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315화-남은 자의 한 (2)
영역(靈域).
그 기본은 간단하다.
고농도의 영력으로 공간 자체를 채우는 것.
흔히 악귀들이 만들어 내는 영역(靈域)이 이에 해당한다.
고농도의 영력은 영안(靈眼)을 개안하지 않은 이라도 혼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볼 수 있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력에 의한 자극이다.
영역에 들어온 이가 평범한 자라고 하더라도 짙은 영력 속에 빠지면 혼이 자극되어 일시적으로 영안에 가까운 시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혼의 짙어짐이 있다.
보통의 상황에서 영은 끊임없이 흩어진다.
마치 물속에 풀어 놓은 먹물처럼 서서히 풀어진다.
그런데 악귀들은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
인세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몸이 흩어져 가니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발악한다.
그 방식의 하나가 바로 영역인 것이다.
급이 낮은 악귀일수록 지박령이 많은 이유는 힘을 들여 만들어 놓은 영역 안에서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힘을 들여 만들어 놓은 영역 속에서는 혼이 흐트러지지 않기에 본래보다 짙게 유지된다.
영역 속에선 평소에 보지 못하던 이도 악귀를 볼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잘 모르는 이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그럼 지박령이라는 존재는 왜 있는 거지?
그냥 돌아다니면서 영역을 펼치면 되진 않나?
영역만 있으면 혼을 유지할 수 있고.
영역을 자신이 만들어 내는 거라면.
굳이 한자리에 묶일 필요가 없지 않나?
꽤나 자연스러운 의문이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영역(靈域)을 만들어 낸 혼 중에서 순수하게 본인의 의지만으로 영역을 폈다 접었다 할 수 있는 혼은 극히 드물다.
지박령이 왜 지박령인가.
그 장소에 한(恨)이 남아 집착 끝에 죽어서도 그곳에 들러붙은 귀신 아닌가.
대부분의 악귀들이 만들어 낸 영역은 그런 집착과 한이 가득 모인 원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거둘 수도, 펼칠 수도 없는 그런 감정의 부산물.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다.
홀로 존재하면 자연스럽게 흩어질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고 오히려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본인의 순수한 힘만으로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만한 고농도의 영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영역 없이도 본인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영역이란 본래 아무나 펼치고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인데요.’
흑룡단에 도착한 성화린은 단 전체를 가득 메운 영력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도 흉내 내려면 할 수는 있으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영역의 기본은 원한과 집념으로 그 공간에 영력을 묶는 것.
그렇지 않으면 공간 전체로 퍼트린 영력이 줄줄 새어 나간다.
막대한 영력을 허공에 버리는 꼴이란 소리다.
즉 설천위는 둘 중 하나를 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죽어서도 그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의 억울함을 품은 혼 정도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품을 수 있거나.
허공으로 영력을 뿌려 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막대한 영력을 가지고 있거나.
이야기로 듣고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자연의 기를 영력으로 바꾸는 법도 몰라 그걸 가르쳐 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잘한 선택 같네요.’
이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
흑룡단의 문 앞에 선 성화린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흑룡단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는 반가운 얼굴에 작게 웃은 성화린은 문을 열어 준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내고 있구나.”
[왕!]
늑대이면서 개처럼 짖는 것도 여전하고.
선대 백화단주가 개로 알고 키워서 그런 걸지도.
자신을 반기며 꼬리를 흔드는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던 성화린은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좀 크네?’
원래는 정말 개 정도의 크기였는데……. 뭔가 좀 커진 것 같은데?
잠시 청랑을 바라보던 성화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술사의 역량에 따라 지배되는 식령(式靈)이 성장하는 일은 많으니까.
설천위의 재능을 생각하면 이리 성장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청랑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던 성화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작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성 단주님?”
생각해 보면 홀로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나.
살짝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모습에 작게 웃은 성화린은 웃으며 그에게 걸어갔다.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아뇨. 뭐, 그렇게 거창한 훈련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요.”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눈짓으로 훈련 중인 부하들을 가리켰다.
“이런 사소한 만남을 신경 쓸 정도로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요.”
“……그건 그러네요.”
무인들의 수련은 원래 이런 식인가?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리는 단원들.
거기에 왜 영역을 펼쳤나 했더니 가까이에서 그들의 표정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수련법은 아주 참신하네요.”
“그렇죠? 학관에 있을 때 꽤나 효과가 좋아서 써 보고 있어요.”
수 속성의 영력을 통해 혼에 부하를 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움직임에도 부하를 가해 수련의 강도를 높이다니.
솔직히 말해서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훈련 방식이다.
애초에 술사들에겐 이런 수련은 별로 필요가 없으니까.
술사들도 체력 단련을 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것뿐이다.
그마저도 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빼먹으려는 녀석들이 태반이고.
“훈련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감(靈感)을 높일 수 있는 게 장점이죠.”
“그렇겠네요.”
확실히 이만한 영력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노출되면 영감이 개화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거다.
정말 재능이 없는 이라고 할지라도, 혼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진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그것만으로 악귀와의 전투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위치를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있으면 도주에도 도움이 되니까.
물론.
‘……설 단주이기에 가능한 방식이겠지만요.’
영역의 안에 들어와 보니 확실히 알겠다.
앞서 짐작한 두 가지 경우의 수에서 설천위가 행하고 있는 것을.
둘 다다.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영력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으며, 막대한 영력을 때려 박아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수 속성의 영력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부하를 줄 정도의 영역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강할지도.’
술법으로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만약 가까운 거리에서 일대일로 싸우면 무조건 질 거다.
