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320화-남은 자의 한 (7)
공간의 왜곡과 이동.
그것이 소어(訴圄)가 가진 능력의 핵심이다.
허나, 당연하게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악귀들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포식 능력은 당연히 있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능력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어가 본체를 꽁꽁 숨기고 움직이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녀린 몸체가 한껏 움츠러든다.
가까이 오니 더욱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괴물, 괴물, 괴물.]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느껴졌다.
머저리 같은 술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소어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자는 포식자다.
자신을 향해 직진해 오던 그 여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험인물.
지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히 잡아먹혀 짓밟히고 짓이겨질 것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끔찍한 미래에 달달 떨던 소어는 갑자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공간 전체를 인지하는 시야로 보이는 검은 관들.
그것들이 건물 방과 복도에 생기더니 바닥에 박힌 것이다.
상대의 술법이 분명한 무언가.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소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설천위의 힘이 술사에게 닿기 전에 술사를 이동시킨다.
술사가 미친 듯이 뿌려 대는 술법을 적절하게 나눠 사각을 노려서 설천위에게 쏘아 낸다.
그러나 소어도, 술사도 알고 있었다.
이 공격, 아니 발악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아마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설천위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기 힘들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해내야 한다.
설천위를 바라보는 시야를 그대로 둔 채, 소어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온 이유, 목적.
구석에서 두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며 기도하는 이들이 보인다.
부엌에서 일하는 장 씨 아줌마.
뒷간을 치우는 일부터 해서 온갖 힘들고 더러운 일을 맡고 있었던 왕일.
장원에 있는 모두를 죽였을 때조차 손을 대지 않았던 이들.
그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어우, 또……! 얘야, 이거라도 먹으렴.’
식은 만두를 가져다주는 장 씨 아줌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기억.
액막이를 위한 제물로 장원에 살던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몇 안 되는 호의.
‘재액이 뭐라고……. 사람을 이리 대하면 그게 벌로 돌아오는 법인데…….’
언제나 안타까워하며 그녀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줬다.
앞으로 뻗던 손이 멈춘다.
더 이상 나아가기를 거부한다.
“살려 주세요……!”
장 씨 아줌마의 품에 안겨 두 눈을 감고 빌고 있는 왕일.
‘헤헤, 여기 숨으면 눈에 잘 안 띄어!’
더러운 일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웃으며 자신을 도와주던 친구.
이 지옥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줬던 아이.
코를 어루만지며 다른 하인들에게 잘 들키지 않는 장소를 알려 주던 그 미소에 뻗었던 손이 오므라든다.
주먹을 쥐고, 천천히 당긴다.
죽음 끝에 자신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지만.
저 사람들만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자는 저들을 먹어 치워야 자신이 완성된다고 했지만.
완성되지 않더라도 자신은 자신이다.
나는…….
떨리는 몸으로 이를 악문 소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살아남을 것이다.
이미 죽었지만, 아니 한 번 죽어 봤기에 더더욱 죽고 싶지 않았다.
혼으로 살아가는 두 번째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두운 상자 안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던 그 끔찍한 순간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발악할 것이다.
이를 악문 소어는 다시 시야를 돌렸다.
저 괴물을 어떻게든 떨쳐 내고, 반드시……!
깊은 다짐과 함께 눈을 크게 뜨는 그 순간.
소어는 마주쳤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와.
일렁이는 기운, 그 안에 묶인 신음하는 악귀들의 절규가 소어에게 똑바로 향한다.
덜덜덜.
손발이 미친 듯이 떨리고 다물었던 이가 미친 듯이 맞부딪친다.
압도적인 공포.
그 속에서 소어의 이성은 무너지고, 생존을 향한 갈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 * *
“예상 밖의 거물이네요.”
악귀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던 성화린은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상대를 바라봤다.
어느새 사라진 악귀의 기척.
아마 악귀가 본인의 능력으로 위치를 바꾼 것일 터.
다시 추적해서 쫓아가면 그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새로운 적 때문이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백화단주.]
“그러네요. 그런데, 자기소개는 안 하시나요?”
담담하게 부적을 꺼내며 묻는 성화린의 모습에 그녀의 앞에 선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나는 십이군(十二君)의 한자리를 맡고 있는 규오라고 한다.]
십이군(十二君).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그 단어에 성화린은 가만히 상대를 관찰했다.
키는 꽤 크지만 평범한 체격.
입고 있는 옷은 검은색의 무복.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아직 뽑을 생각이 없는지 손조차 올리고 있지 않다.
거기에 더해 자신을 바라보는 담담한 눈동자.
“십이군이라고 해서 전부 같은 십이군은 아닌가 보군요.”
[물론이다.]
십이군을 둘이나 죽인 설천위에게 들은 정보로는 십이군의 강함은 부단주의 수준.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는 명백하게 부단주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강자다.
십이군 내에서도 힘의 차이가 명확하다는 증거.
거기다.
‘……고작해야 하수인이 이 정도라는 건가요.’
본래 조직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단주들이 맹에서 잘 움직이지 않고, 설령 움직이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은 맹에 남으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거점이 있고,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다면 그것을 잃었을 때의 손해가 얼마나 큰지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강한 전력을 보존하는 것.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십이군은 여러 가지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정찰을 다니고 적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직접 일에 가담해 악귀를 보살피기까지.
조직에서 손에 꼽히는 힘을 지닌 이들이 보일 만한 행적이 아니다.
