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15화 (315/624)

제315화

314화-남은 자의 한 (1)

설천위가 자신의 상태를 인지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

침착하게 상대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설천위가 가장 걱정한 것은 무엇인가.

당연하게도, 유예린의 안전이었다.

최후의 순간,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상황을 인지한 설천위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다.

그렇기에 쥐어짰다.

영력을 나눠, 보고를 위해 왔던 흑사를 돌려보냈다.

정말 위험한 순간, 유예린이 몸을 뺄 수 있는 한순간의 틈을 만들 수 있게.

그렇기에 흑사는 설천위에게 나눠 받은 힘을 가지고 유예린에게 갔다.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 가는 유예린의 모습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 정말 설천위의 명대로 최후의 순간을 위한 준비를 했다.

사방으로 영력의 실을 깔아 상대가 어느 쪽으로 이동하든지 간에 움직임을 막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유예린을 데리고 도주하며, 그 실들로 상대를 묶어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반대로 상대가 도주하려고 하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 위해 붙잡을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흑사의 노림수는 후자의 방식으로 적중했고, 유예린은 가해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는 데 성공했다.

직후 유예린은 안정을 찾았고, 흑사는 힘의 소모를 멈췄다.

여태까지 설천위에게서 무리하게 끌어다 사용한 영력의 소모가 멈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력의 여분은 어디로 향하겠는가?

당연히 원래의 주인이다.

[크롸라라라라라라!!]

포효하는 패융의 거체가 상대를 덮친다.

지칠 대로 지친 상대는 제대로 흘려 내지 못하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 낸다.

그리고 그런 상대에게 파고든 설천위의 도가 그 팔을 잘라 낸다.

[노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냐!]

패도적인 기세로 몰아붙이던 와중에 갑작스레 몸을 키운 흑룡의 공격.

그 직후 이어진 인지하기 힘들 정도의 자연스러운 일격.

예상치 못한 연계에 당해 팔 하나를 내주게 된 소궁주가 악을 썼지만, 설천위는 코웃음과 함께 도를 세웠다.

“말했을 텐데?”

분명히 말했을 거다.

“짓밟아 준다고.”

흑사로부터 영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인과의 싸움에서도 크게 유용한 것이 설천위의 영력인데.

하물며 마(魔)와의 싸움이라면.

유예린의 안전이 확보되어 조금 무리하더라도 눈앞의 적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하는 게 우선이 된 상황이라면.

“최대한 빨리 끝내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후 전신에 영력과 패기를 휘감은 설천위의 도가 소궁주를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눠 버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고마워요.”

“아닙니다!”

빠릿빠릿한 대답과 함께 물러나는 무림맹 남양 지부 평대원의 뒷모습을 짧게 바라본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거의 겁먹은 수준인 경직된 반응이지만, 뭐 그럴 수 있지.

어제 야간 순찰조라 싸우는 모습을 전부 봤다고 했으니까.

이제 겨우 이류에 턱걸이를 할까 말까 한 수준이니 겁먹을 만도 하지.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내가 참 착한 사람…….

[쯧쯧, 어찌 겁먹지 않고 배기겠느냐?]

[인간이 아니라곤 하나 사람의 형체를 한 것을 그리 썰어 버리는 것을 보았으니 무섭지 않을 리가 있느냐?]

아니, 그게 뭐요.

그놈이 업보를 쌓은 거지.

시간 끌려고 아득바득 버티는데, 조금 화풀이할 수도 있지.

[네 녀석은 네가 정파라는 사실을 항상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손속이 어지간한 사파 저리 가라이니, 쯧쯧.]

“아니, 뭐 저만 나쁜 사람인가? 이 정도는 다들 하죠.”

혼들의 타박에 억울함을 호소한 설천위가 고개를 돌려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 중 유일한 정파 출신을 바라봤다.

설천위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현태중은 즉답했다.

[없다.]

“네?”

[어떤 정파인이 대놓고 그리 피 냄새가 짙게 일 처리를 한단 말이냐?]

어, 아니었어?

게임에선 하나같이 다 죽이기만 했는데?

[네 밑에 있는 그 중처럼 극단적으로 불살(不殺)을 지향하진 않더라도 피에 손을 묻히는 것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이 정파다.]

