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329화-무형의 증거 (2)
무림맹주의 개입.
맹주의 뜬금없는 개입에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으나, 현성은 그런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썩었구나.’
맹주의 말에 슬쩍 돌린 고개.
숨기려 노력하지만,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
정백의 표정을 확인한 현성은 쓴웃음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당황도, 후회도 아닌 분노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백이 얼마나 썩어 빠진 사고관을 지닌 자인지 알 수 있었다.
‘원시천존…….’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무지다.
자신도 정백에게 썩었다고 나무랄 수 있는 자격이 없지 않은가.
스스로는 청렴하게 살아왔다곤 해도 밑에 있는 이들의 부정을 눈감아 준 것도 명백한 죄다.
아무리 본인의 발밑을 깨끗하게 했을지라도 시궁창 속에 있으면 그 냄새가 밸 수밖에 없다.
조금 전, 정백의 죄를 일단 덮고 넘어간 뒤에 조용히 처리하려 한 것 자체가 그 증거.
‘오물에 발을 담그더라도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
그 오물이 너무 깊어 허리까지 아니, 목까지 잠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빠져나와야 한다.
두 눈을 감은 현성이 물러서자, 설천위는 즉시 움직였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맹주님.”
“허허, 흑룡단주는 나와 뜻이 같은가 보군.”
설천위가 답을 내놓자, 허허롭게 웃은 맹주는 고개를 돌려 정백을 바라봤다.
“……맹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좋네. 선검단 부단주도 억울한 게 있다면 풀어야 하지 않겠나?”
맹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순순히 따르겠습니다.”
“협조적이어서 좋네.”
자신의 뒤로 접근한 이들의 기척에 설천위는 순순히 도와 검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에서 자신을 붙잡고 나서야 포기한 듯 검을 내려놓는 정백.
“흑룡단주는 지금부터 흑룡단 집무실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선검단 부단주는 정근각의 별실에서 대기하도록 하지.”
한쪽은 자신의 터에서.
한쪽은 맹주의 발아래서.
노골적인 차별이었지만, 정백은 반항을 포기했다.
단주(團主)라는 이름은 그만한 격을 지닌 자리다.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구금조차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그를 집무실에 연금(軟禁)하는 것 자체가 맹주가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주위에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선검단주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있으니…….
‘빌어먹을!’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백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따라 걸었다.
이대로 정근각에 가면, 아예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밑에서 주워 먹은 녀석들이 최대한 숨기긴 하겠지만, 그 멍청한 놈들이 해 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습격이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점뿐이다.
무슨 증거가 있어서 설천위가 저리 날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죄는 고작해야 횡령 정도로 끝날 터.
불명예스럽게 문파로 돌아갈 뿐이다.
문파로 돌아가면 온갖 멸시와 천대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까득
‘……반드시 복수해 주마.’
당당한 걸음으로 나가는 설천위의 등으로 일그러진 정백의 충혈된 시선이 꽂혔다.
그 뒷모습을 뇌리에 깊이 새기기 위해.
* * *
“허어, 정백 부단주가…… 정말인가?”
“아, 글쎄 화가 솟구친 흑룡단주가 먼저 공격했다니까?”
맹주는 소문을 막지 않았다.
애초에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무림맹 본단 내에서.
그것도 일개 대(隊)가 아니라 구단(九團) 중 하나인 선검단(善劍團)이 공격을 당했다.
그 사상자가 무려 수십 명에 달하는 상황.
피 냄새가 주변에 진동하고, 전투로 인한 소음과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 상황.
그 과정에서 흑룡단주가 선검단 부단주를 배신자로 지목했으니 그 사실이 어찌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선검단 부단주는 아예 설천위를 죽여 입막음을 하려 했다는 증언까지 나온 상황.
맹주의 등장에 선검단주까지 침묵했으니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똑똑하군.”
그 과정을 부하들의 보고로 생생하게 파악하고 있는 암은단주 유석천은 툭툭 책상을 두들겼다.
정백의 비리 정도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배움이라는 명목으로 선검단을 드나드는 대(隊)가 한두 곳이 아니었으니까.
성정이 유하고 그릇이 큰 현성은 그런 대(隊)가 모여 단의 전력이 될 거라고 여겨 눈감아 준 것 같지만.
세상에 완전히 은폐되는 비리란 없는 법이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었고, 정백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다.
단지 그걸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계속하고 있었을 뿐.
아니, 걸려도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랬을 거다.
구파일방 출신이 주로 모인 단(團)은 제 식구 감싸기가 유독 심한 편이니까.
다만 이번엔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았다.
일단,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무림맹의 본단이 습격당한 상황.
구파일방의 명예를 떠나 무림맹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이라 할 수 있었다.
구파일방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 많은 양보를 해 왔던 맹주가 칼을 뽑기에 충분한 명분이 주어졌다.
“맹주가 움직일 만해.”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바라보며 유석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 소집령.
지금 맹에 있는 모든 단주를 소집한다는 명령.
맹주가 웬만해서는 내리는 법이 없는 명령이다.
단주회의조차 명령이 아닌 권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명령을 맹주가 내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하루가 지난 후 뭔가 찾아낸 것이 있는 건가?”
그런 일이 있고 하루가 지난 뒤에야 소집령을 내린 이유.
본래라면 즉시 소집령이 떨어져 이런 일을 벌인 적들의 수색과 추적에 들어갔을 터인데.
맹주는 무려 하루나 침묵을 지켰다.