규오를 통해 사혈천의 저력을 짐작하며 성화린은 부적을 꺼냈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
“제 앞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오만함을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죠.”
적의 제거다.
성화린이 꺼낸 부적이 허공에서 사라지고, 일순 빛이 번쩍인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벼락.
정확히 말하면, 규오의 머리 위에서 생겨난 벼락이 단숨에 규오를 꿰뚫었다.
[성정이 급하군.]
허나, 상대도 어수룩하기만 한 초짜가 아니었다.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벼락을 흘려 낸 규오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서 검에 달라붙어 있던 전기의 파편을 털어 냈다.
그의 몸을 감싸는 묵직한 영력.
[분명 나는 지금 당신을 꺾을 실력이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순순히 인정하며 규오는 검을 들었다.
방어 자세.
그 모습에 성화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허나, 버틸 수는 있지.]
“마(魔)인가요?”
[아니. 그런 거창한 존재는 아니다.]
부정.
인간과 악귀의 혼합체인 마(魔)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규오가 뿜어내는 실체감은 보통의 악귀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실체화에 집중한 악귀.
술사를 잡아먹는 악귀들이 가장 많이 하는 선택이다.
술법(術法)에 관해서는 방어적인 능력만을 끌어올리고, 물리적인 공격을 주로 사용하는.
대(對)술사형의 악귀.
당연히 보통의 악귀들에게서 나오는 특징은 아니다.
악귀의 대부분은 인간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술사를 죽이는 방향으로 진화하진 않는다.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성장 방향을 정해 완성된 악귀.
“당신이 제게 온 건 설 단주와는 상성이 좋지 않아서이겠군요.”
[시간 끌기도 못 하겠지.]
성화린의 말에 규오는 순순히 인정했다.
무(武)를 초인 수준까지 갈고닦은 설천위는 술법적인 공격력마저 경이로운 수준이다.
맞붙게 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다.
하지만 상대가 성화린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럼 시작하지.]
단숨에 도약한 규오를 향해 뇌전이 꿰뚫었지만, 거기까지.
온전히 꿰뚫지 못하고 흘려진 뇌전 사이로 규오가 달려든다.
거침없이 휘두르는 검.
그에 성화린은 결국 술법을 활용해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바람을 담아 단숨에 이동하는 성화린.
그런 그녀를 규오는 끈질기게 추적하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거리를 좁히면서 끊임없이 성화린을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한 성화린의 술법이 규오의 몸을 헤집었지만, 무시한다.
지금 고통 따위에 흔들렸다간 그대로 끝날 테니까.
완전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검을 휘두르는 규오.
그를 향해 술법을 난사하던 성화린은 미간을 찡그리고 강력한 뇌전을 쏟아 냈다.
이번만큼은 전부 몸으로 받아 낼 자신이 없는지 공격을 멈추고 수비에만 집중하는 규오.
그런 규오에게 재차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벌린 성화린은 규오를 바라봤다.
곳곳이 검게 그을리고 타들어 간 모습.
영체인 만큼 더더욱 술법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혼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끔찍한 고통은 육체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규오는 그 끔찍한 고통을 참으며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저 멀리서 느껴지는 설천위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감싼 공간이 요동치며 혼란이 더해지고 있다.
자신이 쫓던 악귀가 그에게로 향했다는 증거.
그렇다면 설마 그 악귀가 설천위를 이기는 것을 기대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가?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경우의 수인지 뻔히 알면서?
납득할 수 없는 계획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군.]
그리고 그런 성화린의 생각을 읽어 낸 규오는 전신을 저릿하게 만드는 성화린의 힘을 자신의 영력을 몰아내며 입을 열었다.
[설천위는 괴물이지. 그 강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그걸 알면서 왜 악귀를 그에게 붙였나요?”
[그가 괴물이기 때문이다.]
성화린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시간.
그 시간 덕에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 규오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꺼냈다.
이젠 굳이 숨길 필요도 없으니.
[이곳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악귀는 그 모체가 어린 소년이다.]
“…….”
침묵. 하지만 명백하게 분노로 일렁이는 성화린의 눈빛.
허나, 그 눈빛에도 규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이 장원에는 정녕 인간다운 자들이 있었지.]
액막이로 들어온 소년을 챙겨 주는 이는 없다.
자신에게도 해가 올까 겁먹는 상태에서, 장원의 주인이 공인까지 해 줬으니 화풀이로 폭력을 행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소년을 챙겨 준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소년의 마음에 하나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죽어서 원한으로 그냥 악귀가 되는 것도 좋지만.
처음부터 망가진 존재는 의외로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필요한 거다.
타락한 인간을 완전히 망가트릴 수 있는 계기가.
더 이상 그자를 인간으로 남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뿌리까지 인간성을 뽑아낼 계기가.
[이성은 공포 앞에 무너지고, 본능은 자아(自我)조차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 끝에 완성될 것이다.
완전한 악귀가.
자신들이 이룰 대업에 큰 기둥이 되어 줄 존재가.
규오의 말에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성화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문제없군요.”
[……뭐가 말이지?]
“당신들의 노림수가 설 단주를 이용해 악귀를 몰아붙여 최후의 선을 넘게 하는 것이라면.”
설천위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할 줄 아는 인간이면서도.
가끔 이성의 범주를 벗어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인간.
“설 단주가 있는 한, 당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