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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24화 (324/624)

제324화

323화-남은 자의 한 (10)

[미, 미안하다……!]

텅 빈 장원.

그곳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년의 앞에 흐릿한 형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하늘 같았던 대인의 비참한 최후.

허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일의 눈에는 그저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조용히 앉아서 왕일의 반응을 기다렸다.

악을 쓰던 천 대인의 혼은 조금 어루만져 주니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영(靈)의 격 자체가 너무 낮아 그 의지가 박약하기 그지없었다.

저딴 녀석의 욕망에 희생된 이들의 숫자가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라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될 만큼.

천 대인의 혼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설천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왕일을 바라봤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고작 하루 만에 정신을 차리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왕일.

친구가 사라진 그곳에 서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이틀째다.

며칠을 굶고, 정신이 없을 때 미음을 조금 먹은 것이 전부인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이곳에 저리 서 있는 것이 지금 저 아이의 체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할 일이다.

허나.

그럼에도 왕일은 저곳에 서 있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미, 미안하구나.]

허나 그 침묵에 오히려 애가 탄 천 대인이 슬쩍 고개를 들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고개를 내려 천대인과 눈이 마주친 왕일이 움직였다.

힘껏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아간다.

왼발을 축으로 삼아 오른발을 휘두른다.

거침없이 휘둘러진 발이 허공을 가르며 천 대인의 턱에 도달한다.

설천위가 펼쳐 놓은 영역(靈域) 때문에 너무나도 손쉽게 그 턱을 날려 버리는 왕일의 발차기.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각력은 아이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충격을 천 대인에게 선사했다.

[어억!]

턱을 강타한 충격에 몸을 뒹굴며 넘어가는 천 대인.

그 위로 올라탄 왕일의 주먹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때리고, 때린다.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 낼 기세로 주먹을 휘두른다.

연약한 피부가 까지고, 피가 튀지만 왕일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 심장을 찌른 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으니까.

주먹을 휘두르고 휘둘러도.

그것은 흐려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허약해진 체력은 왕일의 의지와 달리 너무나도 빠르게 고갈됐다.

순식간에 숨이 거칠어지고, 주먹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두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함께 주먹을 움켜쥔 왕일의 고개가 땅을 향하는 그 순간.

“웃어라.”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맞지 않는 한마디와 함께 왕일의 고개가 올라갔다.

마치 강제로 누가 턱을 들고 올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왕일의 눈에 담담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설천위가 담겼다.

도(刀)와 검(劍)을 허리춤에 차고.

단단한 몸을 감싼 헐렁한 무복을 입은.

마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무림인의 모습을 한 그가 왕일을 향해 말했다.

“웃어.”

“그게 지금…… 무슨 말…….”

“그 정도 했으면 됐으니, 이젠 웃으라고.”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왕일이 욱하며 소리치려는 순간.

“저 하늘 아래 있는 한, 항상 웃어라.”

하늘.

웃어라.

그 말에 왕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설천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깨달았기에.

어느새 버틸 힘도 사라진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땅 위에 주저앉는다.

힘없이 꺾인 고개로 하늘을 보니, 너무나도 맑고 청명하다.

이곳에 한참 서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늘이 저리도 맑았구나.

“흐, 흐하! 하하하하!”

나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구나.

그 녀석이 마지막에 한 말조차 잊고 있었구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는 왕일.

볼을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앞에 앉은 설천위는 조용히 웃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묻는 왕일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손을 내밀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일.”

“저는…… 모르겠어요.”

하고 싶었던 일은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나가 사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입을 우물거리는 왕일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찾으면 된다. 웃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하고 싶은 일 한두 개는 금방 찾을 수 있어.”

웃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그 말에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던 왕일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네. 찾아볼게요.”

웃으면서.

* * *

“동생 생각이 나는군.”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

철백의 말에 모닥불을 바라보며 장작을 넣던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그럼 잘 챙겨 줄 테니 걱정 없겠네.”

“난 동생들을 그리 잘 보살피는 편은 아니다만.”

“너 정도면 훌륭하게 보살펴 주는 거지.”

이쪽 형은 동생을 버러지라고 불렀다고.

지금은 아니지만.

마차에서 잠든 왕일과 장 씨 아줌마의 기척을 느끼며 설천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무수하게 박힌 하늘.

이곳에서 만족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다.

달빛이 약해지면, 별들이 저리도 아름답게 빛난다.

“이러다가 장원 가득 차는 거 아닌가 몰라.”

“흠, 이런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만.”

“그렇긴 하지.”

근데 뭐 불쌍하다고 하나둘 데려가다 보면 꽉 차는 건 순식간이다.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야지.

왕일은 일단…… 식객으로 둘까.

장 씨 아줌마는 사용인으로 일해서 먹고살겠다고 했고.

왕일은 장 씨 아줌마의 아들처럼 살게 될 테니, 뭐 문제는 없겠지.

장 씨 아줌마도 상처를 품은 채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이니 왕일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런데 저는 조금 의외였어요.”

“내가 그리 박정하게 살아오진 않은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에 빠졌던 설천위는 옆에서 들린 청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일 게 있나?

내가 그렇게 박정한 인간으로 보였나?

“왕일 얘기가 아니라 그 친구요.”

“소천이?”

