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346화-혈천 (1)
아.
‘형수님 몫밖에 말을 못 했네.’
정규철이랑 내 몫도 있는데.
지금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잡념을 떠올리며 설천위는 걸었다.
“어차피 도망 못 쳐.”
너무 과하게 강기(罡氣)와 충돌해 완전히 박살이 난 무릎이 서서히 아물어 간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걸음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움직인다.
치이이익!
의지에 반응한 기(氣)가 더욱 맹렬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연기를 뚫으며, 설천위는 나아갔다.
“너희에겐 그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설천위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전장을 넘어왔을 백절생사단.
전투에 미쳐, 살인에 미쳐 전장을 떠돌던 광인들.
“왜 그러지?”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은 미치지 않았음을.
자신들이 미쳤다면.
‘저 괴물은 대체……!’
눈앞의 괴물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으, 으으아아아!”
압도적인 공포.
감정이 뒤틀리고 이성이 일그러진 그 공포 속에서 드디어 완전히 미쳐 버린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을 기고.
필사적으로 벽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는다.
“……하.”
완전히 맛이 가 버린 부하들의 모습에 유허정은 헛숨을 삼켰다.
부하들이 한심해서?
아니다.
‘……빌어먹을.’
부하들의 저 추태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저렇게 됐을지 모른다.
그것은 공포였다.
미지에 대한 극심한 공포.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부하 놈들이 어찌 저리도 꼴사나운 추태를 보인단 말인가.
죽으면 죽었지, 저리 애새끼들처럼 질질 짤 놈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나약하기 그지없는 찌질이로 바꾼 것.
“……당신의 힘이오?”
“뭐가?”
“이 주변을 억누르고 있는 힘.”
존재 자체가 짓눌리고 있는 것 같은 이 힘.
다른 단주들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무언가.
“알 필요 없다.”
절뚝거리던 걸음이 어느새 정상적으로 바뀌고, 넘쳐나던 연기는 옅어져 그 몸을 휘감는다.
“반항하지 않을 거라면, 그것도 좋지.”
귀찮은 건 적을수록 좋으니까.
도(刀)를 손에 쥐고, 천천히 들어 올리는 설천위.
그 모습에 유허정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무하군.”
검을 드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압도됐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지금 입을 열고 있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인가.
역시.
‘그날 죽였어야 했어.’
남궁현강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어야 했다.
고작 자신의 죽음 따위가 두려워 놔둬선 안 됐다.
뼈아픈 후회.
그 속에서 유허정은 두 눈을 부릅떴다.
“너 같은 괴물이라도 끝은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아직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입을 움직인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사(邪)는 새로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위에 섰다.”
변화.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사람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쉽사리 인지하지 못한다.
강의 흐름이 바뀌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모두가 알아채는 때가 있으니.
“죽음이 범람하고, 생이 마를 것이다.”
강이 넘치거나 혹은 바짝 마르면.
그제야 사람은 자신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위협을 깨닫고 변화를 인지한다.
이미 그 변화를 막기엔 너무나도 늦어 버린 시기에.
“네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한들, 범람하는 강을 막을 수 없고, 말라 가는 강을 채울 수 없다.”
이미 목에 닿은 칼날의 서늘함을 느끼며 유허정은 단언했다.
단주가 이리 움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 거대한 변화를 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닌가.
초인이라 불리는 단주조차도 이 흐름에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저 어린 괴물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초인(超人)이라고 한들 결국 사람을 뛰어넘었을 뿐인 또 다른 사람이니까.
“너는…….”
“전도울이냐, 소준극이냐.”
뜬금없는 물음.
그 순간, 자신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유허정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백유를 밀어내고 사천맹의 권력을 잡을 만한 인간은 그 둘 정도지.”
백유보다 훨씬 먼저 사천맹에 들어가 사존의 눈에 띈 이들.
차기 맹주를 노리는 사존의 제자들.
아마 다른 제자 대부분은 죽었을 거고, 그 둘 다 살아남았거나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았을 터.
설천위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둘만을 떠올렸지만, 유허정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도울도, 소준극도 경쟁자들의 과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던 이들.
