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331화-무형의 증거 (4)
낙인(烙印).
설천위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이 기술은 시스템으로 얻은 스킬이 아니었다.
첫 발현은 언여휘와의 전투 때.
인형을 이용해 공격하는 그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혼에 패기와 영력을 때려 박은 결과.
의도한 적 없이 얻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 뒤로 가끔 자신의 패기와 영력을 혼에 강제로 때려 박으면, 혼이 그것에 침식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딱히 기술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말 그대로 무식한 침식.
그 과정에 패융의 영향이 있는지 혼에 새겨진 낙인이 육체에 투영되며 용의 문양이 떠오른다.
“끄아아아아악!”
지금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는 정백의 목을 타고 검은 용이 일렁인다.
발버둥치며 흐트러진 옷 때문에 훤히 드러난 상체 또한 용의 몸에 휘감긴 상태.
“크헉!”
이윽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호흡조차 버거워졌는지 마른 숨을 토해 낸 정백의 몸이 축 늘어졌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은 설천위는 무림맹주를 바라봤다.
“다만, 오래 살진 못할 겁니다.”
담담하게.
“뒷돈이나 챙기는 나약한 정신력으로 오래 버티진 못할 테니까요.”
머지않을 그의 죽음을 예고한다.
기절한 지금도 고통에 몸이 움찔움찔 경련하고 있는 상태다.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압도적인 고통에 발악하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육체의 고통만이라면, 견뎌 낼 수 있을 거다.
익숙해지니까.
아프다는 것을 알면, 이를 악물고 참을 수 있다.
명색이 무인인데 그것도 못 하겠는가.
하지만, 혼의 고통은 다르다.
결코 익숙해지지도 않고, 단련된 육체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오로지 정신력.
그것 하나만으로 버텨 내야 한다.
정백에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태도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단주의 행동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바, 그가 선검단 부단주를 향해 공격한 죗값은 근신 일주일로 정한다.”
맹주의 판결.
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 이상 말할 이유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한.”
하지만 이어지는 맹주의 말이 설천위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번 사건으로 구단(九團)의 나태함과 부패함이 드러난 바, 이를 밝혀내고 정화하기 위해…….”
갑작스러운 발언.
구단 단주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흑룡단(黑龍團)과 흑룡단주(黑龍團主)에게 구단(九團)의 감찰 권한과 현행범에 한해서 즉결 처분권을 부여한다.”
“맹주!”
“그게 대체 무슨……!”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결정.
단주 회의를 수십 번을 해도 모자랄 중대 사안을 이런 자리에서 저리도 독단적으로 말을 꺼내다니.
단주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맹주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맹주가 들어 올린 손에 쥐어져 있는 하나의 패(牌).
‘맹주(盟主)’라는 글자가 새겨진 패에 단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는 맹주령(盟主令)으로 정한 일이며, 이는 본 맹주가 맹주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까지 유효할 것이다.”
맹주령(盟主令).
그 말에 단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무림맹이라는 거대 연합 문파의 우두머리 자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
원래는 전시에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최후의 제어장치.
맹주가 임기 중 단 세 번만 사용할 수 있고, 그 결정은 절대적이다.
여태껏 거대 문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단 한 번도 맹주령을 사용한 적이 없었던 맹주다.
그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맹주령을 하나 소모해 버린 것에 단주들의 미간이 깊어졌다.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설가(雪家)가 맹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인가?’
순식간에 불편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는 단주석.
설천위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발길을 멈추고 가만히 맹주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
“흐하하하하하!”
호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일어섰다.
“그거 좋네요.”
상쾌하게 입꼬리를 올린 남궁선의 말에 맹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창천단주도 그리 생각하니 다행이군.”
“뭐, 전 상관없지만요.”
자신의 검 위에 손을 올리며 남궁선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썩어 버린 손가락을 스스로 자를 정도의 강단은 있거든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남궁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부단주가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남궁선을 시작으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 단주들이 그 자리를 떠나자, 대연무장은 빠르게 혼란에 빠졌다.
맹주가 자리를 뜨지도 않았는데, 단주들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나 보군.’
남궁선의 저런 행동에 다른 단주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을 보면.
물론 중간에 눈을 마주친 성화린은 웃고 있었지만.
뭐, 상관없나.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허허, 그러게. 내 자세한 사항은 추후에 공문으로 보내 주겠네.”
“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뜨는 설천위.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맹주도 이내 자리를 떠났다.
중요 인물들이 전부 떠난 대연무장.
구경을 위해 왔다가 폭탄선언을 들은 무림맹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 * *
“영감탱이가 너무 교활해.”
“선아, 그런 저급한 단어는 쓰지 말라니까.”
늦은 밤.
흑룡단주의 집무실.
그곳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안주를 집었다.
“그걸 주도한 누님이 할 말이에요?”
“그 자리를 길게 끌고 가도 좋을 게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남궁선의 당당한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맞긴 하지.
괜히 거기서 언쟁이 계속되어 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고립되어 버렸군요.”
설천위의 옆에서 그에게 차(茶)를 따라 주던 유예린의 말에 남궁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흑룡단을 견제하겠지.”
구단(九團)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나 그 힘과 권세가 전부 동일하진 않다.
당연한 일이다.
인재가 잘 들어오는 해가 있으면 없는 해도 있다.
인재를 허무하게 잃는 경우도 많다.
