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317화-남은 자의 한 (4)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방문 앞에 앉아 필사적으로 결계를 유지하며 백경은 과거를 되짚었다.
술사들의 실종.
그에 따른 증원.
전력은 확실하게 갖췄다고 생각했다.
대주급인 자신이 직접 나섰고, 보조할 술사도 셋이나 데려왔다.
거기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대주에게 부탁해 무인도 하나 동행했다.
나름 최선의 준비를 다 했다고 자신했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니……!’
머릿수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고로 숫자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뭉쳐야 하는 법.
1이 다섯이 있어도, 뭉치지 않으면 5가 되지 못한다.
적의 힘에 당한 순간, 이곳에 술사 넷과 무인 하나가 온 것이 아니게 됐다는 소리다.
철저한 각개격파.
자질이 부족한 대원급 술사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너무 쉽게 짐작이 갔다.
까득.
이미 살아 있을 희망이 없는 부하들의 얼굴을 떠올린 백경은 이를 악물었으나, 이내 천천히 턱에 힘을 풀었다.
지금은 과거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슬쩍 뒤를 돌아본 백경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팔에 큰 자상을 입은 무인.
그리고 공포에 잠식되어 떨고 있는 이들.
도망치다가 겨우 찾아낸 생존자들이다.
인간 대부분이 그 괴물에게 잡아먹힌 이 지옥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는 중년의 여인과 소년.
허름한 복장과 거친 손이 그들이 이 장원에서 일하던 하인임을 알려 줬다.
도망도 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던 이들을 이 방으로 데려와 결계를 펼친 게 대체 며칠째인지…….
‘점점 한계가 다가온다.’
아무리 자신이 술법에 특화된 백화단에서 대주를 맡고 있다고 한들, 그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단주도 아니고, 결계를 무한히 유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적의 영력이 끊임없이 침식해 오는 이런 환경이라면 당연히 결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며칠째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
다만,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전의 그 파동.’
이 일대의 영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결계마저 뒤흔들었던 힘의 파동.
명백하게 이 장원을 장악한 악귀가 아닌 다른 존재의 힘이었다.
그래, 예를 들어.
‘단주…….’
만약 자신의 실종으로 단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신 거라면.
‘살 수 있다.’
단주님이라면 분명 악귀를 처리하실 수 있을 거다.
다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까지 필사적으로 알렸으니 악귀만 정리된다면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희망을 품은 백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약한 통증과 함께 흐릿하던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며칠째 잠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일깨운 통증은 점차 무뎌져서 정신을 온전히 유지시키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의지는 움직이는 법.
최후의 최후까지 영력을 쥐어짜서 결계에 힘을 더하는 그 순간.
쿵!
묵직한 충격이 문을 흔든다.
마치 주먹으로 크게 후려치는 듯한 일격.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백경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수, 술사님?”
그 모습에 구석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중년 여인이 당황해 물었으나, 백경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이놈들이다!’
자신의 부하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죽은 이유.
무인의 팔에 깊은 자상을 입은 이유.
콰득!
문을 뚫고 들어오는 쇠붙이의 섬뜩함이 등불에 일렁인다.
[포기하라.]
당연하다는 듯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하는 목소리.
문을 뚫는 것을 넘어서 백경의 결계에 큰 구멍을 낸 검이 뒤틀리며 거친 파열음을 만들어 낸다.
영력과 영력이 서로 부딪쳐 한쪽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백경에게는 너무나 아찔하게도 무너지는 것은 그의 결계 쪽이었다.
[포기하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서서히 결계의 틈을 벌리는 상대.
확실하게 검을 비틀고 움직여 점차 구멍의 크기를 키워 나간다.
그리고 균열이 이어져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하고.
쩌적!
[생을 포기하라.]
강렬한 눈빛과 마주한 백경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래시시(如來視時)! 화엄……!”
주문과 함께 수인을 맺는 백경의 영력이 형체를 이루려는 순간.
[생을 포기하라.]
바닥까지 긁어내고도, 한 번 더 흙바닥을 긁어내 모았던 백경의 미약한 영력이 허무하게 흩어진다.
그 순간, 가슴에 생긴 긴 상흔.
그 앞에 모였던 손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올라오는 아찔한 통증에 백경은 정신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죽는구나.
이렇게 따라가는 나를 용서해 다오.
너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나를 용서해 다오.
미안하오. 경 소협, 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소.
생을 마감하는 그 짧은 순간.
깊은 죄책감이 그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움직였다.
“……기용!”
마지막 한마디.
그리고 잘린 왼손의 피를 뿌리며, 아직 멀쩡한 오른손이 형태를 완성한다.
그 순간, 겨우 긁어모았던 영력이 방의 구석을 향해 뿌려진다.
희미하게 일렁이며, 반구를 형성하는 영력.
최후의 힘을 쥐어짠 호신결계.
인간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는 대신, 삿된 존재로부터 그를 지켜 주리라.
그리 무인과 약속했기에, 백경의 마지막 영력은 민간인과 무인을 지키는 데 온전히 쓰였다.
너무나도 기이한 그 광경에 검을 내지르려던 존재마저 일순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의문은 깊었으나, 생각은 짧았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모든 생을 말살한다.
혼은 그 존재가 흡수한다.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러니.
[포기하라.]
존재는 몸을 돌렸다.
이제 숨이 끊어져 가는 백경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저 결계를 부수고, 저 안에 있는 놈들을 끄집어 내리라.
갑주가 흔들리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걸음을 내딛는 존재.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존재는 검을 세웠다.