맹주가 사라진 지금, 둘이 손을 잡고 단숨에 맹의 중추 자리를 차지했으나 그 전까지는 맹주의 제자라는 사실을 빼면 특이점이 없던 이들이다.
그런데, 단숨에 그들을 특정해 냈다고?
무림맹의 날고 기는 정보 단체들도 겨우 추측 정도나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군.”
말없이 경악하는 유허정의 목 위로 선이 생긴다.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
단숨에 숨이 끊긴 유허정이 허물어지고, 이어지는 도의 움직임에 공포에 빠져 있던 이들의 목도 하나둘 끊어진다.
순식간에 정리된 백절생사단 제3번대.
시체들 속에서 설천위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위를 포위한 흑관을 해제하고, 하늘에 떠 있는 패융을 불러들인다.
육체를 어느 정도 정상적인 범주까지 되돌린 [패룡기]를 거두고 [회복]으로 내상을 다스린다.
순식간에 회복을 시작하며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독하군.”
가슴의 대부분이 함몰됐는데, 아직도 호흡이 이어지다니.
[화경급 고수 중에서도 독한 생명력이구나.]
[전투를 좋아하는 놈이 살아 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어느새 정신이 돌아왔는지 검은 동공이 힘겹게 움직여 상대를 바라본다.
“큭.”
그리고 입꼬리를 뒤틀며 웃는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끈질기군.”
“너…… 만, 할…… 까.”
쇳소리가 가득한, 죽음이 임박한 목소리.
팔이 잘리고, 눈이 없다고 해도 내공은 남아 있다.
팔이 부러지고, 방어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도 기어코 깊은 내공으로 심장을 지켜 낸 것이다.
물론,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꿰뚫고, 다른 장기도 곤죽이 됐으니 살아날 가능성은 없지만.
그 끈질긴 생을 몇 분이나마 붙잡을 순 있었다.
“즐…… 거…….”
죽어 가는 와중에 하는 말이 ‘즐거웠다.’인가.
그것도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상대에게.
그 미쳐 버린 사고방식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도를 들었다.
[전쟁에 미쳐 버린 자의 최후다.]
[십수 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녀석이지.]
염천은 30대 초반 정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나이마저 그렇진 않았다.
지천명에 이른 나이.
정파와 사파의 전쟁이 격렬하던 시기에 전장에서 화경에 올라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단주가 된 사파의 영웅.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에 경지에 오른 그는 분명 천재였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성장한 자는 죽음을 갈구한다.]
둔재였다.
정체(停滯).
전장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꽃은 양분이 될 시체와 피가 마르자 서서히 시들어 갔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채.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라비틀어져 갔다.
“큭…….”
이제 양분이 될 피와 시체가 넘치게 될 텐데.
그 전에 스러지는 것이 아깝긴 했다.
자신의 목에 닿는 도(刀)의 서늘함을 느끼며 염천은 최후의 힘을 쥐어짰다.
“너는……, 반, 드시……, 죽는다!”
“마지막 유언이길래 좀 더 의미심장한 말을 할 줄 알았더니.”
덤덤하게 도를 살짝 들어 올리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뻔해서 하품만 나온다.”
상상력 부족한 작가가 쓴 것 같은 대사나 읊고 말이야.
살짝 들어 올린 것만으로 충분한 예기를 머금은 도가 염천의 목 위로 떨어진다.
이대로 목을 베고, 땅에 닿으리라.
그래.
당연히 그리됐어야 하는데.
“히힛.”
“……하?”
어째서 내 도(刀)가 막힌 걸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음!]
대체 어떻게 혼들의 감시와 내 감각을 뚫고 접근했지?
드물게 천마조차 놀란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즉시 움직였다.
도를 거두고, 몸을 날린다.
그리고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하.”
깨닫는다.
“미친.”
어떻게 자신의 감각을 지나쳤는지.
어떻게 혼들의 감시를 지나쳤는지.
“히힛!”
코앞을 지나가는 손을 필사적으로 허리를 젖혀 피한 설천위는 단숨에 땅을 박찼다.
회피와 동시에 이어지는 공격.
적의 턱을 노리는 일격이 상당한 내공을 머금고 펼쳐지지만.
