
술(術)을 익혔기에 자신의 직감을 믿는 흑사채주는 필사적으로 원인을 찾았다.
분명.
분명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원인을 찾던 흑사채주는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분명 도(刀)를 집어넣었던 설천위가 어느새 검을 쥐고 있었던 거다.
“느리구나.”
[느리구나.]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짜증이 담겨 있던, 설천위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흑사채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뜨려고 했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생겨난 혈선과 함께 그 몸이 허물어지고 있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뿐.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것조차 느린 흑사채주에게서 눈을 뗀 설천위, 아니 천마는 조용히 혈귀를 바라봤다.
베었던 육체가 빠르게 아무는 것이 보인다.
살짝 흐트러졌던 사지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는 모습은 기괴했으나, 천마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역시 혈귀는 기(氣) 없이는 힘들구나.”
[역시 혈귀는 기(氣) 없이는 힘들구나.]
천마의 말에 그에게 몸을 내줬던 설천위는 조용히 경악했다.
그럼 지금 십 보 넘게 떨어져 있던 놈을 반으로 가른 게 순수한 검술이라고?
아니, 대체 어떻게?
검압?
바람?
뭐로?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검술.
그리고 그 검술을 목도한 순간, 설천위는 왜 천마가 여태까지 자신의 몸에 빙의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휘둘렀으면 죽었겠네!’
제대로 단련도 안 된 예전 설천위의 육체로 검을 휘둘렀다간 전신의 근육과 뼈가 망가졌을 거다.
검을 휘두르는 기술 자체의 격이 달라서, 1의 힘으로도 100의 위력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100의 위력을 감당할 수 없는 육체에는 빙의할 수 없었던 거다.
아무리 기술로 그 반작용을 제어한다고 해도, 최저 기준이란 것이 있는 법이니까.
만약, 옛날에 살존과 대립했을 때 천마에게 몸을 맡겼었다면…….
끔찍한 상상에 몸, 아니 혼을 부르르 떤 설천위는 이내 안심하고 천마에게 일임했다.
끝나고 나면 지옥과 같은 근육통과 관절통이 찾아오겠지만, 살아남는 게 어딘가?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 무해를 탈출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작은 후회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가 천마에게 다음을 맡기던 그 순간.
“아, 이거 무리구나.”
[아, 이거 무리구나.]
짧은 한탄과 함께 빙의가 풀린다.
그 즉시, 육체의 제어권을 되찾은 설천위는 단박에 천마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커헉!”
극한까지 쥐어짠 육체가 견뎌 내지 못한 증거가 입을 통해 터져 나온다.
질척하게 바닥을 적시는 피.
사람이 이렇게 많은 양을 토해 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피를 토해 낸 설천위는 입안 가득 느껴지는 피 냄새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천마의 검술을 딱 한 번 펼쳤을 뿐인데, 한계에 몰렸던 육체가 무너진 거다.
이 이상 천마가 검을 휘두르면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 죽었을 터.
[미안하구나. 내 검술은 생전의 육체에 맞춰져 있어 보통의 몸으로는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구나…….]
그래도 많이 단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로도 부족하면 대체 생전에 얼마나 튼튼했던 겁니까.
천마의 말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다행히 천마가 혈귀를 한 번 토막 낸 상황.
기(氣)를 담지 못해 끝내진 못했더라도 금세 회복은…….
“키힛!”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혈귀의 얼굴에 설천위는 본능적으로 검을 찔렀다.
혈귀의 심장을 관통하는 검.
하지만.
“커헉!”
오른쪽 가슴이 꿰뚫린 설천위의 입에서 다시 한번 피가 솟구쳤다.
“키하하핫!”
거친 웃음을 토해 내는 혈귀.
그 손이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며, 설천위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 이건 조졌는데.’
죽음을 직감한 설천위가 쓰러지는 그 순간.
“오! 천위, 오랜만?”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밝은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몸이 쑥 뒤로 당겨졌다.
단숨에 물에 빠지는 몸.
순식간에 사라진 설천위의 빈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혈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주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혈귀는 이내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조금 전의 격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갑작스러운 정적.
그 정적 속에서 설천위가 빠지며 만들어 낸 강의 파문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