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23화 (323/624)

제323화

322화-남은 자의 한 (9)

공간이 무너져 간다.

정확히 말하면 뒤틀려 있던 공간이 원래 자리를 찾아 가며 이 장원 전체를 뒤덮던 영역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설천위는 청아와 청랑을 불러 부상자들을 챙겼다.

그나마 멀쩡했던 강종혁도 이젠 의식을 붙들고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죽기 직전까지 갔던 백경과 무인은 결국 이 혼란 속에서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지만.

뭐가 됐든, 일단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다.

“아아……!”

영역이 사라지면서 흩어져 가는 친구의 손을 붙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왕일.

그 모습에 설천위는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 이쪽으로 와요.”

그리고 그런 왕일을 챙겨 장 씨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청아.

넋이 나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는 왕일을 품에 안은 장 씨.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청아는 조용히 그 곁에서 그녀와 왕일을 토닥였다.

“……기분 더럽네.”

보기 힘든 청아의 슬픈 미소에 하늘로 시선을 옮긴 설천위는 도를 땅에 박아 넣었다.

정확히 말하면.

“끄아아악!”

술사의 남은 팔에 박아 넣은 거지만.

끔찍한 고통에 몸을 비트는 술사.

그 등을 밟은 발에 힘을 더하며 설천위는 몸을 숙였다.

“선택지는 두 가지. 전부 말하고 죽는다. 아니면 죽고 나서 전부 말한다.”

술사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린 설천위는 술사와 눈을 마주치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뭐로 할래?”

참고로 나는 어느 쪽이든 추천이다.

* * *

찰나의 틈.

그것을 놓친 성화린은 미간을 찡그린 채 손을 털었다.

상처는 없다.

영력의 소모가 꽤 있었지만,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빠르네요.’

적을 놓친 건 역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그만큼 큰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어찌 됐든 빠져나가긴 했으니까.

아마 한동안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놓친 건 놓친 거다.

상대가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고는 해도,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도 부족하군요.’

스승님의 뒤를 이어 단주를 맡은 지 몇 해가 됐더라.

예상보다 너무 빨리 맡았던 단주 자리이기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입이 썼다.

조금 더 무리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역시 지금처럼 힘을 보존해 최악을 대비하는 게 최선 아닐까?

최고의 결과보다는 최선의 결과를.

……스승님의 죽음 이후로 이렇게 적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희생을 감수한 공격에서 멀어진 것이 그 원인이겠지.

그 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적을 제거하기 위해 날뛰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지킬 수 없음이 두려워서다.

적을 하나 처리했다고 해서 동료가 안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자신이 죽더라도 그 뒤를 책임져 줄 윗사람이 없음을 아니까.

‘……스승님.’

이럴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얼굴.

그 얼굴을 애써 흐트러트리며, 성화린은 몸을 돌렸다.

공간의 붕괴.

악귀가 퇴치됐다는 증거다.

“듬직하네요.”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이 싸움을 끝냈을 이를 떠올리며 작게 웃은 성화린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다.

* * *

“……처음 제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 저 아이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모두 끝나고, 부상자들을 챙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백경은 씁쓸한 얼굴로 기절해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떨어진 공간에서 마당을 돌아다니던 아이와 여인을 만난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자신의 힘에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친구가 오염되는 것을 걱정한 녀석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며 나는.

“……지켜진 것인가.”

오히려 저 아이의 선함으로 지켜진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은 모두 죽었는데도,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닐까.

“뭐, 그럴 수도 있죠.”

담담하게 서서 한쪽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백경을 바라봤다.

“그러니, 다음에 잘하면 되죠.”

잘하면 된다.

그 말에 백경은 설천위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았다.

아까부터 멀쩡한 손으로 만지고 있던, 공허한 손목.

무인에게도 치명적이겠지만, 술사에게도 한 손의 소실은 치명적이었다.

부적을 쓰며 수인을 맺을 수도 없고.

두 손을 사용한 수인도 쓸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이 다음에는 이번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포기하면 거기까지.”

어느새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의 시선에 백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여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약한 소리를 내뱉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거 좋네요.”

자신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

그는 이내 등을 돌려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 단주님, 좀 늦었네요?”

“죄송해요. 적을 놓쳤습니다.”

“그건 아쉽네요.”

아쉽다는 표정이 아닌데.

설천위와 마주한 성화린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혈향이 짙은 설천위.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척.

“이번에는 산 채로 잡아 놨어요.”

비틀린 미소를 짓는 설천위의 눈빛에서 형형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아무리 넓은 중원이라고 하나, 작은 마을도 있는 법.

황실의 영향이 곳곳으로 퍼졌다곤 하나, 작은 마을의 경우 그 지역의 유지가 관리보다 더 큰 권력을 쥐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큰 마을이나 도시는 그렇지 않을까?

당연히 아니다.

지역 유지의 권력이 관리를 넘어서는 것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동등해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천 대인은 그런 권력을 손에 쥔 자였다.

이 근방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큰돈을 쥐여 주고, 친해지고, 혈연을 맺고.

완벽한 유착을 통해 그의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누명을 씌워 경쟁자들을 하나둘 제거한다.

그렇게 얻은 과실을 관리와 함께 나눠 먹으며 더욱 배를 불린다.

전형적으로 썩어 빠진 권력자.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고, 그 부작용을 이용해 그가 챙긴 부(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기에.

“흥.”

천 대인은 당당했다.

그 싸가지 없는 것들이 장원에 들어가고 몇 시진.

결국 장원을 감싸던 기이한 것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도.

