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1화
340화-수적도 사파지 (8)
현 사천맹의 맹주, 사존(邪尊) 구령학은 선을 알고 지키려 하는 사람이다.
현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무자비하고 비열하기만 해선 사파라는 무리는 존속될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
무리에서 조금 나쁜 녀석 정도의 위치를 잡아야 한다.
단지 그 무리의 크기가 거대한 중원 전체일 뿐.
적당히 깽판을 쳐도 ‘에잉, 글러 먹은 놈. 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적당한 악역.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당연해서 욕 한번 진하게 먹고 넘어갈 수 있는.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이 당연한 수준의 존재.
그리고 그런 존재의 조건은.
상대에게 이쪽이 선을 지키는 존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동네에 주먹 좀 쓰는 왈패가 있다면, 사람들은 욕을 하고 말지만.
사람을 줄줄이 죽이는 연쇄 살인마가 있다면 공포에 떨며 집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
왈패와 살인마의 차이는 사람을 무의미하게 죽이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목숨이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위협받을 일이 없다는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구령학이 사파가 이 무림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긴 길.
자연스럽게 사천맹 안에서 강한 금제가 이루어졌다.
사람의 피와 살로 연공하는 무공은 전부 금지.
그걸 주력으로 하는 문파의 반발?
구령학의 손에 전부 죽었다.
인육을 먹거나, 사람을 고문하는 취미?
당연히 금지이고, 그것을 어긴 결과는 오로지 죽음뿐.
민간인을 향한 무의미한 학살 또한 당연히 금지됐다.
정파와의 전쟁은 소극적으로 전선 굳히기에 들어갔고, 어영부영 넘어가다가 전쟁은 멎었다.
물론 아직까지 소규모 전투는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전쟁이라 부를 정도의 대규모 전투는 사라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사파 특유의 속은 놈이 잘못이고 당한 놈이 나쁘다는 분위기는 여전했으나.
피와 죽음의 악취는 크게 줄어들었다.
숨통을 조이는 악취가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빠르게 받아들였고 구령학의 방식에 크게 동조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악취에 숨통이 조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코를 찌를 듯한 악취만이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로 여기던 이들이 있었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 악취만이 호흡의 증거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카핫!”
백절생사단(百絶生死團)의 단주, 염천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평소에 보이는 흐트러지고 가벼운 성격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에 나오는 태도.
관심이 없기에 그냥 대충대충 넘기는 것이다.
거칠게 내지른 손이 설천위의 어깨를 향한다.
주먹을 쥔 것도, 손을 편 것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손.
손에 두른 강기(罡氣)가 너무나도 선명히 빛나는 것을 제외하면 허술하기 그지없는 공격이다.
허나.
콰득!
설천위는 그 공격을 결코 가볍게 받아 낼 수가 없었다.
손에 쥔 도(刀)로 적의 공격을 받아 냈으면서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멈추면 부러진다.
카각!
도가 상대의 손을 긁어내는 거친 소음과 함께 빠져나오지만, 베여야 할 상대의 손은 멀쩡했다.
그만큼 손을 감싼 강기가 단단하다는 증거.
그리고 미친 듯이 손을 뻗으며 공격해 오던 염천은 흥미로운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군. 그거, 강기는 맞나?”
“맞는데?”
“거짓말이군.”
입꼬리를 비트는 것과 동시에 염천은 또다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거리를 좁히는 것과 함께 뻗어 나오는 손은 단숨에 수십 개로 늘어났다.
내공과 초식을 이용한 환각.
그 안에 담긴 진짜는 오로지 두 개.
나머지 모두는 허상이다.
어떤 손은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어떤 손은 손바닥을 내밀며, 어떤 손은 주먹을 쥐고 있고, 어떤 손은 매의 발톱과 같이 오므리고 있다.
수십 개의 손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오는 상황.
적에게 정확한 판단과 선택을 강요하는 일수(一手).
잘못 판단하는 순간.
살점이 뜯기고 뼈에 구멍이 뚫리리라.
그런 선택의 강요 속에서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선택?
방어?
필요 없다.
