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327화-선검단 (4)
여느 때처럼 몸을 단련하던 시간.
[천위!]
다급한 암영의적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들고 있던 바벨을 내려놨다.
“움직였어요?”
[네 말대로 습격이 있었다.]
[허어, 정녕 무림맹의 본단에 그런……!]
혼들의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에도 설천위는 담담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과 도를 챙겼다.
“철백!”
“알겠다.”
사전에 들은 것이 있었기에 즉시 움직이는 철백과 서하영.
그 둘이 준비를 끝내자마자 설천위는 즉시 흑룡단의 건물을 벗어났다.
적들의 목표는 선검단주 현성.
‘……살리는 게 맞겠지?’
게임에서는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이 사건에서 무조건 죽으니까.
이번 습격은 무림맹 본단을 습격해 단주를 암살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기습이다.
애초에 확실하게 선검단주를 죽이는 데 모든 것을 건 계획이니 실패하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그것이 조건이기에 게임 속에서 현성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현성을 살려야 할지, 아니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원래의 흐름을 만든 뒤에 개입할지.
습격 대상이 선검단이라는 것을 알고도 혼령만 보내 감시하는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무림맹이란 조직은 썩어도 그냥 썩은 집단이 아니다.
길게 이어지고 있는 정파의 강세.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
본인들이 우월하다 믿는 명문과 명가의 오만함.
그런 것들이 뒤얽혀 무림맹은 비틀리고 썩어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림맹이 정파의 기둥 역할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선한 신념을 품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창천단주 남궁선이 그러하고, 백화단주 성화린이 그러하다.
진정한 선의와 정의감으로 움직이는 이들.
그런 이들이 있기에 무림맹은 정의(正義)라는 단어를 아직도 자신들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성이 그런 이들 중 하나이냐 아니냐 하는 건데.
조건만 보면 선한 인물일 확률이 아주 높지만…….
‘씁, 모르니 판단할 수가 없네.’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고, 대화도 제대로 나눠 보지 못했으니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요 며칠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선한 인물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늙은 너구리가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일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장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런 노괴인데.
신중을 기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살려 줬다가 적의 수만 늘어나는 꼴이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러니,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늦었군.”
그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
예민해진 귀로 들려오는 비명.
피부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허공으로 떠오르는 떠나가는 자들의 혼.
죽음을 볼 수 있는 설천위의 눈에 생생하게 담기는 죽음의 풍경.
“……철백, 서 소저.”
“맡겨 줘라.”
“맡겨 주세요.”
설천위에게서 떨어진 철백과 서하영이 단숨에 선검단의 담을 넘는다.
구할 수 있는 만큼은 구한다.
적을 가늠하고 견제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지켜야겠지.
작게 숨을 내뱉은 설천위는 천천히 도를 뽑았다.
그리고 단숨에 담을 넘는다.
약 기운에 빠져 마구 날뛰고 있는 적들.
거침없이 그 목들을 베어 넘기며 설천위는 앞으로 나아갔다.
설천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시체들과 부상자들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설천위는 거기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부상자들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으니까.
지금 당장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단주급의 무인이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는 증거.
단숨에 파고든 적들이 중심에 도달해 선검단주와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선검단주가 아군이 될지 적군이 될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일단 살린다.’
지금 이 습격은 시작일 뿐이다.
선검단주를 살리는 것으로 그 후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허나, 그것 때문에 구할 사람을 구하지 않고 버리는 선택지 역시 고를 수 없었다.
계산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다르니까.
마냥 정파(正派)로 살아갈 마음은 없지만, 정도(正道)를 벗어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그러니.
“거기까지.”
[흑관(黑棺)]
손을 쓰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포착한 순간, 상황을 읽어 낸 즉시 뻗어 나간 영력(靈力)이 강렬한 의지를 품고 형체를 갖춘다.
면을 만들고.
그 면이 이어져 공간이 된다.
강렬했던 섬광을 집어삼키고.
쿵!
깨진다.
강렬한 폭발에 순식간에 번진 금은 균열이 되고.
새어 나오는 빛은 폭발해 검은 파편을 흩날린다.
수백 분의 1초.
아니, 수천 분의 1초인가.
인지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흩날리는 파편 위로 또다시 검은 면이 펼쳐진다.
한 겹.
두 겹.
세 겹.
겹쳐지고 또 겹쳐진다.
하지만, 그 근본은 결국 영력으로 빚어낸 술법.
어지간한 폭발이라면 막을 수 있는 설천위의 [흑관]이지만, 진천뢰의 폭발은 어지간한 폭발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겹친 흑관이 부서지고.
그 위로 새로운 흑관이 겹쳐지길 반복한다.
파괴와 생성이 반복되고.
몇 번이고 파괴를 반복하던 폭발이 서서히 그 위력을 줄이기 시작한다.
수도 없이.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찰나의 시간 동안 거듭된 폭발과 생성의 싸움은 빠르게 결말로 치닫는다.
“허, 허어…….”
바로 코앞을 가로막고 있는 흑관.
그 흑관의 존재감에 허탈한 숨을 토해 낸 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청년.
“흑룡단주……!”
“……선검단주님.”
차분한 걸음으로, 현성의 앞에 선 설천위는 이제는 파편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인간의 흔적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 흔적 위에서 피어오르는 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혼.
약과 주술의 혼용으로 강제로 실력을 끌어올린 부작용이다.
영육(靈肉)이 완전히 망가진 끝에 도달한 최후.
그런 혼을 거둬 봤자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란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바로 포기했다.
다만, 그 존재를 분해해 흡수할 뿐.
단숨에 빠져나간 영력에, 쩍쩍 갈라진 영육에 내리는 단비.
“후우.”
겨우 호흡을 고른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현성을 바라봤다.
현성.
