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336화-수적도 사파지 (4)
“후.”
[아무리 너라도 피곤하긴 한가 보구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앓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눕는 설천위.
그 모습에 천마는 안쓰럽다는 표정이 아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끝나면 다행 아닌가.
[물 위를 그렇게 뛰어다니고도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
“헤엄을 못 치는 걸 어떡해요.”
[초절정이나 되는 무인이 자맥질도 못 하는 건 말이 되고?]
“흠흠.”
아니, 자맥질 정도야 하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떠 있는 거야 누가 못 하겠냐고.
제대로 된 속도로 헤엄을 못 쳐서 그렇지.
아니, 머릿속에 현대의 수영법도 대충 들어 있는데 왜 이렇게 헤엄치는 게 힘든지.
심지어 주로 사용하는 영력의 속성이 물인데.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을 바라봤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온 탓인지 이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저기 연무장에서 불살대가 악을 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다음에는 데려갈까?”
이번 잠행은 상태를 살펴볼 겸 안 데려갔지만, 가서 본 결과 솔직히 데려가도 될 것 같았다.
전부 다 데려가긴 힘들고, 적당히 인원을 나눠서 데려가면 될 것 같다.
반 정도는 여기 지점에 남아서 수련.
반은 실전.
나쁘지 않네.
‘문제는…….’
이 지점이다.
‘너무 약한데.’
수적들은 문제가 안 된다.
그놈들이 나름대로 칼밥을 먹고사는 놈들이라곤 해도 당장 집이 거덜 나게 생겼는데, 이쪽을 공격하겠는가.
문제는 시간이 지나서 사천맹의 지원이 왔을 때다.
아예 수적들을 지키거나 이 지점을 습격하는 형태로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지점이라고 해 봐야…….
‘대주급이 둘에, 중규모 대(隊) 정도의 크기로는 어림없는데.’
저쪽에서도 웬만해선 단주급이 움직이진 않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단 말이지…….”
[무엇이 말이냐?]
“단주급이 움직일 가능성이요.”
이쪽이 단주급이 움직였으니 저쪽도 단주급이 움직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곳은 물류가 흐르는 도시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도시는 아니다.
오히려 큰 도시는 강 건너편 사파의 영역에 있지.
사파의 비호 아래 대놓고 유흥과 향락을 중심으로 성장한 쾌락의 도시.
수적들이 뒈지든 말든 그쪽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수적들은 저 도시에 빌붙은 기생충 같은 존재.
그런 수적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단주가 직접 강을 건너 이곳으로 행차할 이유는 없었다.
없는데…….
‘씁.’
불확정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일단 백유.
정보가 적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사천맹에 들어간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휘하에 부하를 모아 차기 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에 참여하고도 남았을 시간.
문제는 그녀의 힘이 원작과 너무 다르다는 거다.
설천위가 흑룡학관에 갔을 때 어쩌다 보니 퍼 준 게 너무 많아서…….
‘최소 초절정, 잘하면 화경에 도달했을 수도 있고.’
화경이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경지라고 하지만, 진짜 재능을 가진 이들에겐 언젠가는 도달하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목표가 아닌 그저 통과점에 불과한 경지.
백유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니 화경에 도달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없는데…….
‘그럼 더 문제가 심각해지지.’
사파가 괜히 사파겠는가.
제 입에 넣으려던 것을 뒤늦게 찾아온 어린놈이 주먹질로 뺏으려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반드시 발악하는 놈들이 나온다.
거기다.
‘슬슬이지.’
사천맹주의 실종.
게임에서도 언뜻언뜻 떡밥 정도로밖에 뿌리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리 머지않은 건 확실하다.
사천맹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는 승냥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누군가가 움직였다면.
“충분히 올 만하지…….”
시선을 돌리기 위한 용도로 전쟁을 써먹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밥그릇의 크기가 조금 줄더라도, 남의 입에 들어가는 건 목숨을 걸고 막는 놈들이 바로 사파가 아닌가.
