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330화-무형의 증거 (3)
갑작스러운 증인들의 등장.
거기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에 정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정백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맹주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자, 다들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게. 자네들이 무슨 이유로 이 자리에 섰는지를.”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기세로 그저 증인들에게 말을 걸 뿐.
현경급 고수가 뿜어내는 노골적인 기세에 증인들은 몸을 흠씬 떨었다.
고작해야 일류에서 이류 수준의 무인들.
하물며 뇌물 따위로 보신을 노리던 작자들이다.
그들에게 맹주의 기세를 견뎌 낼 정신력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저, 저는…….”
그렇기에 누구 하나가 입을 연 순간, 대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정백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것을 대가로 무엇을 얻었는지.
사소하게는 작은 귀금속부터 많게는 묵직한 금괴까지.
상당한 양의 돈이 정백의 주머니에 들어간 건 물론이고, 술과 여자까지 접대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도사인 정백에게 말이다.
“내, 내가 언제……!”
물론 중간에 정백이 악을 쓰며 말을 끊으려 했지만, 정백이라고 맹주의 기세를 이겨 낼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맹주의 강렬한 눈빛과 기세에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증인들의 폭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만.
엄청난 폭로 내용과 달리 주위의 분위기는 그리 소란스럽지 않았다.
“주루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그때였나 보구먼…….”
“객잔에서 크게 돈을 쓰는 걸 봤는데, 역시 쯧쯧.”
알 만한 이들은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증거가 없어서 의심만 하고 있었을 뿐.
물론.
“어, 어찌 도사가!”
“허어, 부단주라는 사람이…….”
그런 더러운 면을 잘 모르던 이들은 경악하고 탄식했지만.
그야말로 무림맹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치부가 까발려지는 순간.
감정을 다스리는 데 실패한 정백의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어 땅을 향하고 있었다.
수치와 분노로 붉게 변한 얼굴.
그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마지막 사람의 증언까지 끝났다.
“선검단 부단주, 정백.”
“……예.”
“그대의 죄를 인정하는가?”
“…….”
맹주의 물음에 주먹을 꽉 움켜쥔 정백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인정해선 안 된다.
인정하는 순간, 끝난다.
그리고 고작해야 증인들이다.
이 자리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최후의 발악을 위해 정백이 고개를 치켜드는 그 순간.
‘아…….’
마주쳐 버렸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맹주의 눈과.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로지 맹주의 모습만 보이는 것 같은 착각.
손발이 사라진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폐는 일하기를 멈춘 듯 호흡이 턱하고 막힌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은 순식간에 옷을 축축하게 적시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의 소리는 고막을 쿵쿵 울린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
살면서 몇 번 정도밖에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 몇 번의 기억이 평생의 낙인이 될 그런 감각.
죽음과 마주한 감각.
무인으로 살아가면서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그 감각.
그리고.
“이…… 인, 정합니다.”
언제나 그 앞에서 도망쳤던 감각.
고개를 떨군 정백의 작은 목소리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네. 자고로 정파의 무인이라 함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일세.”
스스로 인정한다.
그 말에 맹주가 무엇을 했는지 읽을 수 있었던 이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만한 기세를 마주하면 죄가 없는 이라도 자신의 죄를 고백할 터인데.
단순한 살의가 아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벽.
죽음보다도 더 아득한 공포.
그것은 경지를 뛰어넘다 못해 아득한 위치에 도달한 초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걸 정면에서 마주했으니 정신이 제대로 버틸 리가 없지.
결국 이 모든 것이 맹주가 짜 놓은 판이라는 사실에 몇몇 단주들은 흥미를 잃었다.
이래서야 단순히 구파일방의 힘을 약화시키는 허술한 연극일 뿐이지 않나.
몇몇은 흥미를 잃고, 누군가는 치욕과 분노를 삼키는 그때.
맹주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허나, 그것이 자네가 죽을죄는 되지 않지.”
갑자기 정백의 편을 드는 발언.
그 발언에 모두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맹주는 이번엔 설천위를 바라봤다.
“자네가 선검단 부단주를 공격한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세.”
거기까지 맹주의 말을 들은 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양하게 변화했다.
누군가는 의문을.
누군가는 흥미를.
누군가는 안도를.
누군가는 분노를.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인 상황 속.
설천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나도 간결한 대답.
그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가.
증인이라고 불러온 인간들이 저리도 많은데, 저 말들이 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설천위의 순순한 인정에 정백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붉게 물들었다.
만약 저자가 정말로 자신이 해 온 저 비리들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을 공격한 것이라면.
‘빌어먹을!’
이딴 수치를 당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냥 빨리 본론만 꺼내면 되는 것 아닌가!
설천위를 바라보는 정백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됐다.
화를 참지 못해 실핏줄이 터진 것이다.
이 상황을 만든 것 자체가 설천위의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백의 분노가 임계점을 향해 마구 달려가는 그 순간.
“하지만 아예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천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증인들 사이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저는 어제 있던 참상을 일으킨 이들과 같은 대(隊)에 속해 있던 소천이라고 합니다.”
“뭐라?”
“네놈!!”
순식간에 들끓는 분노.
이곳에는 동료를 잃은 선검단의 단원들도 있었기에 그를 향한 분노는 빠르게 연무장을 채웠다.
허나.
“조용. 증언 시간일세.”
맹주의 나지막한 한마디로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나지막하지만, 고절한 내공으로 이곳에 있는 모두의 귀에 직접 목소리를 때려 박았기 때문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기예에 수많은 이들이 전율하는 사이, 다시 발언의 기회를 얻은 소천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원래 있던 대(隊)가 해체되며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곳에 배정받았음을 알아주십시오.”
