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339화-수적도 사파지 (7)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전장……인 건 당연히 아니다.
아무리 낭인이라고 한들 사람이 항상 피와 죽음 속에만 살 순 없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들은 낭인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 대문파들조차 그들이 문하의 제자들보다 실전 경험에서 분명 뛰어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대체 낭인들은 어떻게 그토록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횟수가 아니라 농도에 있다.
하루하루를 피 말리는 전장에서 보낸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전장이 피 말리는 지옥임은 분명한.
그런 삶을 낭인들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에 움직인다는 특성.
그것으로 인해 홀로 움직이든, 뭉쳐 움직이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사람을 노린 악인이 거짓으로 의뢰를 내는 건 흔한 일이다.
막상 일이 힘들어지면 동료를 배신하고 적에게 자비를 구하는 놈들도 수두룩하다.
실력에 자신 있다며 호언장담하던 놈이 찍소리도 못 내고 죽어서 등을 맡길 이가 없어지는 일도 있지.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이 목숨줄을 연명시켜 준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님은 당연히 없고.
위기의 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돕기 위해 달려와 줄 사형제도 물론 없다.
철저하게 혼자.
혼자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그 간단한 이치 속에서 낭인은 전장의 모든 것을 인지하고 다루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이 방법이란 것은 사실 범인(凡人)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낭인 중에 오래 살아남은 이를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을 운에 기대어 어떻게든 해내고 살아남았으니 그것이 운이 좋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가끔 있다.
그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끌고 오는 범인(凡人)이 아닌 천재(天才)가.
이 무림에서 그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 가장 유명한 천재는 낭괴(狼怪).
“흡!”
정규철도 그 언저리에 도달한 수재(秀才)다.
아니, 어떤 의미로 낭괴보다 더한 천재다.
절정.
약한 건 아니나, 그보다 강한 이는 낭인 중에도 몇 명이나 있다.
분명 강하지만, 그 위가 얼마든지 있는 약자이기도 한 경지.
40이 넘어 도달한 경지가 절정이란 소리는 약자로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사람이란 뜻이다.
십 대 초반에 죽은 산적의 도(刀)를 주워 전장에 선 뒤로 30년을 버텨 온 천재(天才).
거침없이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상대의 도신 밑 부분으로 받아 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발.
발차기 같은 거창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속도도, 힘도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그런 큰 동작은 ‘빈틈을 줄 테니 찔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그렇기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동작.
살짝 발을 내밀어 적의 발가락을 노린다.
약간의 내공을 실었기에 밟을 수만 있다면 뼈를 부러트리진 못해도 금 정도는 가게 할 수 있는 수법.
허나, 상대는 사파의 고수.
아무렇지 않게 발을 빼며 몸을 비튼 상대의 검이 다시금 정규철을 노린다.
그야말로 신속.
단숨에 목을 벨 것 같은 검이지만, 마찬가지로 정규철의 도신이 그 검을 막아섰다.
본래라면 막을 수 없는 속도의 격차가 있었을 텐데도.
정규철은 끊임없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낭인 출신인가?”
그렇기에 유허정이 이상을 감지하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도도, 힘도 이쪽이 우위다.
그런데도 이쪽이 완전히 우위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면 이유는 하나.
상대가 자신보다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다.
보다 짧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보다 적은 힘으로 막아 낸다.
그 효율의 차이가 지금의 팽팽한 공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아예 공격을 포기한, 철저하게 상대의 손발을 묶는 전략.
자신의 주제를 알고 할 수 있는 일만을 정확히 해내는 그 판단력과 실행력은 참으로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네 녀석이 기다리는 일은 오지 않는다.”
유허정은 거칠게 검을 휘둘러 상대를 몰아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예전에 흑룡단주를 본 적이 있지. 그가 너보다도 약했을지도 모르는 햇병아리일 때 말이야.”
말을 하고 있어서 호흡이 흐트러진 탓일까.
