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319화-남은 자의 한 (6)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함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힘의 뿌리는 여전히 굳건한 육체다.
그렇기에.
콰득!!
철백의 손에 닿은 귀병은 너무나도 쉽게 짓이겨졌다.
갑옷이 우그러드는 소리와 함께 그 손에 닿은 모든 것이 찢겨 나간다.
허나, 상대는 귀병(鬼兵).
살아 있지 않은, 오로지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망령이다.
뜯겨 나간 왼팔과 관계없이,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한 오른팔이 움직인다.
찔러 넣는, 검에 담긴 힘이 심상치 않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아가 무심코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팅!
허무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온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철백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던 검이 허망하게 튕겨 나온 것이다.
그리고 무방비하다는 말은 방어에 힘을 쓰지 않았다는 소리.
방어에 힘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흡!”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거침없이 휘두른 철백의 주먹이 귀병의 목을 그대로 돌려 버린다.
시원하게 돌아가는 머리.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사람이 아닌데.
그대로 귀병을 붙잡은 철백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상대를 말 그대로 찢어 버리는 것을 끝으로, 전투가 끝난다.
“……이 정도면 확실하겠지.”
혹시 몰라 최선을 다해 상대를 확인 사살한 철백은 무너진 귀병의 잔해를 두고 몸을 돌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아의 품에 안겨 있는 청유.
“잘 버텼군.”
“……후, 고마, 워.”
겨우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인 청유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최대한 피하긴 했으나, 검에 찔린 상처가 셋이다.
통증이 없을 수가 없었다.
특유의 냉정한 성격 때문에 참아 내고 있긴 하지만, 이런 고통이 낯선 술사에겐 참으로 참기 힘든 것이리라.
“무리하지 말도록.”
청유와 서아에게 다가가 서아에게 약을 건넨 철백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약을 바르기 위해선 옷을 조금 벗길 필요가 있으니 같은 여자인 서아에게 맡긴 것이다.
그 배려에 서아는 말없이 약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청유의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일단 정리는 됐나.’
청유의 응급조치가 진행되는 사이, 주위를 살핀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몸에 금강호령(金剛皓靈)을 두르고 거침없이 공간을 돌파한 보람이 있었다.
힘의 소모가 꽤 크긴 했지만, 해야 할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천위나 백화단주가 어찌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군.’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악귀는 문제없을 거다.
자신도 그 영향력을 힘으로 찢고 공간을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 두 사람이라면.
‘지키는 데 집중하면 되겠군.’
해야 할 일은 확실해졌다.
이곳에서 두 사람을 지킨다.
무리해서라도 움직이면 조금이라도 이쪽으로 시선을 끌어서 두 사람의 부담을 줄일 수 있겠지만…….
어린아이가 어른을 위한답시고 전장을 돌아다니면 어른은 더 피곤해지는 법이다.
영적인 영역에선 두 사람과 그만한 차이가 있으니 여기에선 아이답게 움직이는 게 정답이다.
그리 결정을 내린 철백은 가만히 서서 감각을 끌어올렸다.
내공을 이용한 경계는 불가능하지만, 영력을 느끼고 청각과 시각에 집중해 경계하는 건 가능하다.
그렇게 철백이 경계에 집중하는 사이.
응급조치를 끝낸 청유가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왔다.
“고마워.”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못 했지만.”
입술을 깨무는 청유의 모습에 그녀를 짧게 바라본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사람이 전장에서 항상 1인분의 몫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위로는…….”
“전장은 머릿수로 돌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인의 전투에선 더더욱 그렇지.”
머릿수?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전투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운 나쁘게 상대한 적이 강할 수도 있고, 지형이나 환경이 불리할 수도 있다.
반대로 운 좋게 상황이 좋고, 적이 자신보다 약할 수도 있다.
실력으로 운에 휘둘리는 것을 최소화할 순 있겠으나,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물론, 자신은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육체를 끊임없이 단련하고 있는 것이지만.
짧은 생각 끝에 철백은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준비하고 집중해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너희가 활약할 기회는 분명…….”
거기까지 말하던 철백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런 철백의 태도에 당황해야 할 청유는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뗀 지 오래였다.
뒤틀린 공간 속에서도 확실하게 보이는 검은 기류.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악귀의 등장인가 했는데.
“……무식한 놈.”
“……당신이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철백의 짧은 독백에 뒤늦게 고개를 저은 청유는 한숨과 함께 부적을 꺼냈다.
그녀의 곁에 모습을 드러내는 식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청유는 전투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활약해야 할 상황이 금방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크롸라라라라라라라라!!]
저 거대한 용이 날뛰기 시작하면 아무리 악귀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 * *
‘암천룡은 한동안 안 쓰려고 했는데…….’
뒤틀린 공간을 헤집으며 거칠게 포효하는 패융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왜곡된 공간을 통째로 헤집어서 적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수가 이것이니 어쩌겠는가.
실제로 지금도 효과를 보고 있고.
미친 듯이 날뛰는 암천룡 덕에 공간이 요동치고 있었다.
악귀의 힘으로 왜곡된 공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형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만 되면 이쪽의 승률이 크게 올라간다.
별다른 힘의 소모 없이 성 단주와 협력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쪽의 전력은 수직 상승하게 된다.
또, 합을 맞추는 게 자연스러워져 적의 도주를 막는 것도 손쉬워질 거고.
그러니 일단 이 공간을 비틀고 있는 힘을 거둬 내는 것이 우선이다.
만약 그걸 막기 위해 악귀가 본체를 드러내면?
