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343화-청소 (2)
“……상태가 상당히 안 좋네.”
여웅의 앞에 쪼그려 앉은 설천위는 여웅의 상태를 살피곤 미간을 찡그렸다.
[이대로 놔두면 죽을 게다.]
확신이 서린 신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신의에게 몸을 맡겼다.
단숨에 그의 손을 빌린 신의가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내공을 이용해 부러져 어긋난 뼈를 맞추고, 내부에서 일어난 출혈을 잡는다.
천희가 살던 현대의 외과술로도 힘들 정도로 신속하고 뛰어난 치료.
그야말로 내공이라는 불가해한 힘이 있기에 가능한, 신기에 달한 의술.
빠르게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한 여웅의 상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웅이 가장 심각한 상태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상처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신이 막아 주긴 했으나, 염천의 공격을 당한 정규철도 내상이 상당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외상에 더불어 무리하면서 생긴 내상까지.
확실한 건 전투를 이어 갈 상태가 아니라는 것.
[크르르르르…….]
“그래, 몇 명 놓쳤다고?”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돌아온 패융의 보고에 설천위는 웃으며 패융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초에 다 잡으려고 했던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패융은 패룡이지 수룡은 아니니까.
아예 산개해서 물속으로 도망친 놈들을 전부 죽이는 건 무리인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
[너도 슬슬 쉬어야 한다.]
이쪽도 상태가 안 좋은 만큼 패융도 전력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불살대의 대원들 상태까지 전부 살피고 난 뒤, 신의가 설천위를 붙잡았다.
영역(靈域)의 전개.
현태중의 검기(劍技).
하늘을 뒤덮은 패융의 견제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압살까진 힘들었다.
아무리 영역으로 적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이쪽으로 흐름을 가져온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특히, 정신적으로 강한 인간일수록 영역의 압박에 영향을 덜 받는다.
화경급 고수를 영역의 힘으로 압박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화경급 고수가.
“눈 하나에 팔 하나인가.”
무려 자신의 신체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했으니, 설천위가 버틸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서슴없이 눈을 내어준 공격에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전투 속행은 가능한 수준이라서 적은 즉시 도주를 선택했고.
결계를 부수는 적을 막는 과정에서 팔을 잘라 냈지만, 결국 탈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무리 뛰어난 물리력을 자랑하는 설천위의 흑관(黑棺)이라도 화경급 고수의 물리력을 무한정 버틸 순 없는 법.
하나 남은 오른팔로 끈질기게 결계를 부수는 상대의 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여웅과 정규철을 지키느라 타이밍을 놓쳐 아예 도주를 허용하고 말았고.
아쉬운 결과였지만.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
자신을 붙잡는 신의의 손을 쓱 밀어내 치운 설천위는 상급에 이른 [회복]을 발동시켰다.
[패룡기(覇龍氣)]는 오로지 전투만을 위한 힘.
내상 치료에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도움이 되는 건 외상이다.
그 외에도 신체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능력이 있지만.
여하튼,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선 [패룡기]보단 [회복]만을 따로 사용하는 게 더 낫다.
게다가 장기적인 치료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조건 [회복]이 더 낫기도 하고.
천천히 내상이 치료되는 것을 느끼며 설천위는 조용히 움직였다.
패융을 부려 배를 끌어오고, 부하들을 싣는다.
눕힐 수 없다는 건 마음 아프지만, 어차피 부두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도착하면 즉시 사람을 불러 지부로 옮긴 다음에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싹 쓸어버려야겠어.’
실전 경험은 이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됐다.
사천맹의 단주에게 중상을 입힌 지금.
수채들을 끝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적들은 음지의 조직들이 사람을 사고파는 중요 루트 중 하나다.
끊어 낼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익적인 측면을 떠나서 사람을, 그것도 죄 없는 민간인을 사고파는 짓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있다면, 구해 낸다.
패융을 불러 배를 부두로 끌고 가면서 설천위는 조용히 선두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람을 가르는 패융의 뒤를 따라 흘러가는 배.
강 위로 흐르는 시원한 바람에 배에 가득했던 피 냄새가 날아간다.
평소에는 싫어하는 편인, 물 특유의 비린내조차 상쾌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바람의 배려 속에서.
설천위가 조용히 스스로를 가라앉히던 그 순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맡고 싶지 않은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조금 전까지 이 배에 가득 찼던.
피 냄새.
그리고.
“너희가 기어코 돌아 버렸구나.”
죽음의 냄새.
즉시 자리에서 일어선 설천위의 몸이 망설임 없이 강으로 뛰어든다.
패융에게 배를 맡긴 채 영력으로 발판을 만들어 강 위를 질주한다.
거침없이 달려 부두에 닿는다.
“흡!”
“에헤이!”
상대를 압박해 가는 무해의 무거운 주먹이 적의 검과 충돌한다.
웬만한 무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거센 압박이었으나,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무해의 공격을 받아 냈다.
아니, 평정심을 넘어 여유롭기까지 한 장난스러운 태도.
최소 반 수.
‘아미타불……!’
상대가 위다.
그것을 깨달은 무해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불호로 가라앉혔다.
소림의 무학은 부동(不動)의 무학.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는, 구도자의 자세로.
“아미타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일보(一步)!
크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저 확실하게 조금씩 앞으로!
내공을 실어 담은 진각이 땅을 울리고, 허리춤에 붙인 주먹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움켜쥔다.
완전히 기초로 돌아가는 일권(一拳).
확실하게 적을 제압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확실하게 적에게 닿겠다는 의지를 품은 공격.
자신의 앞에 있는 목표를 이뤄 내기 위한, 정제된 일초(一招).
몸으로 파고드는 상대의 검은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와 내공이 막아 낸다.