거칠긴 하지만, 조금 느슨해진 유허정의 검에 정규철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일수록 틈이 드러나면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법.
날카롭게 눈을 뜨고 도(刀)를 휘두르는 정규철을 보며 유허정은 말을 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그 어린놈은 무림맹의 단주가 되었고, 흑룡성(黑龍星)이라는 오만한 별호로 불리게 됐지.”
휘릭, 유허정의 검이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막대한 힘의 격류에 정규철은 이를 악물었다.
도로 받아 내면서 어깨와 손목은 물론 허리까지 이용해 모든 힘을 흐트러트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부 해소해 내지 못한 힘이 정규철의 자세를 흐트러트린다.
여태까지 작은 견제로 상대의 속도를 늦춰서 만들어 낸, 속도의 간극을 메우던 그 자그마한 여유가 단박에 날아갔다.
힘을 전부 해소하지 못해 도가 허공에 멈춘 극히 짧은 한순간의 틈.
그 틈을 파고든 유허정의 검이 정규철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꿰뚫을 생각이었던 검이 가죽과 살을 조금 베어 내는 데 그쳤지만, 유허정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당겼다.
적이 검을 당기는 그 틈을 이용해 자세를 추스르고 다시금 방어를 굳히는 정규철.
반격 같은 건 욕심내지 않는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버티는 것뿐.
적이 검을 회수하며 생기는 그 찰나의 빈틈을 이를 악물고 넘겼다.
“일부러 틈을 드러냈음에도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방어에만 집중하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지.”
침묵으로 대응하는 정규철.
그를 잠시 바라본 유허정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나도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 괴물이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움직이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그래.
죽을 각오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각오와 체념은 다른 개념이니까.
“그나저나 운이 좋군. 첫 매복부터 당첨일 줄이야.”
쾅!!
작게 웃는 유허정의 뒤쪽에서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작은 섬이 흔들렸다.
“시작했나 보군. 여태까진 서로 탐색만 했나?”
그 충격이 단주급의 격돌이 시작됐다는 증거임을 알기에 유허정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유허정의 검이 정규철의 다친 어깨를 노리고 떨어진다.
이를 악물고 검을 받아 내는 정규철.
어깨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적의 검에서 느껴지는 무게를 견뎌 내며, 정규철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헛소리는 끝났나?”
“아직 입은 살아 있나 보군.”
“하, 백절생사단(百絶生死團)의 유 대주가 이리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못 들었는데.”
도(刀)로 천천히 유허정의 검을 밀어내며 정규철은 말을 이었다.
“시간을 끈다는 건 정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다리는 대상이 틀렸다.”
정규철의 비틀린 입꼬리가 원래의 위치를 되찾고.
철저하게 몸의 주위만을 돌며 방어에 집중하던 정규철의 도가 처음으로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팔을 거의 쭉 편 수준의 거리까지 나아가는 도(刀).
자신과 무기를 맞대고 있던 그 순간에 폭발적으로 힘을 쥐어짜 억지로 거리를 벌리는 그 방식에 유허정은 순순히 두 걸음 물러났다.
힘에 밀려서가 아니었다.
억지로 힘을 줘서 버텼다간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단숨에 자세를 다잡고, 무릎을 쳐올린다.
“너무 뻔하군.”
“큭!”
옆으로 파고들던 여웅의 주먹을 무릎을 올려 쳐낸 유허정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한 발로 선 채 휘두르는 검은 여웅의 앞을 지나가고, 차올렸던 무릎은 일직선으로 펴져 그새 접근한 정규철의 도를 차올린다.
“기다린 게 고작 이 어린 애송이인가?”
단숨에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유허정이 검을 당기고 차올렸던 발로 대지를 찍는다.
반의반 호흡도 걸리지 않아 단숨에 공격을 위한 자세를 회복한 유허정.
“흡!”
그보다 아주 조금 늦게 자세를 고친 여웅이 다시금 달려들었고, 마찬가지로 도의 궤적을 꺾은 정규철의 도가 유허정의 목을 노린다.
