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335화-수적도 사파지 (3)
“끄아악!”
비틀린 손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천호채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부러졌다.
확실하다.
아파서 부리는 엄살이 아니었다.
엄습하는 끔찍한 통증과 손끝에 제대로 닿지 않는 감각이 바로 그 증거다.
“에이, 엄살은.”
‘빌어먹을 놈!’
손목을 부러트려 놓고 엄살이라니!
제대로 치료를 못 하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될 수도 있는 큰 부상인데!
히죽히죽 웃으며 손목을 놓는 설천위를 보며 두 눈을 부릅뜬 천호채주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하들의 보고는 물론이고 비명도 없었다.
대놓고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소리.
흑룡단주는 뛰어난 술사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환술에 당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뭔 상관인가.
어느 쪽이든 자신의 목숨이 태풍 앞의 등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다만, 유일한 위안거리는 눈앞의 괴물이 이곳까지 오면서 혈로(血路)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쪽을 토벌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밖에서부터 전멸시키면서 왔겠지.
보통의 적이라면 배를 타고 도망치면 되니 그러면 고마운 수준이지만.
눈앞의 괴물은 강 한가운데서 배를 나포할 수 있는 놈이다.
도망치는 배를 침몰시키는 것 따윈 일도 아닐 터.
그런데도 이런 방식을 취했다는 것은…….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천호채주.
바로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천호채 인간들은 눈치가 빠르고 좋네? 여기 위치를 알려 준 녀석도 눈치가 아주 빨랐지.”
‘개놈의 새끼들! 채의 위치까지 불어 버린 거냐!’
어쩐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곳을 설천위가 벌써 찾아왔다 싶었다!
가볍게 입을 연 부하들을 욕하며 천호채주는 애써 표정을 다스렸다.
“이렇게 날 찾아왔다는 것은 원하는 것이 있어서겠지?”
고통에 절로 식은땀이 흐르지만, 천호채주의 목소리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다운 모습.
“뭐,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의연한 모습 따위 설천위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 건 앞으로 할 대화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까.
“너희와 거래하는 놈들에 대한 정보, 다른 수채의 위치, 딱 그 정도만 말해 주면 돼.”
“……개소리하지 마라.”
시작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줄이야.
설천위의 요구에 천호채주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정보를 발설했다간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도 결국 죽는다.”
“에이, 말 안 하면 어차피 죽을 텐데?”
“흥, 차라리 네놈의 손에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은 죽음이 찾아오겠지.”
다른 수채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래를 튼 놈들도 인간이라고 하기 힘든 놈들이다.
강함을 떠나,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이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괴물 놈들이다.
배신의 정황이 드러난 순간, 끔찍한 고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터.
증거도 필요 없다.
놈들은 정황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쓸 놈들이니까.
그러니…….
“차라리 죽여라.”
“이야, 독하네.”
부러진 손목을 움켜쥔 채 두 눈을 부릅뜬 천호채주의 모습에 설천위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독해. 근데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
씩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의 손이 천호채주의 어깨에 닿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부러진 팔의 소매에서 작은 비수를 꺼낸 천호채주가 달려들었지만.
[크르르르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설천위의 가슴께에 나타난 패융에게 너무나도 간단히 막혔다.
그렇게 천호채주의 마지막 발악조차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낸 설천위는 그대로 채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내가 깔끔하게 죽여 줄 거라고 누가 그러디?”
비틀린 미소와 함께 어깨로 스며드는 기이한 기운.
내공과는 다른 그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천호채주는 깨달았다.
여태까지 자신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던 것은.
‘괴, 괴물……!’
눈앞의 괴물이 허락해 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깨에서부터 스멀스멀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입조차 뻥긋할 수가 없었다.
손발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버린 지 오래였고, 호흡조차 멎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인식할 여유가 없었다.
“끕!”
열리지 않던 입을 뚫고 목소리가 올라온다.
하지만 그것조차 억눌려 사라진다.
지금 당장 비명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고 싶은데도.
“자, 맨 정신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남지 않았으니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야.”
지옥에서 죄인을 벌하는 옥졸이 저리 웃지 않을까.
그런 섬뜩한 미소와 함께 천호채주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 * *
“끅! 끅!”
숨이 넘어가는 소리.
바닥에 질질 끌리는 몸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런 자잘한 상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당사자도, 그 처참한 몰골을 보고 있는 군중도.
“제, 제발…….”
사지 중 어느 곳도 잘리지 않았는데도, 마치 사지가 잘린 것처럼 경련을 반복하는 사내.
그런 사내는 누군가에게 묶인 채 끌려가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 처참한 모습에 한바탕 난리가 났고.
“머, 멈추십시오!”
포쾌들이 나타났다.
시내 한복판에서 사람을 질질 끌고 가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
하지만, 나타난 포쾌는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신중히 단어를 선택하지 않으면 그대로 자신의 삶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너무 컸다.
“사, 상황을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상대의 명성을 믿고 포두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흑룡단주님!”
포두의 호칭에 구경꾼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허리에 찬 검과 도에 짐작만 하던 이들은 이내 흥미진진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을 흑룡단주가 이렇게 대낮에 사람을 짐짝처럼 끌고 다니다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한 구경꾼들의 눈에 흥미가 돌기 시작할 때, 그 시선의 중심에 선 설천위는 웃으며 사내를 내밀었다.
“천호채주를 잡아왔습니다. 마침 잘됐군요. 이대로 넘겨도 되겠습니까?”
“처, 천호채주란 말입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킨 포두는 바닥에 쓰러져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저 초라한 사내가 정녕 천호채주란 말인가.