그것도 좋다.
애초에 이쪽의 목적은 악귀의 토벌이니까.
“슬슬 움직여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기에 암천룡을 불러낸 설천위는 복도에 무방비하게 서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를 꺼내 든 채로 느긋하게.
패융이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릴 기세로 마구 날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
느긋함마저 깃들어 있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설천위는 문득 도를 움직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베는 감각.
강종혁을 구할 때 베었던 그 검은 기운과는 다른 무언가.
패융이 날뛰며 시원하게 뚫린 지붕으로 거친 바람이 불어온다.
“괴물 같은 놈.”
혼이 내뱉는 특유의 소리가 아닌, 명백하게 성대가 울려 나오는 육성.
시선을 올리니 무너진 지붕 위에 쪼그려 앉은 왜소한 체격의 인물이 보였다.
목소리의 굵기로 봐서는 남성.
쭈그려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 시선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꺾었다.
“그걸 아는 놈이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
“흥.”
코웃음과 함께 앞으로 모아 소매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는 사내.
그 모습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자연스럽게 도를 휘둘렀다.
허공에서 잘려 부서지는 돌.
“……이래서 무인 놈들은 싫어.”
자신의 공격을 숨 쉬듯 자연스레 막아 내는 그 모습에 사내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공격을 막아 낸다.
인간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은 반사 신경과 인지능력의 차이.
술사가 무인을 상대로 취약한 결정적인 이유다.
물론, 술사도 극에 이를수록 그 약점을 점점 더 극복해 나가지만…….
안타깝게도 사내는 아직 그 수준에 닿은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걸 전부 꺼내도 설천위에게 닿을 수 있을지 어떨지 불확실한 수준.
그럼에도 사내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고작 네깟 놈 때문에 내가 몇 년간 노력해 온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뜨는 사내.
그런 사내의 모습에 설천위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너무나도 침착한 태도.
자신을 별거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그 눈빛에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원한을 쌓을 만한 놈을 찾고, 그놈에게 접근해 원념을 모으기까지 그 과정이 얼마나 길고 귀찮은지 네놈은 가히 짐작이나 하느냐?”
“그딴 걸 왜 짐작해?”
“하! 그래! 당연히 모르겠지!”
열을 내는 사내.
그는 씩씩 달아오르는 호흡을 삼키며 악을 쓰듯 외쳤다.
“그게 문제인 거다!! 이 썩어 빠진 세상을 뜯어고치기 위한 나의 노력을! 그 돼지 같은 놈에게 아부하며 계획을 완성시킨 나의 노고를!! 감히……!!”
미친 듯이 악을 쓰며 몸을 비트는 사내.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설천위는 도를 늘어트린 채 상대를 바라봤다.
쓸 만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대화에 조금 어울려 줬는데.
제가 한 짓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발작하는 미친놈일 뿐이라면 그럴 가치가 없지.
설천위의 의지가 움직이자, 그것에 따르는 존재가 거대한 몸을 움직인다.
[크르르르르.]
한껏 포효하며 공간을 메우던 힘을 찢어발기는 데 집중하던 패융의 시선이 지붕 위의 사내에게 꽂힌다.
“하하! 이런 빌어먹을!”
그 압도적인 위용에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내.
그런 사내를 향해 아가리를 크게 벌린 패융이 달려든다.
단숨에 지붕째 물어뜯는 일격.
덩치가 거대해 그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진 않았으나, 웬만한 무인도 겨우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러니 왜소한 체격의 술사가 피하기엔 너무나도 빠른 공격.
하지만.
[크르르르.]
패융의 울음소리에서 상대가 피했음을 깨달은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지붕에서 나타나 술법을 발동시키는 사내.
동시에 자신의 제공권 안으로 들어온 상대의 술법을 설천위는 아무렇지 않게 베어 냈다.
“악귀?”
“흥.”
설천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술사는 부적을 뿌리며 설천위를 압박했다.
사실 제대로 된 압박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설천위를 이곳에 묶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사내가 어림도 없는 실력으로 설천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번째 이유.
“서, 설 단주님!”
설천위의 등 뒤에 있는 문 너머에서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동시에 상황을 인지한 설천위는 적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 새끼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사내를 무시한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를 그었다.
문과 벽을 통째로 베어 버리는 일격.
동시에 설천위가 뿜어낸 기파에 무너진 벽 너머로 귀병의 모습이 드러난다.
설천위가 문 앞을 막고 있었음에도 이리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악귀의 능력으로 이 공간 자체로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하나, 악귀가 이 방에 쳐진 결계를 무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
둘, 여태까지 그러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낼 정도로 악귀가 지척에 있다는 것.
상황을 인지한 것과 동시에 넓게 퍼트린 감각 속에서 적을 찾아낸 설천위는 즉시 움직였다.
허나.
“흥.”
그 앞을 사내의 술법이 가로막는다.
대지를 다루는 듯, 단단함을 품고 쏘아지는 암석.
단순한 공격이지만, 대지 속성 중에선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식 중 하나다.
또한.
퍼석!
분명 사내는 앞에 있는데, 공격의 시작점은 완전히 무작위다.
사내에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조 없이 술법을 발동시킬 역량이 없는 것이 확실한데도 이런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군.”
여태까지 꽁꽁 숨어 있던 본체가 이곳에 나타난 것 같다.
패융의 위협에 반응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쪽에게 썩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화르르륵.
설천위가 쥔 도에서 검은 영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쾅! 쾅! 쾅!
검은 관이 사방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