“그 아이가 가진 악귀로서의 힘.”

말을 끊고,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는 청아.

그 시선에 설천위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고 피식 웃었다.

“아동의 노동력 착취는 중범죄다.”

“……그런 법이 있었나?”

“없을 걸요?”

아, 이 시대에는 없나?

여하튼.

“인생 자체를 힘들게 살아온 아이를 죽어서까지 부려 먹을 정도로 악독한 인간은 아니라서.”

“공간을 다루는 힘은 상당히 강력한 힘인데 말이죠.”

웃음소리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성화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한 힘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진 않아서요.”

“자상하네요. 설 단주님은.”

“예?”

아니, 야! 그걸 왜 니가 대답해.

상당히 미묘한 표정으로 성화린의 말에 반응하는 청아의 모습. 설천위는 웃으며 청아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어쭈? 반항기인가?”

“뭐래요!”

휙 고개를 털어 설천위의 손에서 벗어나는 청아.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성화린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착한 사람이네요. 설 단주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착한 건 아니죠. 그나저나, 굳이 그렇게 설 단주라고 안 부르셔도…….”

“어머, 그러면 편하게 동생이라고 할까요?”

“그럼 저야 편하죠.”

“후후, 그럼 설 동생도 편하게 누나라고 부를래?”

“……노력해 보겠습니다.”

갑자기 허들이 너무 높아졌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친누나가 언니라 부르는 사람인데, 누나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고민에 빠진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은 성화린이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궁금해. 설 동생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설천위의 옆에 있는 청아를 짧게 바라보는 성화린.

그녀의 시선에는 호의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어.”

“예?”

물어보는 게 아니라?

영 알 수 없는 성화린의 말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성화린은 그저 웃으며 모닥불의 온기를 만끽할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졌거든.”

“……그냥 물어보시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물어본다고 말은 해 줄 거고?”

담담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성화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힘들겠죠?”

“그러니 기다려야지. 나도.”

빙긋 웃는 성화린의 시선이 가만히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는 청아에게로 향했다.

“저 아이도.”

* * *

“죄송합니다.”

“알고 있긴 한가 보네요.”

침대 앞에 놓인 의자.

거기에 앉아 고개를 숙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침대에 가만히 몸을 기대고 있던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더 다쳐서 돌아왔다면, 용서 안 했을 거예요.”

“넵.”

“물론, 지금도 용서한 건 아니에요.”

“네?”

“벌.”

슬쩍 손을 뻗어 설천위의 양 볼을 꼬집는 유예린.

꾸욱.

“으어.”

“다음에 또 이러면, 이 정도론 안 끝나니까요.”

“뉍.”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손을 놓은 유예린은 다시 등을 기댔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어 왔나요?”

“음, 임무 완료 보상이 상당했으니까 충분히…….”

“그 보상을 줄 의뢰인의 목을 손수 쳐 버리고 왔다면서요?”

“……아.”

“한동안 단원들의 식단 조절에 힘써야겠네요.”

유예린은 여유롭게 후후 웃었지만, 설천위는 이내 머리를 싸매고 몸을 비틀었다.

“내 노력의 결실이!”

생각 좀 하고 죽였어야 했는데!

* * *

“실패, 실패라…….”

어두운 동굴.

그곳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이는 손가락으로 툭툭 의자를 두들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그만한 전력이었다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죄송합니다.]

“됐다.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고개를 숙이는 규오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던 이는 고개를 저었다.

강력한 뇌전에 타 버려 숯처럼 변한 오른팔.

몸 전체로 번져 나간 뇌전의 상흔.

혼에 이 정도로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다니.

과연 백화단주라 할 만하다.

그 스승을 죽였을 때도 꽤나 애를 썼는데, 아무래도 이번 백화단주도 죽이는 데 꽤나 품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설천위의 수준은 파악했나?”

[죄송합니다. 직접 상대한 것이 아니라서 정확한 수준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좀 아쉽구나.”

하지만, 아쉬운 정도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를 견제하며 눈치만 보고 있던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서로 약속한 것처럼.

이유는 간단하다.

꾹꾹 눌러 담으며 키우던 힘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한번 터트려 그릇 자체를 크게 키우지 않으면 더 이상 힘을 눌러 담을 공간이 없어졌기에.

시대가, 상황이, 모든 것이 맞물리고 있다.

“옛날에 모든 것을 짓밟던 이가 있었지.”

나아가며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짓밟은 괴물.

본인은 인지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인간과 악귀를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늘이 내린 것 같은 재능과 함께.

음지에서 숨어 살던 존재들은 그 존재의 위험성을 깨닫고 몸을 낮췄으나, 양지에 살던 오만한 이들은 그의 코털을 잡아 뜯었다.

그 대가로 벌어진, 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산이 되는 전투.

무림이라는 거대한 힘을 크게 깎아 낸 사건.

지금 음지의 세력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움이 가장 컸다.

허나, 이제 그는 이곳에 없다.

“이제는 우리가 짓밟는 자가 될 때가 됐다.”

밟거나 밟히거나.

그 싸움 속에서 자신들은 밟는 쪽에 설 것이다.

그분의 의지와 함께.

물론, 다른 놈들도 전부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만.

혈패황(血覇皇).

그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 세상은 그분의 발아래 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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