현 무당의 장로이며, 그 무위는 단주의 지위를 얻은 만큼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
선검단주를 수십 년째 맡고 있으며, 이 무림맹에서도 그 배분을 뛰어넘는 이가 드문 무림의 어른.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괜찮네. 흑룡단주.”
설천위의 물음에 자세를 고친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서 말을 꺼내려던 현성은 자신의 검을 바라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을 삼켰다.
‘허어…….’
처참하게 일그러진 검신.
자신의 내공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폭발의 열기와 파괴력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보검은 아닐지라도 명검의 반열에 들기엔 충분한 귀물인데도.
그런 검이 견뎌 내지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괴력.
‘고작 술법으로…….’
술법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분야에서 술법이 얼마나 맹활약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명색이 도가(道家)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무당의 장로다.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고작 술법으로 이런 폭발을 막아 냈다는 것이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술법이 무엇인가.
영력으로 만들어 내는 기적이다.
당연히 그 발현은 사람의 혼을 홀리고 흔들어 놓는 것에 이점이 있다.
악귀에게 홀린다.
그런 말을 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영력에서 파생한 존재조차도 영력을 사람을 속이거나 비틀고 혼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물리적인 파괴력으로 바꾸지 못한다.
악귀가 괴력을 발휘해 사람을 죽인다는 민간의 소문은 결국 일반인에 한하는 이야기다.
육체를 단련하고 내공을 얻은 초인들을 악귀들이 단순한 완력으로 이기는 것은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영력으로 펼치는 술법을 인간이 펼치는데 어찌…….
“……원시천존.”
정말 오랜만에 도호를 외며, 현성은 생각을 갈무리했다.
지금은 이리 길게 생각을 이어 갈 때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젊은 단주도 자신의 반응에 의아해하고 있지 않은가.
빠르게 스스로를 다스린 현성은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이와 함께 왔는가?”
“예, 부단주를 데려왔습니다.”
“그렇군.”
부단주급이라면 큰 도움이 될 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현성은 자신의 검을 버려 둔 채 땅에 떨어진 다른 사람의 검을 주웠다.
소음이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일이 끝나면, 내 반드시 감사를 표하겠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허, 겸손한 친구였구먼.”
허허롭게 웃으며 검을 몇 번 허공에 휘두른 현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여기서 쉬고 있으시게. 내 금방 정리하고 돌아오지.”
조금 전의 전투로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텐데도 현성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뛰어난 정신력이 노쇠한 몸조차 이겨 낸 것이다.
그렇게 끝맺음을 위해 달려가는 현성의 뒤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꿀꺽 피를 삼키며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뒈지겠네.’
내상을 치료해 가는 과정에서 또다시 억지로 영력을 쥐어짰으니 멀쩡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나아가던 내상을 이번엔 아예 제대로 조져 버렸다.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던 영력조차 흔들리고 있을 정도니 말해 뭐하겠는가.
입안에 가득 차오른 피 맛을 몇 번 더 삼킨 설천위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내공을 움직였다.
[회복]을 발동시키는 건 물론이고.
[패룡기(覇龍氣)]라는 뛰어난 회복력을 얻는 좋은 스킬을 있긴 하지만, 이건 소모가 너무 크다.
내공은 물론 영력, 패기, 정신력까지 골고루 잡아먹으니까.
팽후와의 대련 이후로 괜히 거의 쓰지 않은 게 아니다.
소모가 너무 막대해 효율이 안 좋았으니까.
게다가 내상보다는 외상에 효과가 뛰어나 이런 상황에서는 어울리지도 않고.
그러니 여기서는 얌전히 내공을 움직여 내상을 다스리며 [회복]을 사용하는 게 최선이다.
[회복]의 효율이면 전투까진 멀쩡하게 못 해도 거동 정도야 금세 가능해질 테니까.
그렇게 한숨과 함께 설천위가 내상을 다스리던 그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정문 쪽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걸음에 설천위는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까드드득.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
이를 악문 것 같은 소리다.
일단, 나는 아니고.
저기 누워 있는 환자들도 아니고.
저기 달려오는 놈도 아니니까…….
[현 동생?]
드물게 당황한 소백진의 목소리가 들리고.
가물었던 영력의 바닥조차 긁어내며 빨려 나가는 느낌이 찾아온다.
심지어 내공조차 그곳으로 빨려 나가는 말도 안 되는 현상.
지친 설천위의 제어력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아득한 의지.
아니.
집념(執念).
흐릿하게 형체를 갖춘 존재가 검을 쥔다.
그리고.
[소적검(消跡劍)]
궤적이 없는 검이, 누군가의 목을 베기 위해 파고든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흉악한 살기가 적의 목을 물어뜯는다.
허나.
“흡!”
본능에 가까운 방어가 그 목을 향해 파고드는 공격을 막아 냈다.
거의 바닥이 난 설천위의 영력.
그리 많이 끌어오지 못한 내공.
집념만으로 행해진 불완전한 실체화.
이런 조건들로 인해 결국 완성되지 못한 검에 당할 정도로 지금 들어온 이는 약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그 순간, 공격을 당한 사내를 필두로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고 설천위를 향해 겨눈다.
이런 상황에 공격을 당했으니 흉수가 누구인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단숨에 몇 개나 되는 검이 자신을 향하는 상황 속에서도 설천위는 자신의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도 더 악귀 같은 모습이 된 현태중.
그제야, 지금 이곳에 도착한 놈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예상보다 더 일찍,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정백!]
현태중의 원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도(刀)를 뽑고 기세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휘감는 패융.
흑룡단주의 상징인 그것에 달려들던 이들이 일순 주춤한 순간.
설천위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럴 땐 목소리 큰 놈의 의견이 먼저 닿는 법!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렷다! 이 배신자 놈!”
정정당당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