도(刀)를 쥐고 있음에도, 손을 쓰는 상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거리는 급격하게 좁혀지고, 상대의 손이 이쪽에 닿기 직전의 상황이 됐지만.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푹!
검지와 중지가 살을 뚫고 뼈에 닿는다.
상대의 경계가 덜한 어깨를 노린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남은 것은 목을 노린 일격.
매의 발톱처럼 오므린 손이 목젖을 뜯어 버리기 위해 쇄도하는 순간.
[크르르르.]
설천위의 목을 감싸고 나타난 작은 용이 그 손을 물었다.
강기로 보호하고 있었기에 상처는 없으나, 공격 자체는 확실하게 막힌 상황.
살면서 처음 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공격이 막혔음을 인지한 염천은 즉시 몸을 비틀었다.
거리를 벌리진 않는다.
도(刀)를 쥔 상대에게 어설프게 거리를 벌려 봤자 오히려 적의 공격이 더 간결하고 강해질 뿐이다.
그저 손을 회수하기까지의 시간만 벌면 충분…….
“……허.”
눈앞에 나타난 검은 선.
어깨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과 함께 염천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설천위의 어깨를 꿰뚫었던 검지와 중지가 살을 뜯으며 빠져나오고.
작은 용에게 잡힌 팔은 그 용과 함께 몸으로 붙는다.
“크하하하하!!”
어깨에서 솟구친 뜨끈한 피가 볼을 적시고, 아찔한 통증이 움직임을 막지만.
염천은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구나!”
이런 상대를 두고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단 말인가.
몸 쪽으로 끌어당긴 양팔을 다시 뻗으며 허리를 비튼다.
자신의 목숨조차 판돈으로 쓰는, 자신과 같은 승부사의 기질을 가진 무인을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치이이익
“무식한 놈.”
흥분으로 가득 찬 염천의 손이 설천위에게 향하기도 전.
이미 거리를 벌린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며 그를 비웃었다.
그의 어깨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연기가 유독 강하게 그의 어깨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주고받는 식으로 싸우진 않거든.”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살이 아물어 빈공간이 채워지는 설천위의 어깨.
그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에 염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짜증 나는 부류였군.”
“뭐래.”
한껏 끌어올렸던 살의가 가라앉는다.
흥이 식었다는 듯, 염천은 자신의 볼에 튄 피를 대충 문질렀다.
“사파에는 꽤 흔하다. 사술을 써서 실력 차이를 뒤집으려는 놈들.”
승리와 생존이 최우선.
그런 사파의 분위기에서 사술은 안 쓰는 놈이 바보고, 당하는 녀석이 머저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사술을 쓰는 건 아니다.
사술을 연습할 시간에 무(武)를 갈고닦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은, 재능을 가진 강자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염천은 그 재능을 가진 강자에 속하는 부류다.
사술 따위 없이 오로지 무(武) 하나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강자.
“그런 놈들과의 전투는 언제나 시시했지.”
그렇기에 그는 사술을 혐오했다.
제대로 된 기반도 없이 얄팍한 속임수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치졸함.
죽음과 마주해 살아가야 하는 무인에게 그런 치졸함은 곧 나약함이다.
얄팍한 수가 읽히면, 허무하게 목을 내주는 머저리들.
수련을 게을리 해 제대로 된 공방조차 힘든 놈들.
“실망스럽군.”
그렇기에 염천은 실망했다.
“기술도, 신체 능력도 부족해. 사술을 배우는 것에 시간을 낭비했군.”
몇 번 손을 섞으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흑룡단주는 단주라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기교는 조잡했고, 힘과 속도도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저 기이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난 뒤부턴 자신을 확실하게 따라오고 있으나, 결코 앞서는 부분이 없다.
그래도 단주(團主)이기에 기대를 했거늘.
과감하게 들어오는 그 근성에 감탄했거늘.
“흥이 식었다. 빠르게 끝내지.”
강렬하게 피어올랐던 살기가 마치 차가운 강바닥의 그것처럼 가라앉는다.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아찔한 살기.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살기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식어?”
[크롸라라라라라라!!]
설천위의 등에서부터 올라온 패융의 포효가 강과 섬을 뒤흔든다.