겁도 없이 자신에게 으름장을 놓고 간 그 개념 없는 놈들은 용서하기 쉽지 않았지만, 장원을 되찾아 준 공로를 봐서 그냥 넘어가 줄 아량 정도는 있었다.

무림맹의 인간들에게 화풀이를 하려면 꽤나 시간을 들여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넘어가 주마.

……절대로 겁을 먹어서 안 나가는 게 아니다.

‘……그 어린놈.’

위아래도 없이 자신에게 감히 어깨동무를 했던 그놈.

분명 꽤나 이름이 알려진 무인이라고 했던가.

무식한 무인 놈들은 수틀리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조금 몸을 사릴 뿐이다.

군자란 자고로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아는 법.

조용히 이곳에 앉아서 기다리면…….

“대, 대인!”

“뭐냐!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모습에 천 대인은 버럭 소리쳤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움찔했던 이는 이내 그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요! 지금 포쾌들이……!”

“포쾌들이?”

그놈들이 왜?

그것들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천 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얼굴만을 구기고 있는 그 순간.

“천호령!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부하의 뒤로 거친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포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천 대인을 노려봤다.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렷다!”

* * *

이 세상에 와서 살아가면서 설천위는 자신의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 산적들과의 전투에서 벌인 살인.

시작은 어려웠으나 그것뿐이었다.

원래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던 정신력.

영문도 모른 채 게임 속에 들어와서 죽고 싶지 않았던 절박함.

그것들이 합쳐진 덕에 설천위는 상당히 쉽게 살인이라는 행동의 무게를 이겨 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세워진 철칙.

죄 없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굳건한 정신력은 무너지지 않기에 잊을 수 없다.

자신의 살인(殺人)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을 벗어난 순간.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설천위는 피를 봄에 있어서 몇 가지의 규칙을 정하고 움직였다.

그렇기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무릎을 꿇은 채 당당하게 소리치는 천 대인을 보며 설천위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지금은 참아야지. 암, 참아야 하고말고.

관(官)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런 해결 방식을 선택하긴 했지만, 진짜 참기 힘드네.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천 대인의 모습에 설천위는 가만히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 이상 보고 있으면, 손이 절로 움직일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설천위의 모습에 오히려 기세가 등등해진 천 대인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악령이 나타나 큰 피해를 본 것은 나인데! 어찌 나를 죄인 취급을 하는 것이오!”

설천위가 아닌, 그 옆에 있는 관리에게 향한 외침.

자신의 매제를 바라보는 천 대인의 눈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뭔가 일이 조금 꼬여 이렇게 붙잡혀 왔지만, 자신의 매제가 자신을 배신할 리 없지 않은가?

같이 해 먹은 게 얼마고,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이쪽이 망하면, 저쪽도 결코 무사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죄, 죄인은 입을 다물라!”

“뭐, 뭐라?”

호통을 치며 벌떡 일어나는 관리.

그 모습에 당황한 천 대인이 말을 더듬었지만, 관리는 그의 말을 길게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저, 저기에 있는 증인이 네 죄를 낱낱이 고했다! 또한, 네 장원에서 증거들이 나왔으니 이는 엄히 벌 받아야 할 중죄!”

“죄?! 죄라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발끈하는 천 대인의 외침.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정말 내 죄를 말할 거냐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죄가 어찌 혼자만의 죄이겠는가?

당연히 눈앞의 매제도 피해 갈 수 없…….

“죄 없는 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그들을 내쫓고 부를 축적한 죄! 또한, 이 관리의 눈을 속여 황실을 우롱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관리의 말을 듣는 순간, 천 대인은 깨달았다.

저 매제 놈이 자신을 완전히 끊어 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모든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워 버리기로 한 것을.

“지,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냐! 눈을 속여?! 네놈이 눈을 감은 것이지 않느냐!”

그렇기에 천 대인이 악을 썼으나 관리는 냉정하게 끊어 내며 그의 처벌을 선언했다.

“헛소리로 세상을 홀리려 하는구나! 그 반성 없는 태도! 심히 무거운 죄! 너에게 극형을 선언하노라!”

거의 날치기나 다름없는 수준의 판결.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도.

증거와 증인을 내세우는 과정도 모조리 생략된, 말 그대로 억지나 다름없는 재판.

허나, 그 재판 방식에 불만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 대인의 죄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재판장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평소 천 대인을 벼르고 있던 포쾌장이 괜히 그를 잡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 이놈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내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냔 말이다!!”

이곳에 아무도 자신의 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천 대인이 발악했으나, 그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잘 알지.”

검(劍).

도(刀)가 아닌, 검을 뽑은 설천위는 그 검을 천 대인의 목에 올려놓고, 그의 등을 밟아 눌렀다.

“그래서 네가 죽는 거다.”

그에게 주어지는 자비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에.

설천위는 도(刀)가 아닌 검(劍)으로 천 대인의 목을 쳤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목.

그 모습에 흠칫 놀란 관리가 벌벌 떠는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나, 나는…….”

“걱정 마. 안 죽일 테니까.”

뭐, 이 이야기가 황실에 들어가면 뒤에 찾아올 이에게 죽겠지만.

그것까진 미리 얘기해 줄 필요는 없지.

어제 당했던 협박에 심장이 쫄깃쫄깃했던 건지 힘없이 자리에 앉는 관리.

그 모습에 검을 거둔 설천위는 몸에서 빠져나오는 천대인의 혼을 붙잡았다.

이 모든 일의 마무리를 위해.

굳이 관리를 협박해서까지 직접 손을 쓴 이유.

“남은 사람의 가슴속에 맺힌 한은 병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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