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332화-무형의 증거 (5)
“단주님!”
조용히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던 무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한껏 흥분한 얼굴로 찾아온 부하.
“흑룡단주가 또……!”
요 며칠간 자주 듣는 단어.
흑룡단주.
얼마 전에도 그의 이름으로 시끄러웠는데.
이번에도 부하가 저리 야단법석 떠는 것을 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이번에는 어딘가요?”
“재백대입니다!”
재백대.
대주가 분명…….
‘구주환이었던가요.’
자신과 눈을 마주치면 항상 사람 좋게 웃던 사람.
부단주나 다른 대주들의 평도 좋다.
다만, 거기까지일 뿐.
그가 뇌물을 이용해 적수단의 휘하로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 뇌물을 받아먹은 사람이 눈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부단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곤륜의 일대제자, 선현.
적수단의 두 부단주 중 하나로, 곤륜 출신답게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곤륜에서 나와 아무런 방해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보니…….
“우리 적수단을 얕보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습니다!”
유흥에 깊이 빠져든 것이 문제였다.
지금도 보라.
자신에게 돈을 대 줘야 할 이들이 이번 사건으로 크게 움츠러들었다.
장기적으로 봐도 그의 주머니 사정에 큰 타격이 올 터.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이렇게 찾아오는 이유가 너무도 뻔히 보이지 않는가.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속내를 숨기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도가의 제자라는 사람이.
‘아미타불…….’
불호를 속으로 되뇌며 무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단주, 이리 찾아왔다는 것은 재백대주도 자백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
말을 잇지 못하는 선현.
그 모습에 확신을 얻은 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불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단주님!”
선현의 강한 반발에도 무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내부의 첩자를 잡아 준 일입니다. 맹주령으로 흑룡단주의 권한이 인정되고 있는 이상, 불만은커녕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크윽.”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숙이는 선현.
무진의 강경한 태도에 그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무진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방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선현은 알고 있었다.
단주(團主)란 그런 존재이니까.
단순한 지위가 아닌 힘의 증거이기에 같은 급의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압박도 할 수 없다.
‘빌어먹을!’
그렇기에, 앞으로 텅 비어 버릴 자신의 주머니를 생각하면 열불이 터져도 선현은 이를 악물고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단주 앞에서 화를 낼 순 없으니까.
여태까지 자신이 안하무인으로 단주에게 대들듯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선현은 분노하고 있었다.
적수단이라는 이름값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찔러 주는 돈이 얼마였던가.
그런데 이제 그 돈줄이 딱 막히게 생겼으니…….
술자리에서 주무를 수 있는 엉덩이의 숫자가 반 토막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아미타불.”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며 화를 삭이는 선현의 모습에 무진은 결국 한숨처럼 불호를 뱉었다.
어찌 이리도 속물적인지…….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호통이라도 쳐서 정신을 차리게 해 주고 싶지만…….
구파일방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수가 아니다.
지금은 선현이 자신의 부하이지만, 이 넓은 무림에서 소림과 곤륜은 친구가 아닌가.
결국 작게 고개를 저은 무진은 얼마 전에 다른 단주들과 협의한 사항을 슬쩍 흘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러니 안을 다스리는 데 더욱 신경 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슬쩍 흘린 정보에 희희낙락하며 나가는 선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주들의 회의에서도 그들의 뜻에 크게 동조하지 않았던 무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구파일방은 여전히 강하고 거대하지만, 그 지위가 여전히 무림의 태산이라고 볼 순 없었다.
사파는 그 기세가 거칠기 그지없고.
음지에서 암약하는 적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다.
언제까지고, 자신들의 뱃속만을 채울 생각이라면…….
‘아미타불……. 변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
그 변화가 어떤 방향일지는 모르겠으나.
변화를 두려워하다간 결국 도태될 뿐이다.
그렇기에 무진은 막내를 말리지 않았다.
‘……무해야.’
막내야.
너는 변화의 중심에 서거라.
언젠가 소림이 태풍에 휩쓸릴 때.