그 하루의 시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고민하며 유석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집령에 응해야 하니까.
그대로 집무실을 나와 곧바로 소집령에 적혀 있는 장소로 향한 유석천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하는군.’
거대한 연무장.
보통 시범 경기나 큰 행사를 위해 사용하는 공간.
그런 곳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니.
‘여전히 생각을 모르겠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노리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정의로운가 싶으면서도 세속적이고.
비열한가 싶으면서도 이타적이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지금도 봐라.
단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린 것으로도 모자라 맹 전체에 이야기를 퍼트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다.
맹에서 시간이 남는 이들은 전부 모인 것 같은 수준.
그나마 단주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와 비무대 위의 두 공석 주위는 한산한 것이 다행이라 할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단주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도착한 유석천은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셨어요?”
“오랜만이군, 남궁 단주.”
“에이, 단장으로 괜찮다니까요.”
“아직도 그런 말을 하고 다니나?”
“음……. 요즘에는 조금 덜 하는 편이죠?”
“성장했군.”
“헤헤, 고맙습니다.”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까닥이는 남궁선.
친우의 딸이 보이는 그 모습에도 무표정을 유지한 유석천은 다시 고개를 돌려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지?”
“제가 왔을 땐 이미 저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한…… 일각쯤?”
최소 일각(一刻:약 15분)이란 말인가.
담담하게 비무대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유석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겠지.
이번 일은 정백의 무죄가 입증되면 역으로 설천위가 후폭풍을 맞게 된다.
설천위와 정백의 전투로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명백하게 선공을 한 쪽은 설천위이니까.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아군을 공격한 것은 당연히 중죄다.
아무리 단주라고 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최소 감봉, 최대 폐관까지.
이제 막 창설된 단의 단주가 받아선 안 되는 처벌들뿐이다.
그러니.
‘믿는 구석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가만두지 않으려 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군.
딸을 맡기로 한 사내놈이 앞뒤 모르고 날뛴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화를 누그러트린 유석천은 이번엔 정백을 바라봤다.
차분한 모습으로 있지만, 묘하게 꿈틀거리는 입술.
손발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명백하게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죄가 없진 않은 모양.
정백의 상태를 확인하고 유석천은 두 눈을 감았다.
이내 하나둘 모이는 인기척.
지금 자리를 비운 단주들을 제외한 모두가 모인 것을 느낀 유석천이 두 눈을 뜨자.
“허허, 모두 모였으니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네.”
허허롭게 웃으며, 등장한 맹주가 단상 위에 섰다.
“자, 그럼 먼저…… 선검단 부단주. 할 말 있나?”
사건의 개요 같은 건 가볍게 건너뛴 맹주는 곧장 정백을 불렀다.
그 부름에 한 호흡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백.
“맹주님, 흑룡단주가 하는 주장은 저에 대한 모함일 뿐입니다.”
“그는 자네가 배신자라고 했네. 어제 있었던 그 참상의 원흉으로 자네를 지적한 게지.”
맹주의 말에 사건을 얼추 알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몰랐던 이들은 화들짝 놀랐다.
부단주의 배신.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던가.
무림맹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어도, 기둥뿌리 하나 정도는 충분히 흔들 수 있는 일이다.
무림맹은 수많은 기둥 위에 세워진 궁궐이지만, 그런 기둥이라도 하나둘 썩어 부러지다 보면 결국 무너지게 되는 법.
“그것이야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모함입니다! 외부로 업무를 나갔다가 들려온 소식에 다급히 단으로 복귀한 저를 먼저 공격한 건 흑룡단주였습니다!”
먼저 공격했다.
확신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에 아무런 증거도 없이 먼저 공격한 것은 큰 문제가 된다.
그런 까닭에 정백은 당당히 외쳤다.
“증거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내세웠으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도 흑룡단주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물러났습니다! 제 죄가 명백하다면 어찌 침묵했겠습니까?”
흥분해 외치는 정백의 말에 구경하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나?
먼저 공격할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하면 될 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만약 그런 증거도 없이 공격했다면, 그거야말로 큰 문제가 아닌가?
모두의 의견이 한 방향으로 향했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정백은 당당하게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앉아 있는 설천위.
아직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 모습에 정백이 크게 호통을 치려는 순간.
“흑룡단주.”
나지막한 맹주의 목소리가 그 흐름을 끊었고, 침묵하던 설천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맹주님.”
“자네는 할 말이 없나?”
“제가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어야 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입을 열어야 할 이들.
그 말에 유석천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허어.”
“흐응?”
탄식과 흥미가 뒤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무장의 구석.
맹주의 직속 부하들의 손에 끌려 나오는 이들.
‘맹주, 독하군.’
대충 정보로만 얼추 파악하고 있던, 정백에게 상납했던 자들.
구파일방과의 관계를 생각해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던 문제를.
“흑룡단주가 저리 말하고 있으니, 자네들의 말을 먼저 들어 봐야 할 것 같네.”
맹주가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 것이다.
설천위라는 방패를 들고.
그제야 맹주가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은 유석천은 미간을 찡그리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지금 맹주는 설천위를 명분으로 구파일방의 힘을 깎아내리려 하고 있다.
정백은 그저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다.
한 번 들추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은 더 쉬워지는 법.
자신의 흠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구파일방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원한은 건들기 어려운 맹주가 아니라 설천위를 향할 터.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아니, 맹주의 행동을 예상했다면 당연히 알아야 할 텐데.
“저도 궁금합니다.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너는 어찌 그리 음흉하게 웃고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