듣자 하니 실력이 거의 절정에 이른 무림의 고수라고 했는데…….
아니, 그 전에 천호채의 위치를 알아채고 그곳에 쳐들어가는 게 가능은 한 일인가?
여태까지 정파나 관이 괜히 수채들을 토벌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 넓은 장강에 익숙해져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은 수채는 절대 상대하기 쉬운 적이 아니었다.
하물며 수상전에 특화된 그들과의 전투는 그 자존심 높은 대문파들조차 꺼리지 않는가.
그런데 얼마 전에 상선으로 위장한 배 하나를 통째로 잡아온 것도 모자라서 며칠 만에 채주까지 잡아오다니.
“아, 뭐 반항은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럴 상태는 아니라서.”
포두가 떨면서 움직이질 않자, 설천위는 웃으며 포쾌에게 다가가 자신이 쥐고 있던 끈을 넘겼다.
“그럼 저는 해야 할 일이 좀 더 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 예!!”
“처형은 빨리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대소변도 못 가릴 거라서 관리가 어려워질 테니까요.”
가볍게 웃으며 섬뜩한 말을 내뱉은 설천위는 그대로 포두를 뒤로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설천위가 있을 때도 시끄럽던 거리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처럼 변했다.
혼란과 경악으로 가득한 거리.
그 속에서 설천위가 넘겨준 끈을 꽉 쥐고 있던 포두는 고개를 내려 천호채주를 쳐다봤다.
눈물은 물론 콧물과 침까지 질질 흘리고, 넋이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사죄를 반복하는 모습.
질질 끌려오며 헤진 옷 사이로 훤히 드러난 상체에는 보는 것조차 무서운 문신이 박혀 있었다.
흑룡 문양.
과연 사파다운 문신이라고 할 만했지만, 가만히 바라보던 포두는 이내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니.
‘이거 문신이 아니라…….’
흑룡의 문양 밑에 다른 형태의 문신이 보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문신을 덧칠하는 머저리는 없다.
즉.
‘저, 저주인가?’
술사라더니 정말로?
떨리는 손으로 끈을 한 번 더 움켜쥔 포두는 이내 두 눈을 꽉 감았다.
“돌아간다!”
“예? 하지만…….”
“천하의 악인이다! 이대로 복귀한다!”
본래라면 일으켜 양쪽에서 부축해 제 발로 걷게 했을 터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저 저주일지도 모른 문양에 손을 댈 용기가.
* * *
“화려하게 저질러 줬군.”
흑사채.
무혈시 주위로 흐르는 장강을 주름잡는 수채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수채.
서와 동으로 떨어진 장강수로십팔채 중에서 동쪽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흑사채에 지금 동쪽에 있는 수채들의 채주들이 다 모였다.
이유와 목적은 단 하나.
설천위의 행보에 대한 대처다.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정녕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 것인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거칠게 탁자를 내려치는 주먹.
거칠기 그지없는 수채의 주인들이 그러고 있으니, 따라온 부관들은 안색만 한층 더 창백해졌다.
이러다가 사소한 의견 충돌이라도 생기면 그 자리에서 피를 볼 수도 있는 인간들이 아닌가.
“진정들 하게.”
그렇기에 흑사채의 채주가 말을 꺼냈을 때, 부관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채주들이 난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의 논리가 안 통하는 인간들은 아니다.
흑사채주가 회의를 주도한다면, 그리 험악한 분위기로 흘러가진 않을 거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가지. 천호채주가 입을 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쪽의 위치는 전부 들킨 상태라는 건가.”
“그렇겠지. 그리고 천호채주가 잡힌 걸 봐선 아마 강을 건널 방법도 있을 거다.”
“무림맹 놈들……. 배를 숨겨 놨던 건가.”
놈들이 가지고 있는 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악문 채주들의 반응에 흑사채의 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다. 아마 작은 크기의 빠르게 이동하기 좋은 배겠지.”
“음험한 놈들.”
“정파 놈들, 뒷주머니 차는 솜씨는 여전하군.”
설천위와 무림맹을 향한 욕이 계속해서 튀어나왔고, 이내 회의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러가자 흑사채주가 그 흐름을 끊었다.
“그만! 파악이 늦은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건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다.”
앞으로의 대책.
그 말에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기도 힘든 방식으로 수채를 습격해 채주를 잡아간 놈이 적인데.
대체 무슨 수로 그와 맞선단 말인가?
무림맹의 단주라면, 그 무공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소린데.
이곳에 있는 채주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초인이다.
그런 채주들의 반응을 읽은 흑사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말해 우리들로서는 맞서기 힘들지.”
“흠흠, 강 위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도…….”
“뭐가 됐든 아랫것들이 덜 죽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소?”
흑사채주의 말에 다른 채주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내용의 공통점은 ‘도망치자.’였지만.
돌려서 말하고 있을 뿐, 애초에 싸울 생각 자체를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아니,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럼 앞으로 우리의 영업에 누가 순순히 돈을 내겠소?”
“그럼, 어쩌겠다는 소리요?”
“놈이 나타난 첫날, 이미 사천맹에 도움을 요청했소이다.”
“……그렇다면?”
“응했소.”
입꼬리를 올린 흑사채주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다른 채주들을 향해 말했다.
“사천맹이 우리를 도울 거요.”
“오오! 그럼 할 만하지!”
“맹에서 와 준다면…….”
긍정적인 반응.
그 반응에 만족한 흑사채주는 다른 채주들에게 사천맹이 왔을 때 제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당부한 후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렇게 모든 채주들이 떠나고.
“하늘이 준 기회로구나.”
홀로 자리에 앉아 있는 흑사채주의 눈이 붉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