“……진짜요?”

[진짜다.]

[쯧쯧, 내가 그리도 자비에 대해 말했거늘.]

아니, 소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말하는 자비는 죽음이잖아요.

지금 이 대화에 끼면 안 되지.

이 이상 길게 말해 봤자 자신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몸은 멀쩡해?”

“네, 신의께서 만들어 주신 약이 참 잘 듣네요.”

침대 위에 앉아서 작게 웃는 유예린.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가볍게 끓여 낸 차를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은 여러모로 많지만…….

“고생했어.”

쓸데없는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다 아는 소리니까.

굳이 잔소리가 될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유예린에게 미지근한 차를 내어준 설천위는 다시 의자에 앉으려고 일어섰다.

그리고.

“맞아요.”

그의 소매를 붙잡은 유예린이 작은 미소와 함께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니 칭찬.”

“……칭찬?”

“응.”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

그 눈빛에 가만히 유예린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작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었다.

“그래, 잘했어. 대신 다음엔 조금 덜 다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응.”

유예린의 부드러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는 설천위.

그 손아래에서 작게 미소 짓는 유예린.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유예린의 볼이 살며시 달아올랐다.

* * *

“언니! 괜찮아요?”

“응.”

남양 지부에서 짧게 휴식을 취한 후, 복귀를 선택한 설천위는 자신을 무시하고 달려가는 부하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권력이란 부질없는 것이야…….”

“천위,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멀쩡해 보이는군.”

“어, 멀쩡하지.”

서하영의 뒤를 따라 다가온 철백에게 피식 웃으며 대답한 설천위는 살짝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이를 바라봤다.

“설천위 단주님, 오셨습니까.”

“네. 맹주님의 호출인가요?”

“몸이 불편하시다면 휴식을 취한 후에 오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부단주는 쉬어야 하지만.”

“맹주님께서는 단주님만 찾으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서하영과 철백에게 눈짓하고 곧바로 여인의 뒤를 따랐다.

무림맹주의 직속 부하.

이 무림맹에서 맹주는 당연히 단(團)을 맡고 있지 않다.

맹주는 말 그대로 이 맹의 주인.

즉, 무림맹 전체를 통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실제로 단주급 이상의 무인에게도 명령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맹주에게만 있다.

물론, 위급 상황일 때는 총군사(總軍師) 제갈진천도 명령권을 가질 수 있지만, 조건이 꽤 빡빡하다.

이렇듯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무림맹주이지만, 자고로 권한만으로는 권력이 유지되지 않는다.

그 권한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권력은 돌아가고 유지된다.

그걸 위해 무림맹주는 자신의 휘하에 직속의 대(隊)를 두고 있다.

눈앞의 여인은 그 대(隊) 중에서도 정근대(正根隊) 소속의 인물일 것이다.

맹의 회의가 열리는 무림맹주가 머무는 정근각(正根閣)에서 일하는 이들.

주로 행정적인 업무 처리와 맹 내부에서 무림맹주의 손발 역할을 맡는 이들.

……은 표면적인 것이고.

[까득.]

뒤로는 꽤나 구린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맹주의 충견들이다.

이를 악무는 현태중을 작게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 설천위는 가만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아마 현태중이 갑자기 발작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충분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이니까.

뭐,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의 한(恨)을 풀 날도 그리 멀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恨) 하니까 생각난 건데…….

‘……잘 있나?’

여러모로 써먹으려고 거뒀다가 사는 게 바빠 살짝 잊고 있던 친구들이 있는데.

‘뿌우!’

……이건 전력으로 삐졌구먼.

내부를 짧게 관조한 결과, 볼이 한껏 부푼 청아의 모습을 확인한 설천위는 빠르게 포기했다.

이건 짧은 시간 안에 못 풀어 준다.

아니, 그래도 자주 밖으로 꺼내 줘서 마음껏 놀게 해 줬는데 왜 저리 불만이 쌓인 거지.

뭐…… 수련이다 뭐다 바빠서 자주 못 놀아 주긴 했지만.

걔가 나랑 못 놀았다고 삐질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삐져야 할 건 처음부터 잊힌 것처럼 지내던 그 녀석인데, 그 녀석은 정작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거참.

뒷머리를 긁적이며 여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무림맹주실.