살가죽은 가를 수 있어도, 그 안에 있는 단련된 근육과 뼈는 가르지 못하리라.
금강권(金剛拳).
그야말로 소림의 정수가 담긴 일권(一拳)이 백절생사단(百絶生死團) 제1번대 대주, 사혁을 향하는 그 순간.
“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사혁의 몸이 멎었다.
본래라면 피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무해의 공격을 받아넘겼을 사혁이 그대로 몸이 굳어 무해의 공격을 허용했다.
사혁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확인한 순간, 급하게 궤도를 꺾은 무해의 주먹이 사혁의 복부에 꽂힌다.
쩡!
“꺼억!”
단전이 깨지는 섬뜩한 소리.
그와 동시에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사혁.
여유로웠던 태도와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던 고수의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
“급한 상황이라 손을 썼다.”
축 늘어지는 사혁의 손발에서 사라지는 검은 관.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혁을 짧게 바라본 설천위는 그대로 주위를 둘러봤다.
두 눈이 벌게져 날뛰는 수적들을 제압하기 위해 불살대가 애를 쓰는 모습.
그리고 그럼에도 숫자가 부족해 날뛰는 수적에 의한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건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이다.
수적들이 부두를 습격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자신들을 막으러 온 무림맹의 무력대를 무시하고 약탈과 살인에 집중한다고?
동료들이 뒈지든 말든 그들을 미끼로 던지고?
어떻게든 합공해도 모자랄 판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상황.
그렇다면, 상식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이 상황에 개입했다는 것만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흑사.”
[예.]
“제압.”
[명을 받듭니다.]
설천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흑사의 실.
이미 영역의 전개까지 끝냈기에 흑사는 순식간에 수적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멀쩡한 불살대는 제압된 수적들을 포박하도록.”
“예!”
아비규환이나 다름없던 부두의 풍경이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수습되어 가는 모습.
“……아미타불.”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감탄하며 무해 또한 몸을 움직였다.
부하들을 도와 수적들을 제압했다.
내공이 꽤 있는 수적들은 일일이 그 단전을 부수고 양팔을 결박했다.
그야말로 차 한 잔 마실 시간 만에 완전히 정리된 부두.
“단주님.”
“시신과 부상자들은…….”
어느새 제압을 끝내고 다가온 무해의 부름에 다음 지시를 내리려던 설천위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말을 끊었다.
“……배에 있는 불살대원들을 챙기도록. 지부로 귀환한다.”
민간인 사상자의 처우를 말하지 않는 설천위의 태도에도 무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천위가 괜히 민간인을 안 챙길 리가 없으니까.
“무, 무슨 일입니까!”
“빨리도 오는군.”
꽤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피와 죽음의 냄새를 관인이라고 어찌 모를까.
허겁지겁 달려오는 척만을 한, 호흡이 꽤나 멀쩡한 포두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수적 놈들이 날뛰었소. 마침 지부에 있던 이들이 손을 보탰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역부족이었소이다.”
“수, 수적 놈들이 말입니까?”
수적이 부두를 습격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에 포두가 목소리를 떨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압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놈들 중 낯이 익은 녀석들이 몇몇 보였으니까.
지현 대인께서 뇌물을 받을 때 마주쳤던 놈들이다.
즉, 수적이 확실하다는 소리.
“눈치를 보아하니 아는 얼굴들이 있는 것 같군.”
“무, 물론입니다. 강 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놓쳤습지요.”
“그렇군. 놓쳤던 거군.”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말이 상당히 짧아졌지만, 포두는 그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럼 괜찮겠어.”
“예?”
뭐가 괜찮아?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당황하는 포두의 반문에 설천위는 비틀린 미소로 대답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무혈시 인근의 수채는 전부 사라진다.”
담담하게.
그리고 싸늘하게.
설천위는 청소를 선언했다.
“한동안 주머니가 꽤 가벼워질 거라고 대가리한테 전해.”
* * *
“화려하게도 했군.”
곳곳에서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불길과 숯이 되어 널브러진 잔해들.
그 속에서 풍기는 시체가 타는 악취에도 염천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단주님.”
“엉?”
“상처의 치료를…….”
“됐다. 고작해야 팔 하나 잘린 것 가지고 엄살은.”
아니, 팔 하나가 고작은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염천의 사고방식에 고개를 저은 유허정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부하들을 거의 잃고, 염천과 함께 돌아온 흑사채가 있는 섬.
중간에 내공이 떨어져 헤엄쳐 오느라 몸이 흠뻑 젖었지만, 다행히 섬 곳곳에 있는 불길이 젖은 옷을 말려 줬다.
“여.”
“……살아 돌아왔군.”
“그럼, 그런 애송이한테 죽을 정도로 퇴물이 되진 않았지.”
“팔 하나 없이 돌아온 주제에 당당하군.”
그런 흑사채의 중심.
피와 시체로 가득한 공터에서 두 무릎을 꿇고 정중히 앉아 있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적의 상태는?”
“내상을 입혀 놓긴 했지.”
“천만다행이군.”
살짝 안도하는 흑사채주의 표정에 염천은 여전히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별로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내부를 뒤흔들었는데도 끝까지 자신을 추적하던 그놈의 눈동자.
내상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휘두른 검에 결국 팔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
눈만으로 끝내려 했는데.
“의식은 끝나 간다.”
“오, 벌써?”
“씨앗에 물을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오래 걸릴 것도 없지.”
“수채들을 싹 모은 보람이 있네.”
흑사채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염천은 히죽 웃고 근처에 말라비틀어진 시체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놈을 유인한다.”
놈.
누구인지 말해 뭐하겠는가.
이곳에 있는, 정파 무림의 중요 인물.
그의 죽음만으로 꺼졌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인물.
“놈을 죽이고, 이 무림에 다시 전쟁의 불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