그 중심에서 소림을 붙잡아 다오.
가장 험한 길만을 걸어가다가 어느새 흑룡의 등에 올라탄 막내를 떠올리며 무진은 다시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 * *
“역시 너무 빨리 움직였을까요?”
“아니, 괜히 뭉그적거렸다간 오히려 때를 놓쳤을 거야.”
흑룡단주의 집무실.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문서를 바라봤다.
“그래도 꽤나 급했나 보네.”
“넷이나 정리했으니까요.”
“많긴 했지.”
고작 사흘에 넷이라.
빠르게 정리하긴 했어.
단주들이 움직일 만했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였네.”
가만히 문서의 내용을 훑으며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얼마나 급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 굼뜬 인간들이 이렇게 빠르게 일 처리를 했으니까.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맹주는 그저 던졌을 뿐이네요.”
설천위의 앞에 놓인 공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파견.
뭐, 사실 말이 파견이지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사파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대충 상황을 보다가 안정되면 돌아오는 거다.
다만 그냥 임무라는 표현 대신 파견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상황에 따라 장기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파 쪽의 낌새가 계속 심상치 않으면 거기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뭐, 당연히 단주급이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해 봤자 부단주 정도?
그런데 이렇게 직접 단주에게 움직이라는 명령이 내려온 건 맹주의 허가가 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니, 직접 허락하진 않더라도 눈감아 주긴 했을 거다.
단주들이 명령을 내리는 준명당(峻命堂)에 압력을 넣는 것을 맹주가 모를 리 없으니까.
그러니 맹주는 입장을 확실히 한 거다.
설천위가 날뛰니 권한은 줬지만, 자신의 품으로 안은 것은 아니다.
단주들은 맹주가 저리 움직이니 혼란에 빠졌겠지만…….
“참, 독한 양반이야.”
대충 맹주의 성향을 알고 있는 설천위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맹주가 무슨 의도로 구파일방이 반발할 저런 행동을 하고도 설천위를 외면하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들킨 것 같단 말이지.”
턱을 괴고 앉은 설천위는 조용히 자신의 뒤쪽에 떠 있는 현태중을 바라봤다.
충분히 알아챌 만하다.
현태중이 악령으로 잠들어 있던 구교사의 상황이야 맹주라면 어떻게든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테고.
설천위가 그곳을 정리했다는 것도 알아내기 어렵지 않을 거다.
거기다 최대한 맹주 앞에서는 숨겼지만,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설천위의 검법까지.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다고 순순히 휘둘리는 칼이 될 생각은 없는데.”
현태중의 원한.
권한을 쥐어 주면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칼을 휘두를 거라고 생각했겠지.
뭐, 실제로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휘두를 생각이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맹주의 술수에 놀아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당장 무림맹의 힘을 깎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잡아들인 놈들은 전부 진의단이 심어 놓은 첩자들이다.
사파와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뒤통수를 치고 무림맹의 전력을 크게 깎아먹을 놈들.
화경급 고수는 없더라도 약물과 외부에서 빌린 술법을 이용해 단주조차 죽일 수 있는 놈들이다.
처리할 수 있을 때 처리하는 게 맞다.
그래서 맹주에게 받은 권한을 바로 사용한 것이고.
게임 속에서 봤던 정보들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여하튼.
이 정도 했으면 됐다.
이 이상 무림맹의 내부를 휘저을 필요는 없다.
걸러 내야 할 놈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단주들은 그냥 으레 있는 사파의 도발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쪽을 보내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아닐 확률이 높다.
선택에 따라 그 시기가 뒤죽박죽 바뀌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파의 내분.
정확히 말하면, 반란이다.
게임 속에서 사파가 분열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사존의 실종.
백유의 급성장.
이 두 가지가 사파가 갈라지는 이유다.
백유와 함께 후계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이들이 백유의 급격한 성장에 긴장한 상황에서 사존이 실종된다.