예전에 노공을 죽일 때는 다른 혼들의 힘을 빌렸다.
팽후와의 비무에서는 결국 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사실 설천위는 여태까지 화경과의 전투를 본인의 힘으로 이긴 적이 없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설천위는 아직 화경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무(武)로 승부를 본다면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말이다.
“사술을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설천위로 살아가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친 무(武)보다.
“미안한데, 그 반대다.”
취미처럼 익힌 술법이 더 강하다.
사술을 익히는 데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무공을 익히는 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쿵! 쿵! 쿵!
설천위의 영력이 뻗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서 있는 언덕의 주위로 수십 개의 검은 관이 박힌다.
화경이랑 비빌 만하니까 이제 무공으로 어떻게 해 본다?
에이.
실전에서 그딴 게 어디 있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상대를 찍어 눌러야지.
요 며칠 수채들을 상대하느라 내공과 영력의 소모가 꽤 컸지만, 내공은 몰라도 영력이라면.
“넘칠 만큼 있지.”
상급에 이른 영력 스탯은 폼이 아니다, 이 말이야.
순식간에 주위를 포위한 검은 관과 하늘을 점령한 거대한 용의 형체.
만약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암천룡(暗天龍)]은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주인 없는 섬이 아닌가?
전부 때려 부숴도 상관없다면, [암천룡(暗天龍)]도 참 좋은 수지.
염천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를 설천위의 영력과 패기가 거침없이 밀어낸다.
파직! 파직!
염천과 설천위가 만들어 내는 기세가 충돌하며 생기는 기(氣)의 화화(火花).
뇌전과 불빛이 번뜩이는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주변의 식물은 빠르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단숨에 전장의 공기가 바뀐 순간.
“개소리! 술사 나부랭이가 무인의 앞에 선 것이냐!”
염천이 땅을 박찼다.
기와 기의 충돌로 생기는 화화(火花)를 뚫고 나와 설천위의 앞에 당도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에 도(刀)가 아닌 검(劍)이 들려 있는 것을 인지했고.
‘죽는다!’
본능을 자극하는 강렬한 감각에 염천은 몸을 비틀었다.
대지에 발을 박아 정지하며 몸을 비튼다.
전력으로 뛰었던 속도를 억지로 멈추며 강한 부하가 들어왔지만, 염천은 어떻게든 근육과 관절을 쥐어짜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호오.”
[호오.]
[소적검(消跡劍)]
공간이 갈라지는 것 같은 참격이 염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여파만으로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는.
강렬한 예기의 바람.
보이지도.
볼 수도 없었던.
무흔의 일격.
“오랜만에 보니 꽤나 실력이 좋아졌군.”
[오랜만에 보니 꽤나 실력이 좋아졌군.]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투.
일순 일그러졌던 염천의 얼굴이 기이한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크하하하하하!!”
광소.
그리고.
“사적귀검(斜跡鬼劍)!!”
현태중의 생전의 별호를 외치는 것과 함께 염천의 몸이 단숨에 앞으로 쏘아졌다.
* * *
“다들 모였군.”
“으음……. 이게 맞나 모르겠군.”
흑사채.
각자 수채를 비우고 모인 채주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먹을 거야 최대한 챙겨 왔으니 문제는 안 되겠지만, 문제는 공간이었다.
흑사채가 꽤나 넓은 섬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아예 사람이 못 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간에 여유가 없었다.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는 상황.
소속이 다른 부하들 사이에서 불만과 싸움이 급증하고 있다.
채주들의 우려에 흑사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알고 있소. 다만 공간이 부족한 건 조금만 참아 주시오.”
“뭔가 방법이 있소?”
자신 있게 말하는 흑사채주의 말에 누군가가 물음을 던지자, 흑사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한곳에 모으기 편하니, 공간이 부족할 일은 금세 줄어들 거요.”
“그게 무스……. 컥!”
단숨에 심장이 꿰뚫린 채주 하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가고.
그에 반응해 무기를 뽑으려던 채주들 또한 하나둘 심장에 칼이 박히기 시작했다.
“히히.”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흑사채주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귀찮은 것들은 처리했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모든 것은.
“천신강림, 혈세도래.”
그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