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6화
345화-청소 (4)
순식간에 사방을 감싸는 흑관에 가둬진 순간.
유허정은 상대가 자신과 다른 영역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지는 무시무시한 압박감.
이게.
‘단주급.’
전장에서 그저 지나가면서.
혹은 견제 정도로만 마주쳤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모든 순간, 적은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구나.
이쪽은 목숨을 걸고 긴장의 끈을 조였었는데.
그의 앞을 막았던 단주급의 강자들은 자신을 향해 진심을 다하지 않았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유허정은 가볍게 입안을 씹었다.
아니, 가볍게 씹었다고 생각했지만 꽤나 세게 씹은 걸까.
작은 살점이 떨어진 게 느껴졌지만,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삼켰다.
꽤나 출혈이 심한지 진하게 나는 피 맛.
하지만, 나쁘지 않다.
그만큼 강한 고통이기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전원, 전투 준비.”
부하들이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평소의 습관이 그를 이끌었다.
아니, 사실 명령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행동이 전부 그러했다.
평소에 해 오던 것.
평소에 쌓았던 것.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유허정을 움직이게 했다.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반응한 몸은 저절로 기수식을 취했고.
익숙한 몸의 움직임에 기(氣) 또한 반응해 혈도를 내달린다.
단전에서 샘솟는 내공이 요동치고.
수십 번의 대련을 거친 것처럼 심장이 날뛴다.
극한까지 달아오른 전신이 활의 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빌어먹을 애송이가.”
웃음마저 섞여 있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부터 튕겨 나온 이가 시야를 가린다.
몇 번이고 보았던 등.
강제로 당겨졌던 시위가 조금 느슨해지고, 눈과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약간의 여유를 되찾는다.
쩡!!
기(氣)와 기(氣)가 충돌해 서로를 깨부수는 소리와 함께 유허정은 움직였다.
당연히 그 목표는 설천위.
……는 아니다.
미쳤다고 화경급 고수의 싸움에 끼어들겠는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 것이다.
“전원! 벽을 부숴라!!”
짧은 외침과 함께 땅을 박찬 유허정은 즉시 검은 벽으로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분명 저번 싸움에서 단주님이 벽을 부순 뒤 탈출했다.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저 벽을 만들어 내는 것에도 조건이 있다는 소리.
아마도 한 번 부서지면 바로 만드는 것은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 벽을 부수고 그 중을 추적한다!’
어차피 설천위는 단주님이 막아 줄 거다.
갇혀 있는 자신들이 빠져나가 그 중을 죽이는 것만으로 적의 의도는 꺾인다.
거기다.
‘눈치챘나 보군.’
이렇게까지 무리해서라도 중을 보낸 것을 보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감을 잡은 모양.
그렇다면 굳이 이쪽의 의도를 숨기는 척 연기할 필요도 없지.
빠르게 계산을 끝낸 유허정이 설천위가 세운 흑관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대주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허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쿠르르릉!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간 거대한 무언가에 마른침을 삼킨 유허정은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르.]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용.
‘……허세가 아니었던 건가.’
이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무언가를 숨긴 허세라고 생각했더니.
진짜 공격이 가능한 괴물일 줄이야.
저 괴물의 공격을 피해 가며 이 벽을 부숴야 한단 말인가.
절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조건.
하지만.
‘단주님과의 싸움에선 흑룡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공격해 온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지금 설천위가 무리를 하고 있거나.
저 흑룡은 초고수의 싸움에 끼어들 정도의 역량이 없다.
그렇다면.
“용을 공격해라!”
이야기는 간단하다.
용을 죽이고, 벽을 부순다.
혹은.
용을 죽이면서 벽을 부순다.
다시금 벽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어김없이 날아오는 꼬리에 유허정은 부드럽게 몸을 비틀며 공격을 흘려 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결국 짐승의 공격.
카가가가각!
용의 비늘을 검으로 가르며 유허정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베어라! 고작해야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 * *
무인에게 팔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가.
사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가 알 정도로 소중하다.
다만, 그 소중함의 정도에는 무인마다 차이가 있다.