그래서 여태까지 사파가 정파에 눌려 살았던 거고.
그 질투와 이기심을 힘으로 찍어 눌러 모은 것이 지금의 사천맹주이니 그가 없다면 그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설천위의 고민을 들은 혼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느냐? 진짜 사천맹주가 자리를 비울지도 의문이구나.]
[만약 맹주가 없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정파에 시비를 걸면 어찌 될지 뻔히 보이지 않느냐.]
[사파 놈들은 이기적인 거지 멍청한 것은 아니다.]
무림의 공식 최강자들인 오존(五尊).
그중 셋이 정파이고, 둘이 사파다.
심지어 사파에 속해 있는 살존(殺尊)은 살수라는 직업 특성상 사파로 묶인 것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중립이라고 봐야 옳다.
괜히 이 넓은 중원에서 사파가 동남쪽으로 찌그러진 게 아니다.
현경급 고수의 숫자 비율이 3대1.
머릿수야 사파가 충분히 비벼 볼 만한 수준이지만, 상위 무인들의 숫자에선 큰 차이가 난다.
다만, 정파의 경우 그 전력이 흩어져서 각각의 문파에 틀어박혀 있다.
총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에도 사파가 나름대로 자리를 지키고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사파가 선공으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땐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항상 배가 고픈 구파일방도 대대적으로 움직일 명분이 생긴다.
정파가 제대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사파는 단숨에 위기에 몰린다.
하물며 설천위가 말한 가정대로 사천맹주가 없다면.
[결과가 너무 뻔하니 움직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구나.]
[사천맹주가 없다면 서로 밥그릇 싸움을 하기에 바쁘지 않겠느냐?]
“으음……. 그럴 것 같긴 한데요.”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영력을 채워 가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는 문제이긴 하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수적들을 털고 있다는 정보가 사천맹에 닿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정보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단주급이 움직일 리는 없으니 시간은 충분.
“일주일이면 충분하려나?”
* * *
장강에 자리 잡은 수채 중 하나인 적호채의 채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 세상에 미친놈들이 많다는 소리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자맥질로 들어오는 놈들을 못 막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잡한 나룻배에 몸을 맡기고 수채를 향해 돌진해 오는 놈들의 모습에 처음엔 기가 찼다.
관에서 자신들을 괜히 그냥 놔뒀겠는가?
급류가 흘러 정말 뛰어난 조종술이 없으면 쉽사리 오갈 수 없는 작은 섬에 괜히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숙련된 뱃사공조차 보이지 않는 저런 허술한 배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그의 예상대로 배는 급류에 휘말려 뒤집혔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섬으로 올라오는 놈들을 준비하고 있던 부하 놈들이 하나씩 해치워야 하는데…….
“끄악!”
전혀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뒤집히려는 배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내려 자맥질을 시작한 놈들은 거침없이 헤엄쳐 섬으로 올라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미리 잠수해 있던 수적들이 기습을 가했지만…….
“아미타불……!”
웬 중놈의 주먹이 차돌처럼 그 기습을 막았다.
그래, 한 놈 정도는 그럴 수 있지.
딱 봐도 겁나 강해 보이는 소림의 제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주먹에 힘을 빼서 상대한 부하 놈이 죽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럼 좋은 거 아닌가.
물론 그다음에 따라온 몇 놈들도 실력이 뛰어나서 처리하지 못했지만 괜찮다.
중요한 것은 상륙하면서 인원의 대부분을 잃는 거다.
그렇게 되면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고, 지친 적들을 자신이 나서서 밀어 버리면 된다.
그래, 그렇게 하면 쉽게 끝날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이 괴물 놈!”
그다음에 이어진 광경은 뭐란 말인가.
뭍으로 힘겹게 올라오는 적들을 향해 부하들이 던진 작살 전부가 검은 막에 가로막혀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떨어지고 있다.