상대는 자신의 술법을 막을 수단이 있는데, 자신은 상대의 무술을 막을 수단이 없지 않은가.
그가 왜 술사의 길을 거부하고 무림학관에서 무(武)를 갈고닦았는지 이해가 됐다.
“성 단주님?”
“이런, 생각이 너무 깊었네요.”
감탄하다가 말을 꺼내는 걸 까먹고 있었네.
작게 고개를 저은 성화린은 자신이 가져온 제안을 꺼냈다.
“설 단주, 합동 임무를 진행하지 않겠어요?”
“합동 임무요?”
성화린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자신이 없으면 이 훈련은 불가능하다.
뭐, 철백에게 맡기면 무슨 밥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훈련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영감을 높이는 훈련은 무리다.
천희만락궁도 그렇고, 혈교나 혈사련도 그렇고.
술법에 아예 손을 대지 않는 음지의 조직은 거의 없다.
술법은 제물로 손쉽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니까.
그러니 제대로 된 영안은 얻지 못하더라도 영감 정도는 얻을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무엇보다 합동 임무면 임무의 성과금도 쪼개야 할 가능성이 높다.
돈이 급한 지금 굳이 그런 임무에 시간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을까?
고민하던 설천위가 거절 쪽으로 가닥을 잡으려던 그때.
“이번 임무는 의뢰를 받은 임무입니다.”
설천위의 속내를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성화린이 작게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임무 완료에 따른 보상금은 이 정도. 반으로 나눠도 충분한 금액이죠?”
쓱 고개를 내린 설천위가 종이에 적힌 액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휘오오오오!!
주변으로 퍼져 있던 막대한 영력이 단숨에 설천위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빨리 처리하고 오면 애들 밥은 제대로 먹일 수 있겠는데?
* * *
“천위, 나는 아직도 반대다만.”
“에이, 단주가 둘이나 움직이는데 뭐가 문제라고.”
성화린의 요청에 응해 합동 임무를 나오게 된 설천위.
동행으로는 철백만 함께했다.
이번 임무 자체가 많은 머릿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성화린도 고작 세 명의 술사를 데려왔을 뿐이니까.
물론, 술사의 숫자를 생각하면 마냥 적은 것만은 아니지만.
여하튼.
“내상 별거 없다니까? 다 나았어.”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진 않는다만.”
손을 휘휘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 성화린의 곁에 서는 설천위.
그 모습을 보며 철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다면 유예린에게 비밀로 하고 자신만 데려올 리가 없지.
철백은 빠르게 포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애초에 여기까지 왔으니 이대로 돌아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말이다.
단원들의 훈련은 서하영에게 맡기고 왔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거기다 무해의 수련 강도는 자신들과 맞는 면이 있다.
그도 있으니 훈련이 허술하게 진행되진 않겠지.
문제는 지금 휴식 중인 유예린이 깨어났을 때의 일인데…….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닌가.’
모든 업은 천위가 감당할 테니 포기하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철백은 고개를 젓고 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성화린에게 받은 정보의 정리다.
향하는 곳은 상당한 부호의 자택이다.
지역 유지 출신으로, 그 지역의 상권에 크게 관여해 부를 축적한 상인.
그의 집에 나타난 지박령의 퇴치다.
다만.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고 했던가.’
그 부호가 의뢰를 넣을 때 의뢰금을 줄이기 위해 악령의 힘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탓에 벌써 두 번이나 술사들이 실패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도 나왔고.
그래서 악귀의 등급을 크게 높여 백화단주가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거기다 더해 그 부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호위로 흑룡단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고.
솔직히 말해서 그리 어려울 게 없는 임무다.
백화단주가 직접 나서는 만큼 악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제령할 수 있을 거고.
아무리 그래도 단주급이 움직였는데 해코지를 할 정도로 멍청한 놈이 그만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거기다.
‘……천위의 명성이 꽤나 과격하게 퍼졌다고 했지.’
흑룡을 데리고 다니면서 상대를 말 그대로 오체분시를 해 버린다는 소문이 무림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고 했다.
물론 소가 끌어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로 잘라 버리는 거지만.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인간적인 방식일지도.
“……오랜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걷던 철백은 자신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오랜만이군.”
무표정한 얼굴, 그럼에도 숨겨지지 않는 미모.
옛날에 함께 싸웠던 적이 있는 여도사, 청유의 인사에 철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떨어져 걷기에 우리를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동료들이 말려서…….”
“응?”
말려?
왜?
쓱 고개를 돌려 다른 술사들을 바라본 철백은 그제야 청유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히익 놀라며 바들바들 떠는 술사들.
‘……겁먹었군.’
동료는 해치지 않는데 말이야.
무림에 퍼진 소문이 무림맹에 퍼지지 않았을 리가 없지.
흑룡단의 인식은 한동안 상당히 살벌하겠어.
상황 파악을 끝낸 철백은 고개를 돌려 청유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제야 말을 건 이유가 있나?”
앞쪽에선 어느새 설천위와 성화린이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부탁?”
“무인에게 습격을 당하면 동료들을 부탁해.”
“이유는?”
“내 청랑, 나를 지켜 줄 수 있어. 하지만 동료들은 아니야.”
아.
그 식령을 다루지 않는 술사?
그러고 보니.
보통 식령을 다루면 만귀단으로 간다고 하던데, 얘는 왜 백화단에 있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 철백은 이내 끄덕였다.
굳이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전부 지킬 생각이었으니 그런 부탁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담담한 철백의 대답. 그 대답에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청유.
그리고 그들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휘오오오오!
질척이는 영력이 바람이 되어 휘몰아치고 있는 장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