하지만 상대는 그들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먼저 준비를 끝낸 상태.
정규철의 도는 피해 내고, 여웅의 주먹은 쳐 낸다.
하지만, 숫자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
여유롭게 여웅과 정규철의 합공을 받아 내는 유허정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격의 주도권까지 가져오진 못했다.
결코 어느 쪽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광경.
하지만 그 속에서 정규철은 자신도 모르게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이게 정상이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 한 단계 정도 경지의 차이가 난다고 해도 아예 못 비비는 건 아니다.
하물며, 이렇게 머릿수에서 우위에 있다면 이기는 것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물량의 힘 아닌가?
그런데, 그 물량을 힘과 기술로 찍어 눌러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괴물이 이상할 뿐이다.
그래.
“단주급만 아니면 할 만하군!”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입술을 핥으며 도를 휘두르는 정규철의 웃음소리에 여웅의 공격이 호응한다.
갑자기 할 만하다는 듯 공세로 전환한 두 사람의 모습에 유허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세웠다.
“그 헛소리를 주워 담게 해 주지.”
* * *
불살대가 도착한 곳의 반대편.
은은하게 기세를 풍겨 자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상대의 술수에 응해 도착한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섬의 고지에 있는 바위.
그 바위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참…….
“똥폼이란 똥폼은 다 잡고 있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똥이란 말이 들어가는 걸 보니 욕을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군.”
설천위의 혼잣말을 들은 상대가 쓱 몸을 돌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장포.
검은 장포 아래로 드러난 무복은 꽤나 허술하게 조여져 있어서 단련된 육체가 훤히 드러났다.
장포와 함께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장발.
상당한 미남이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몇 개의 상처가 그 인상을 무섭게 만든다.
“백절생사단주(百絶生死團主), 염천이다.”
“흑룡단주(黑龍團主), 설천위다.”
짧은 자기소개.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염천은 이리저리 목을 비틀었다.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선다?”
“수채 두세 개 정도는 선물로 얹어 주마.”
목부터 시작해 손발을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푸는 염천.
그의 제안은 타협이었다.
정파와 사파는 현재 전쟁 중이다.
직접적인 충돌이 거의 없고, 대규모 전투가 없기에 많은 이들이 까먹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단주급이 충돌한다?
다시 정사대전에 본격적인 불이 붙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타협. 타협 좋지. 대규모 전면전이 시작되면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잘 아는군. 널 보낸 무림맹의 노친네들도 그런 생각으로 보냈을 거다. 너는 딱히 수상전을 치른 전적이 없으니까.”
적당히 도시 근처에서 작업하는 수적 놈들이나 쫓아내고 적들을 향한 경고 정도만 하는.
딱 그런 수준을 기대하고 보냈겠지.
설천위도 뭐, 사실 그렇게 다르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수채를 하나씩 무너트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파와의 전면전을 다시 재개하는 시작점이 되고 싶진 않았다.
설천위의 계산대로라면, 수채가 얼추 정리될 즈음에 겨우 사천맹의 지원이 도착했어야 옳으니까.
그런데, 사천맹의 지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에 도착했다.
그것도.
“염천.”
“뭐냐?”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할래?”
“……나를 아나?”
“소문은 충분히 들었지.”
설천위의 대답에 잠깐 정색한 염천은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데도 내 앞에 섰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끝내 놔야 나중이 편하니까.”
“크하하하! 좋지! 그런 오만함 아주 좋아!”
광소를 터트린 염천의 몸이 단숨에 사라진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염천의 손이 설천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는다.
아니,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까깍!
염천의 손을 가로막은 설천위의 도(刀)가 강기와 맞물려 거친 소음을 냈다.
“후우…….”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와 이미 검게 물든 그의 도.
사파를 대표하는 살인마 중 하나.
염천이 죽인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힘든 전투광.
백절생사단주(百絶生死團主)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사천맹이 드디어 돌았구나?”
이 미친놈들이 제대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