검을 쓰는 무인이라면, 오른손으로 검을 쥐지 못하면 왼손으로 쥐면 된다.
애초에 쓰는 무기가 꼭 양손으로 쥐어야 할 정도로 무거운 대검이 아니라면, 적응 정도에 따라 잃은 손의 빈자리를 완전히 메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도(刀)를 쓰는 무인도 그 빈자리를 충분히 메울 수 있다.
하지만, 대검과 같은 이치로 창이나 봉을 쓰는 무인에게 한 손을 잃은 것은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쉽게 메울 수 없는 빈틈이 생긴다.
두 손으로 다루는 무기는 두 손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특히, 창과 같이 긴 병기의 경우 앞으로 내민 손과 뒤로 내민 손, 둘 중 어디를 축으로 삼느냐에 따라 수많은 공격법이 파생되니 더더욱 그 차이가 크다.
그렇다면, 만약 병장기를 쓰지 않는 무인이라면?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만 싸우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의 고수라면?
한 손을 잃은 그 빈자리는 클까, 작을까?
메울 수 있을까, 없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카핫!”
메울 수 없다.
설천위의 도(刀)와 부딪힌 염천의 몸이 속절없이 밀려난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몸의 균형을 잡아야 할 팔 하나가 없는 것을 망각하고 잘못 균형을 잡아서다.
애초에 현재의 무게중심에 맞지 않는 자세를 취했으니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다.
“팔 하나 없이, 눈 한쪽 없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끈질기게 호신강기를 펼치며 버티는 염천을 보며, 설천위는 도를 세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내심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베고 또 벴지만, 여전히 치명상은 없었으니까.
작정하고 버티는 염천의 방어는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보라.
고작 몇 번이나 서로 공격을 나눴다고, 밀려나는 거리가 줄어들었다.
[적응이 빠르구나.]
[과연, 젊은 나이에 화경에 오른 고수답군.]
[젊다고 해도 30대이지만.]
그것도 후반.
감탄하는 다른 혼들 속에서 고개를 돌린 암영의적은 소백진을 자유롭게 빙의시켜 싸우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30대에 화경에 이른 것만으로 천재 중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한데.
이놈은 둔재 중 둔재인 재능으로 그 천재와 맞먹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물론, 무(武) 이외에 너무나도 사기적인 재능 덕택이긴 하지만.
지금 이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삼류를 전전하던 녀석이.
고작 몇 년 만에.
‘허어.’
그리 생각하니 진짜 말도 안 되는 눈부신 성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암영의적이 감탄하는 사이.
[보거라. 팔을 잃은 것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자신의 자세를 고치는 것을.]
[저것이 무(武)를 깨달은 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바닥의 기울어진 정도조차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냐.]
혼들의 잔소리가 설천위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잔소리를 할 시점은 지나지 않았나?
상황도 상황이고.
너무나도 가혹한 천마와 현태중의 잔소리에 암영의적마저 그것을 말리려는 순간.
[그러니 집중하거라.]
[너는 그래도 눈은 좋으니 볼 수 있을 게다.]
[생각하거라. 너는 결코 멍청하지 않으니.]
혼들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암영의적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읽어 내거라.]
[팔을 잃은 자가 어떤 식으로 적응할지.]
나지막이 들려오는 충고.
그 옛날, 삼류였던 때 천마의 조언을 따라 적을 쓰러트렸던 시절.
제대로 된 주먹질도 못 해 박치기로 적을 마무리했던 시절.
그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지나가는 것과 함께 설천위는 움직였다.
어느새 소백진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
서서히 고갈되는 내공에 연연하지 않고.
패융을 쓰러트리기 위해 날뛰는 놈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적만을 눈에 담았다.
[집착하지 말거라. 어차피 네게 무(武)는 도구일 뿐이니.]
[전체를 보고, 네 다음 행동을 정하거라.]
잘린 왼팔의 빈자리.
의식적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더한 염천의 몸이 단단하게 대지를 밟는다.
그리고 도약.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오는 상대를 향해 설천위는 반사적으로 도(刀)를 휘둘렀다.