그리고.
“나 이런 감동적인 전개,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팔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느 순간에?
목을 노린 공격을 본능적으로 피해서 팔이 잘리는데 그쳤으나.
제대로 그 기세를 읽고 피해 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감정이란 것이 거의 사라진 존재마저 상황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행동에 망설임이 생긴 상황.
“벌써 너희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깨에 도를 턱 하고 걸친 설천위는 짜증과 함께 상대를 노려봤다.
귀병(鬼兵).
병사의 넋으로 만들어진 귀신이란 뜻은 당연히 아니다.
귀신을 병사로 만든 것.
그리고 악귀를 병사로 만들어 이렇게 써먹는 조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사혈천 놈들이 손대고 있던 곳이란 말이지?”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설천위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 뿐.
[끝났습니다.]
순간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병은 깜짝 놀랐으나, 설천위의 기세에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다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뻔히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소리만 듣고 상황을 짐작한 귀병은 자신이 베었던 술사의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상황을 인지했다.
꽤나 미약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살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기척으로 보아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그에게 응급조치를 취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고생했어.”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내디디는 설천위.
그의 도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걸쳐 있었으나.
서걱.
귀병의 다리는 잘려 그의 몸은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체 언제 베였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는 참격.
그리고 귀병이 그 존재를 머릿속에 새기는 순간.
“생각보다 쉽긴 하네.”
설천위의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귀병의 의식이 끊겼다.
이제는 많이 능숙해진 [참수(斬首)]를 고작 귀병 따위가 막는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
사혈천의 주 전력 중 하나이긴 하지만, 머릿수를 담당하는 것뿐이니까.
혼의 죽음으로 서서히 흩어져 가는 귀병을 잠시 바라본 설천위는 이내 몸을 돌려 다른 이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필사적으로 버티던 술사의 목숨은 붙어 있었다.
“도움을 청한 건 이 양반인 것 같고.”
시간상으로는 저놈이 쳐들어오기 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은데, 늦지 않아 다행이네.
백경의 상태를 살핀 설천위는 그대로 방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상처도 살폈다.
“누, 누구십니까?”
“흑룡단주, 설천위라고 합니다.”
“아!”
오기 전에 들은 게 있는지 반색하는 무인.
안도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그에게 다가가 약을 발라 줬다.
상처가 꽤나 악화된 상태이지만, 무인이니 이곳을 나가 잘 요양하면 죽진 않을 거다.
맨몸으로 감염과 싸워야 하는 일반인과 달리 내공의 도움을 받아 감염과 싸우면 꽤나 승률이 높으니까.
그나저나.
‘……용케 살아 있는데?’
중년의 여인과 그 품에 안겨 있는 소년을 바라본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악귀의 영역을 강제로 헤집으며 이곳으로 달려왔을 때, 다른 사용인은 아예 보질 못했다.
아마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할 터.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중년 여인과 소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차갑게 가라앉은 설천위의 눈동자가 두 사람을 응시하자, 순간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강자의 기세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모습.
연기라면 너무나도 뛰어난 연기력이고.
연기가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일단 정리됐으니 쉬고 있으세요.”
영력으로 샅샅이 훑었지만, 특이점은 안 보인다.
적의 함정일 가능성은 적다는 소리.
살아남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여 그들을 버리고 갈 순 없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을 구하러 이곳에 온 것인데.
영문을 모르는 상황에서 의심만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대처할 수 있겠어.’
이 장원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성화린도 이곳에 있는 만큼, 적이 함정을 팠다고 해서 대처가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하는 게 좋은 법.
“일단 합류하는 데 집중해야지.”
흑사를 여기에 두고 가면 기본적인 방비는 충분할 거다.
이 장원,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아서 흑사가 조금만 버텨 주면 충분히 시간에 맞춰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거기다.
“일 좀 해.”
“네네~. 암요, 암요! 해야지요~.”
“입 집어넣고.”
“눼.”
[왕!]
정말 오랜만에 청아를 부른 설천위는 덤으로 청랑까지 불러 두고 방을 나섰다.
청아도 환술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이런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겠지.
청랑은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청아보다 훨씬 쓸모가 있을 거다.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내 공간의 왜곡에 의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포기…….]
“너희는 대사가 너무 똑같아.”
귀병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 * *
“쉽지 않군.”
장원에 들어와 걷기 시작하고, 의식적으로 두 명의 술사 쪽에 붙었던 철백은 다행히 술사 하나를 챙길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오.”
“하지만 제령은 제 영역인데도…….”
“괜찮소.”
울먹이며 고개를 숙이는 술사.
귀병과 싸우다가 철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술사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상대가 악귀면 뭐하나, 특수한 술법으로 물리적인 공격만을 감행해 오는데.
묶고 공격해도 상대는 그것을 피하거나 막을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리를 허락하고 근접전에 도달하면 패배.
철백의 개입이 아니었으면 상대의 검에 죽거나 크게 다쳤을 거다.
‘……선배님들이 몸을 단련하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체력과 근력.
그것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술사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열심히 부적을 꺼냈다.
어떻게든 이 영역을 밀어내고 동료들을 찾기 위한 노력.
철백이 적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계까지 해 주었기에 할 수 있는 노력이다.
그렇게 술사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
‘……할 만하겠군.’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철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은빛의 기류.
단련하고 단련해 온, 인외의 존재와 싸우기 위한 힘.
[금강호령(金剛皓靈)]
철백의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기운이 악귀의 영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