그곳에서 잠깐 기다린 설천위는 여인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참, 생각보다 자주 보는군. 설 단주.”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맹주에게 짧게 포권으로 인사한 설천위는 그의 눈짓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딱히 긴장할 건 없네. 자네의 노고를 치하할 생각으로 부른 자리일 뿐이니.”

“긴장한 적은 없습니다만.”

“허허, 그런가?”

허허롭게 웃은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쓸었다.

“자네의 성과에 따라 흑룡단에는 추가 지원이 이루어질 걸세. 이번에 꽤나 거물을 건져 올려 다른 단에서도 흥미를 가지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음, 다행이라면 왜인가?”

“그래야 놈들을 금방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음, 그리 생각하면 그렇구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슬쩍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흑룡단에 추가로 지원될 예산일세.”

“벌써 편성이 끝난 것입니까?”

“조금 빠르게 처리한 감이 있네. 어쩔 수 없었거든.”

“예?”

어쩔 수 없어?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설천위가 종이를 들고 그 안에 적힌 꽤나 큰 액수에 살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할 때.

맹주는 품에서 종이 하나를 더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자네의 흑룡이 부순 민가 피해의 배상액일세.”

“……예?”

“허허, 우리 중엔 이렇게 화려하게 싸우는 이가 없어 이런 적은 나도 첨이야.”

그게 무슨…….

맹주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설천위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 사이를 두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잘못 봤나?

숫자가 잘못 적힌 것 같은데?

“허허, 임무를 성공적으로 처리하고도 예산이 줄어드는 건 내 처음 보네.”

이 양반, 지금 좋아하는 거지?

아주 그냥 좋아 죽는 것 같은데?

“자네가 흑룡단을 세우며 말한 그 의지를 높게 사서 임무 중에 발생한 민간 피해는 그 단이나 대가 직접 배상하기로 정했네.”

“……그. 렇. 군. 요.”

아, 말이 딱딱 끊긴다.

아.

‘패융, 암천룡은 앞으로 금지다.’

흑룡단의 예산이 압도적인 흑자로 돌아서지 않는 한, 흑룡단에 더 이상 흑룡은 없다.

애들 밥은 먹여야 할 거 아니야.

“자네의 드높은 의기를 내 높게 사는 바이니 감사하지 않아도 되네.”

……이 양반 콱 찌를까?

* * *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거지라는 소린가?”

“거지라니. 임무지로 이동할 때 수련을 위해 달려갈 뿐이야.”

“말도 못 빌리는 단(團)이라니…….”

아예 마구간이 있는 곳도 있던데…….

서하영의 착잡한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예산이 오히려 깎인 데는 자신의 죄가 거의 십 할이니까.

“십할.”

“네?”

“아니, 별거 아니야.”

빌어먹을, 일단 임무를 더 해서 구멍 난 예산부터 메워야 한다.

단으로 떨어지는 예산에는 임무 수행 중 경비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시 운용되는 자금도 포함되어 있다.

즉, 단 내부에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예산에 들어 있다는 소리.

게임에선 예산이 바닥을 치면 목검도 못 구해서 수련을 못 할 정도가 된다.

물론 그 정도는 거의 고의적으로 트롤을 하고 다녀야 가능한 수준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더 비정한 법.’

[암천룡] 상태의 패융이 몇 번만 도시에서 더 날뛰면 단숨에 그 지경까지 떨어질 자신이 있다.

그러니 암천룡은 진짜로 봉인.

혼을 상대로 밀어붙일 때 좋긴 하지만, 안 쓰려면 안 쓸 수 있다.

문제없어.

음음.

그러니 일단…….

“움직여!”

수련부터 시키자.

몸을 움직이면 잡념이 사라지는 법.

물론, 잡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람이 배고픔을 잊을 수 있게 되진 않는다.

여기에서 잡념을 지워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건 무해뿐이다.

여하튼 고된 수련으로는 배고픔을 잊을 순 없겠지만……. 맛없는 걸 맛있게 먹는 건 가능해진다.

수련이란 이리도 가치 있는 것이지.

힘을 더 뽑아내기 위해 영역(靈域)까지 펼쳐 단원들을 굴리던 설천위는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에요.”

“……성 단주님?”

누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