당황한 부하들이 어깨가 빠져라 작살을 힘껏 던지고 있었지만, 우습다는 듯이 쉽게 가로막힌다.
대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흑룡단주!’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당황한 나머지 뒤늦게 돌아간 머리가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 이 근처에 와 있지 않은가.
심지어 다른 수채를 털기까지 했고.
그렇다면 이곳에 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적들도 그 괴물 놈이 데려온 부하들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적호채주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
‘도망치자!’
도망친다가 아니다.
부하들에게 말해서 뭐 하는가?
저놈들이야 싸우게 내버려 두고, 자신만 빠져나가면 된다.
노질이야 자신 있다.
아래에서 굴러먹던 짬이 얼만데.
저놈들이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충분히 도망칠 자신이 있다.
수채를 잃으면 다른 채주 놈들에게 개무시를 당하겠지만…….
그딴 것보단 살아남는 게 훨씬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거기다 여기서 본 정보를 가져가면 흑사채주도 나름대로 대우를 해 줄 거다.
잠시 흑사채에 몸을 맡겼다가 이 태풍이 지나가면 다시 자리를 잡으면 된다.
부하 놈들이야 새로 구하면 되니까.
빠르게 결정을 내린 적호채주가 슬쩍 뒷걸음질을 치던 바로 그 순간.
툭.
“응?”
등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무언가에 적호채주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 뒤에 기둥 같은 건 없을…….
“어허, 우두머리가 이렇게 빨리 도망칠 생각부터 해서야 되겠어?”
“이, 이, 이……!”
“뭐야, 적호채주가 벙어리라는 정보는 없었는데.”
고개를 돌린 순간 보인 입꼬리를 비튼 미남의 얼굴에 적호채주는 반대로 뒷걸음질 쳤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황했지만, 그 머리는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흑룡단주? 대체 단련을 얼마나 했으면? 아니, 도망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의 몸에 부딪혔는데, 기둥에 닿은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재빨리 지워 낸 적호채주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건 못 이긴다.
지금 섬에 상륙한 놈들은 아직도 그쯤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잡았다고?
이런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당황해서,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땅을 박찬 적호채주는 이내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뭔가 목을 꽉 하고 쪼이는 것 같은 답답함.
그래, 마치 뒷목이 잡혀서 허공에 들린 것 같은…….
“어딜 가고 그래?”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자신의 발에서 느껴지는 공허함.
그것에서부터 자신의 감각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은 적호채주의 얼굴이 단숨에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이 괴물 놈이 자신의 뒷덜미를 붙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린 거다.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도망치려는 자신의 뒷덜미를.
“사, 살려……!”
“에헤이. 안 죽여, 안 죽여.”
허공에 들린 채 손을 모으고 애걸하는 적호채주를 땅바닥에 던지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괜히 불살(不殺)을 허락한 게 아니거든.”
정말, 정말로 힘든 방식이지만 불살(不殺)을 걷는 무(武)의 길이란 것이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활인권(活人拳)이라고 하지.
이 무림에는 참으로 희박한 개념이지만, 천희가 살았던 시대의 무(武)에서는 흔한 개념이다.
자신을 갈고닦는 자기 수양.
약자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최소한의 제압.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법과 도덕의 범주 안에 녹아든 무예들에 담겨 있는 것이 바로 활인권의 개념이다.
무해에게 알려 줬을 때 참으로 감명받은 듯 보였던 개념.
그런데 말이다.
의외로 이 활인권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안전이 아니다.
자신과 약자를 지키는 것.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지켜야 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끄아아아악!”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지켜 줄 이유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죽이진 않는다.
“내, 내 단전이!!”
단지 더 이상 강자가 아니도록 만들 뿐.
일류급 정도 되는, 나름대로 행동대장처럼 보이던 무인이 무해의 주먹에 의해 부서진 단전으로 인해 피거품을 물고 발작했다.
강자로 살든 약자로 살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활인(活人)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