그 무력 수준의 변동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구단(九團)이 그 크기와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거대하기 때문이다.
인재라고는 해도 목숨이 아까운 젊은이들.
조금이라도 더 생존율이 높은 곳으로 향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아무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 수가 많다고 해도 단(團)의 인원 전부를 자신의 사람들로만 채울 순 없었다.
주로 구파일방의 제자들로 구성되는 선검단(善劍團)이나 적수단(赤手團)조차 외부인이 끼어 있다.
가주 혹은 가문의 직계가 직접 나서서 단(團)을 맡는 패력단(覇力團), 창천단(蒼天團), 암은단(暗隱團), 만독단(萬毒團)은 오히려 과반수가 외부인이다.
본가를 지키는 인원을 전부 무림맹으로 끌고 올 수는 없으니까.
구파일방이 겨우 두 개의 단에만 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거대 세가는 왜 이렇게 단을 주도적으로 이끌까?
당연히 이권 때문이다.
무림맹 구단(九團)의 단주(團主)라는 이름값.
임무와 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
당연히 그 이익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그리 당당하지 못한 일들도 있으리라.
정백처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횡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찜찜한 수익이 있을 터.
그런데 감찰 권한이라니.
설천위의 얼굴이 보기 싫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그래도 아예 대놓고 적대시할 이유는 없지 않아?”
괜히 적대시했다가 감찰이라도 당하면 서로 좋을 게 없을 텐데.
“언니, 그게 또 얘기가 복잡해진단 말이죠.”
성화린의 물음에 남궁선은 한숨과 함께 설천위를 바라봤다.
“얘는 설가(雪家)의 막내잖아요.”
“아.”
관련된 행동을 아예 안 하니까 까맣게 잊고 있었네.
“설가(雪家)가 본격적으로 이권을 나눠 먹으려고 무림맹에 들어오면 큰 위협이죠.”
신흥삼가.
그중에서 섬서유가는 암은단이라는 형태로 무림맹에 자리를 잡았다.
정보의 입수와 은밀 행동에 특화된 음지의 수호자.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렇게까지 크게 이권에 관여하지 않는다.
정보를 다루고 있는 위치의 위험성을 알기에 굳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
그저 구단이라는 이름값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설가는 다르다.
호남이라는, 정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지역을 통째로 먹어 버린 괴물.
괴물들이 아니다.
문파의 힘으로 먹어 치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존(北尊) 설주철.
설천위의 아버지이자 현 무림의 최강자인 오존(五尊)의 일인.
오존의 일인이 무림맹의 이권에 손을 뻗으려 하면 구파일방이나 다른 거대 세가에겐 크나큰 압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맹주와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도 벅찬데, 거기에 현경급 고수가 하나 더?
압박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하물며 맹주가 만약 북존과 손을 잡은 거라면?
“아니라고 말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듣겠죠?”
“뭐, 그런 인간들이니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궁선은 술잔을 내려놨다.
“그래서, 동생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음…….”
히죽 웃는 남궁선의 눈빛에 가만히 턱을 쓸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손에 쥐어진 칼이라면 일단 휘둘러 보는 게 무인 된 도리 아니겠어요?”
* * *
“일이 복잡하게 됐군.”
“동지들의 죽음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어선 안 된다.”
적수단(赤手團) 휘하의 거령대.
본래 독립된 형태의 대로 시작해 실적을 쌓다가 적수단의 휘하로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약 열흘 전에 벌어졌던 선검단 습격 사건.
그 습격을 일으킨 자들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무림맹에 파고든 첩자.
선검단 습격 같은 임무를 위해 그동안 몸을 숙이고 있었던 이들.
상황이 변하며 과격하게 임무를 진행한 준의대와 달리 한껏 몸을 낮추고 숨을 죽이고 있는 이들.
무림맹에 혼란이 찾아왔을 때, 뒤에서 그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다.
때를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대, 대주님!”
그런…….
“무슨 일이냐!”
그림자에 숨은 곳인데…….
“흑룡단이다!”
대체 어떻게…….
“너희들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흥! 발뺌해도 소용없다!”
거칠게 건물 안으로 들어온 흑룡단은 즉시 수색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방문에 마른침을 삼키던 거령대주는 이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증거 따윈 없다.
진정한 정의를 위해 부패한 무인이라는 치욕조차 감내하고 있지 않은가.
부정부패의 증거는 찾을 수 있어도, 자신들의 뿌리와 연결된 증거는 찾을 수 없…….
“이놈들! 이러고도 네놈들이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냐!”
“그게 무슨…….”
당연하다는 듯 연무장으로 끌려온 거령대주는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소각했을 지령이 어째서……!
아니.
“이, 이건 조작이오! 우리는 모르는……!”
일단 잡아떼자.
저 지령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발뺌하면……!
“끄아아아아악!!”
순간 옆에서 들려 온 비명에 거령대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처절한 비명.
그야말로 생의 모든 것을 토해 내는 것 같은 그 비명은…….
“마, 맞습니다! 저, 저희는 진의단에서……!”
“이, 이 비겁한 배신자 놈아!”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는 거령대.
그 속에서 대주는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
그 눈을 마주하니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확신을 실행으로 옮길 명분이 필요할 뿐이었다.
“거령대주는 순순히 입을 여는 것이 좋을 것이야.”
흑룡의 입꼬리가 흉악하게 비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