턱!
막힌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발을 붙잡는, 압도적인 압력에 설천위는 즉시 영력을 터트렸다.
순간적으로 방출한 영력이 상대의 혼을 찌르자, 겨우 손이 풀린다.
동시에 확신했다.
내공과 근력만으론 절대 풀어낼 수 없었을 거라고.
“히핫!”
비틀린 웃음과 함께 상대가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손이 강렬한 풍압을 만들어 낸다.
이미 자세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설천위는 그 풍압에 휩쓸려 날아가고.
“커헉!”
“미친놈들.”
자세를 다시 갖추고 적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심장이 뽑힌 염천의 모습이었다.
힘차게 뛰는 심장을 손에 쥐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 중학생 나이 정도의 소년.
“혈귀…….”
그것도 끝에 가까운 완성형.
혼과 피를 먹여 폭주하는 놈의 살육 욕구를 채우고.
다시 혼과 피를 먹인 뒤, 또 욕구를 채워 준다.
그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혈귀는 점점 더 그들이 원하는 존재를 닮아 간다.
피와 죽음으로 완성되는, 피와 죽음의 정점에 선 존재.
그들은 천신(天神)이라 부르고, 다른 이들은 혈신(血神)이라 부르는 괴물.
물론, 설천위는 답을 안다.
저 짓거리를 수천 번 반복해도 혈교가 원하는 혈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혈교의 교주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저건 다른 것이 아니다.
정말, 그저 정말.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십 명의 아이를 제물로 토대를 만들고.
수백, 수천의 사람을 먹여 완성해 내는.
단순한 도구.
살육으로 만들고, 살육으로 빚어낸.
살육만을 위한 도구.
“꿀꺽.”
어느새 염천의 심장을 완전히 삼킨 혈귀의 눈이 다시 설천위에게로 향한다.
먹기 쉬워 보였던 먹이를 먹었으니, 이제는 조금 어려워도 맛있어 보이는 먹이를 먹고 싶어 하는 눈빛.
혈귀는 가장 하급이 초절정부터 시작하고, 보통은 화경 정도가 그 한계다.
다만, 모든 개체의 한계가 화경급인 건 아니었다.
매우 드문 확률로 벽을 뛰어넘는 혈귀가 등장한다.
신체 능력과 타고난 주력(呪力)만으로 화경급 고수와 맞붙을 수 있는 괴물이.
자아를 얻고.
사고(思考)라는 것이 가능해지고.
스스로의 욕망(欲望)을 깨닫는 것으로.
“하핫!”
진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을 찌를 수 있는 날카로운 검에서.
스스로 움직여 사람을 찌르는 마검(魔劍)으로.
인간의 피와 살.
그 심장과 혼을 탐하는 괴물로.
염천의 심장을 뽑고 그것을 삼키는 과정에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원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흩날려 피어라, 소령연화(燒靈燃枠).”
움직였다.
염천과의 전투로 지금 몸 상태는 바닥을 찍기 직전.
내공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영력도 마냥 여유가 있진 않은 상황.
그러니, 선택지는 하나다.
단숨에 끝낸다.
이쪽의 몸이 무너지기 전에.
적이 완성되기 전에.
어떻게든……!
화르르륵!
설천위의 도에서 억지로 쥐어짠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무리하게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맹렬한 힘을 품은 도(刀)가 적의 목으로 파고드는 그 순간.
“하하!”
쳐 내졌다.
너무나도 쉽게.
아무리 혈귀라도 강기(罡氣)를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 낼 순 없을 텐데.
어째서?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피해라!!]
천마의 경고에 설천위는 즉시 허리를 비틀었다.
상체를 틀고 고개를 돌려 적의 공격을 피한다.
단순히 빠르고 강함을 넘어 날카롭기 그지없는 일격.
닿는 인간의 뼈와 살점을 뜯어내는 흉조(凶爪).
몇 번이고 부딪혔던, 염천의 무공.
“하핫!”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 서린 광기를 마주한 순간, 설천위는 깨달았다.
염천의 혼을 자신이 회수하지 못했음을.
그것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그리고.
‘……조졌다.’
자신의 미래가 상당히 암울해졌다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