당연히 눈치 볼 사람이 사라진 후계자들은 각자 세력을 이끌고 다툼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가 흐른다.
내부에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래서 사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인물은 외부로의 공격을 감행한다.
전력을 깎더라도 내부 결속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제는.
‘혈교, 혈사련은 당연히 한 숟가락 하고 있을 거고, 황실이 어떤지가 문제네…….’
원래라면 사파가 일방적으로 발려야 할 전쟁이 팽팽하게 유지되며 장기화되는 이유다.
거기다 사파가 전쟁을 걸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북진하진 않는다.
본인들도 목숨이 아까우니까.
당연히 무림맹도 그렇게까지 전력을 퍼붓지 않고.
그 결과, 사파와 정파는 거의 게임 후반까지 전쟁 상태를 유지한다.
‘문제는 백유의 행방인데…….’
머지않은 전쟁의 시발점.
그 시발점은 백유의 행보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따라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쯧, 고민해 봐야 답은 안 나오지.”
사천(邪天) 백유(白柳).
아직은 먼 미래지만, 머지않아 그 이름을 손에 넣을 사람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응?”
그야 마음에 안 들지?
사파가 지금 전쟁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백유, 그 여자군요.”
“어?”
“그 여자를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네요.”
“아, 아닌데?”
“아니면 상관없지만…….”
지, 진짜로 아닌데?
아니, 목소리를 떠니까 진짜 같잖아.
살짝 당황한 설천위가 헛기침을 하는 사이, 살짝 가늘게 눈을 뜨는 유예린이 손을 뻗어 설천위의 어깨를 짚었다.
“최근에 깨달았지만, 전 질투심이 꽤 강한 것 같아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
‘……진짜네?’
섬뜩한 느낌에 살짝 내려본 가슴 앞.
묘하게 반짝이는 금속의 감촉에 설천위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쿡, 장난은 이 정도로 할까요.”
날카로웠던 기세를 거두고, 설천위의 어깨에서 손을 뗀 유예린은 웃으며 거리를 벌렸다.
“단의 업무는 제가 맡을 테니 설공자는 파견의 준비를 해 주세요.”
“으응.”
살짝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를 향해 빙긋 웃은 유예린은 그대로 단주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긴장했지?”
이런 사소한 감정에는 [부동심] 스킬이 작동을 안 하나?
……뭔가 노려지는 것 같아서 오한이 들기도 하고.
* * *
“아우, 내가 못 살아!”
“꺄하핫! 지금 그런 말을 하면 말이 씨가 된다고!”
거침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놀리는 대장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던 여미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는 거예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긴 나 때문이지!”
“아우! 말이라도 못하면!”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여태까지 죽인 적의 숫자를 봐서라도 용서해 줬을 텐데!
거칠어진 숨을 최대한 고르며 여미려는 최대한 전황을 살폈다.
수십 구의 시체.
적의 시체만 있는 건 아니다.
백유의 활약 때문에 적의 시체가 압도적으로 많긴 하지만.
‘머릿수에서 너무 밀려.’
오랜 시간 기반을 다져 온 다른 후계자들과 이렇게 맞붙는 건 역시 너무 시기상조였다.
백유이니 무언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판단해 따라왔지만…….
‘배신자가 안 나온 게 용할 정도네.’
그 정도로 백유만의 매력이 있다는 소리지만.
그 뒤를 따라가는 것도 슬슬 버겁다.
백유는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지만.
‘……이미 늦었지.’
백유랑 함께하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각오하지 않았던가.
한숨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여미려가 머릿속을 흐트러트리는 잡생각을 떨쳐 내려는 그때.
“좋아. 도망칠까?”
“……네?”
백유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단어의 등장에 여미려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아무래도 잡종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아.”
적들을 살피는 백유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는 것과 함께 그녀의 앞을 가로막던 적들이 찢겨 나간다.
“계산과 달라. 정보부터 다시 모아야겠어.”
아무래도 걔를 좀 만나 봐야겠어.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핥으며 백유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목표는 북쪽.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