제공권(制空拳)을 이용한 반사의 영역에 이른 방어.
그 방어가 상대를 쳐 낸다.
정확히는 베었지만, 상대가 들어 올린 오른팔에 막혀 밀어내는 것에 그친다.
끊임없이 돌진해 오면서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방어를 펼치는 염천.
그러면서 하나씩 남은 팔과 눈은 끊임없이 설천위의 숨통을 끊어 낼 틈을 노린다.
그렇기에.
물러서는 것에 한계가 생긴다.
어떤 경우에라도 반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자세를 유지한다.
왼팔을 잃은 틈을 채우기 위해 왼발에 힘을 더하며.
[네가 먼저 팔과 눈을 뺏은 시점에.]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순간, 설천위는 움직였다.
작은 흑관을 만들어 낸다.
동시에 도(刀)를 휘두르고.
쩡!
막힌다.
회수하는 순간, 반탄력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아주 조금 크게 팔을 위로 올린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빈틈.
하지만, 영역에 이른 자들의 싸움에선 그 무엇보다 확실한 틈.
단숨에 자세를 낮춘 염천의 몸이 길게 늘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거리를 좁힌다.
뻗어 나간 손은 날카로운 맹금류의 발톱이 되어 설천위의 목을 노린다.
그야말로 단 한 순간의 빈틈이 만들어 낸 반격.
그 속에서.
“허?”
염천의 몸이 기울었다.
의식적으로 과하게 힘을 주던 왼발이 역으로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자빠진다.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던 왼발이 막힌 순간, 오른발이 균형을 잡아야 했으나.
이미 뻗어 나가는 힘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무리하게 멈추는 순간, 목이 베이리라.
그 큰 틈을 내어줄 순 없다.
그리 생각한 염천은 즉시 몸을 비틀었다.
넘어질 것 같은 몸의 균형을 회전으로 바꿔 오히려 공격에 힘을 더한다.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나오는 기지의 결정체.
단숨에 자신의 자세를 바꿔 공격으로 이어 나가는 융통성.
하지만.
[네 승리는 확정되었느니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설천위의 무릎이 그 관자놀이를 노리고 파고든다.
기울어져 가까워진 머리를 향해.
빠각!!
설천위의 무릎이 꽂힌다.
그리고.
“캬아아악!”
그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손을 뻗는 염천의 지독한 집념이 설천위의 목을 노렸지만.
푸욱.
어느새 도(刀)를 놓고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싼 설천위의 팔이 염천을 휘감았다.
그 과정에서 염천의 손이 설천위의 팔뚝의 살을 뭉텅이로 뜯어냈으나.
어느새 염천의 목을 휘감은 설천위의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패룡기(覇龍氣)]
강화된 육체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살의 빈자리가 서서히 채워지는,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을 염천은 볼 수 없었다.
꽈아악!
“커억!”
마치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설천위의 팔이 단단히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형수님의 몫.”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염천의 몸이 들린다.
하나뿐인 팔로 방어해 냈으나, 무식하게 솟구치는 무릎은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 내는 거라곤 믿기 힘든 폭음을 쏟아 냈다.
단련된 근육이 폭발하며 미친 듯이 솟구친다.
쾅! 쾅! 쾅!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때리고, 또 때린다.
가로막는 팔을 지키던 강기조차 흐릿해지고.
결국 팔이 부러지는 것과 함께 폭음은 섬뜩한 소리로 변한다.
뼈가 부러지고, 숨이 끊어지는 소리.
“후우.”
설천위가 호흡을 고르는 것과 함께 거칠게 놓은 염천의 몸이 회전하며 쓰러진다.
하늘로 향한 가슴이 마치 종의 속처럼 움푹 파인 끔찍한 몰골.
강기를 억지로 두들겨 팼기에 끔찍하게 찢어지고 뭉개진 설천위의 무릎에서는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 모든 광경을, 거대한 용 때문에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유허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냐고?
“자, 끝내자. 새끼들아.”
눈이 돌아간 것 같은 저 괴물이 다리를 절뚝이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 어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