우연히 배정받았다.
그 말에 화를 냈던 몇몇 이들이 뻘쭘한 얼굴을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흉수 중 하나였다면 이 자리에 저리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었다.
온갖 고문을 견뎌 낸 상태로 기어서 나왔다면 모를까.
“당연히 대(隊)에서 저는 겉돌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중요한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이어지는 소천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문제가 있어서 대(隊)가 해체된 뒤에 다른 곳에 흘러 들어간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문제가 있으니 대(隊)가 해체됐을 것이고, 당연히 들어오면서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다.
그 미운털을 빼내고 무리와 섞이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겉도는 것이야 뭐, 당연한 일인데…….
“우연찮게 본 서류에서 실제로 창고에 있던 것과 다른 부분을 찾아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대(隊)의 내부 비리 폭로.
당연히 몇몇 이들은 만금당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만금당이 어떤 인간들인데.
그런 인간들을 속였다고?
“우연찮게 다시 조우한 흑룡단주님께 여쭈고 상담한 결과, 제가 있던 대(隊)는 횡령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횡령이 아니었다?”
“예. 만금당의 감찰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
짧게 말을 쉰 소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허술한 물건을 구입해 돈을 빼돌린 것이 아니라, 역으로 더 많은 돈을 들여 돈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것들로 채운 것이었습니다.”
“허어.”
“넉넉하게 구입하며, 그 사이사이에 원하는 물건들을 껴서 반입한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그 방식에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단주의 암살을 노린 놈들이다.
고작 돈 몇 푼 빼돌리려고 일을 망치진 않았을 터.
“그중 상당수가 선검단 부단주에게로 흘러 들어갔고, 속여서 들여온 물건들은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했습니다.”
“다른 것?”
“독입니다.”
독.
그 말에 현성이 앉아 있는 곳에서 흉흉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산공독에 당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은 부하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현성의 기세에 다른 단주들이 손을 휘저어 기세를 흐트러트렸다.
지금은 그런 추태를 보일 때가 아니니까.
다른 단주들의 배려에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킨 현성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도호를 외웠다.
“과연 위장해서 따로따로 가져온 약들을 배합해 산공독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음, 그렇구먼.”
소천의 증언이 끝나고,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설천위를 바라봤다.
“흑룡단주, 그럴듯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 아닌가?”
물건을 더 들여왔다는 것도.
그 속에 재료를 포함시켜 독을 제조했다는 것도.
추측일 뿐이다.
증거가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 일을 할 때 누가 일일이 기록해 가면서 한단 말인가.
기록으로 남겨 봤자 약점만 될 뿐인데.
맹주의 물음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런 추측만으로 부단주를 공격한 것이라면 그건 명백한 월권이며 범죄다.
“증거란 확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맹주의 물음에 설천위가 뜬금없는 말을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대체 뭐 하는…….
“제가 그때 알고 있던 분명한 한 가지는.”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흉흉하게 변한다.
명백하게 분노를 품고 있는 기운.
“저자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동료들의 터를 팔아먹었다는 것뿐입니다.”
동료들의 터를 팔아먹었다.
“역시 그때 상자를!!”
그리고 그 말뜻을 이해한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청덕.
선검단의 훈련장에서 상자를 발견했던 사람이었다.
“습격이 있던 날 아침 준의대라는 곳에서 배움을 명목으로 선검단을 찾아와 청소를 하고 갔습니다!”
관중 속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그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가 이내 다시 한 곳으로 향했다.
“나, 나는……!”
말을 더듬는 정백.
그 모습에 사람들은 확신했다.
정백이 그들을 선검단 안으로 들였음을.
본래 잘 들이지 않은 외부인들을 선검단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정백임을.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동료들을 버린 것.”
천천히 걸음을 떼는 설천위.
모두를 향해 말하면서도 그 눈은 똑바로 정백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백은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의 죄를 진실이라 믿기 시작한 지금.
이젠 증거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맹주의 기세에 뇌물을 받은 것을 인정한 순간, 그것이 무형의 증거가 되었음을.
“그것이 의도했던 것이든 아니든.”
설천위를 마주한 정백은 조금 전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각을 느꼈다.
맹주에게서 느꼈던 것이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죽음이라면.
“그것은 결국 모두를 향한 배신입니다.”
이것은 절망이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 절망.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망쳐야 하는……!
“으, 으아아아아!”
검은 차고 있지 않지만, 내공까지 금제당한 것은 아니었다.
즉시 내공을 끌어올린 정백은 어제 마주쳤던 설천위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든 절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때려눕혀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
“크아아악!”
정백의 주먹이 허공에 나타난 검은 벽과 부딪히는 순간, 기이하게 꺾였다.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뼈가 부러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정백을 보지 않고 맹주를 바라본 설천위는 담담하게 웃었다.
“전시 상황에서 횡령은 배신이며, 전시하에서 배신은.”
“즉결 처형일세.”
너무나도 담담하게 설천위의 말을 받은 맹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를 보기에는 너무 시선이 많군.”
멀쩡한 손으로 다시 달려드는 정백의 모습에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본인은 스스로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맹주의 기세를 장시간 정면으로 받은 상태.
몸은 위축되고 내공도 굼떠질 수밖에 었없다.
게다가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주먹이라니.
하루 쉬는 동안 최대한 몸을 회복한 설천위라면 능히 받아 낼 수 있는 공격이다.
그렇기에.
“컥!”
날아오는 정백의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목을 움켜쥐는 데 성공한 설천위의 두 눈이 금빛으로 번뜩였다.
“피가 흐르지 않는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지.”
[낙인(烙印)]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흑룡의 낙인이 정백의 목과 손목을 타고 올라 전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