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화
312화-꽃은 피어오른다 (5)
살존(殺尊)은 어째서 오존(五尊)이라는 지고의 경지로 인정받는 것일까.
살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암살의 특성상 더 강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그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그 경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은가?
경지는 대략적인 강함을 의미할 뿐 승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 강함을 오존급의 존재에게.
전대 고수들이 은퇴하고, 현 무림의 거목인 불존(佛尊) 법신이 소림의 방장 자리에 오르며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그때 다음 십대고수가 어찌 될까 호사가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때.
무려 두 명의 입에서 증언이 나왔다.
사존(四尊)이 아니라 오존(五尊)이 되어야 한다고.
이 무림의 역사에서 한 시대에 네 명의 현경급 고수가 있다는 것도 대단한데, 무려 한 명이 더 있다는 증언.
그 증언의 주인공이 바로 살존이었다.
그 누구라도 암살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살수.
다만 그녀의 실력은 항상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목격자를 남기는 암살 따윈 삼류나 하는 짓이니까.
그녀의 암살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결코 범인을 특정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최근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그 무위를 만천하에 드러낸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무림학관과 흑룡학관의 친선전이었다.
그녀는 살수로서의 역량만으로 오존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라고.
무인(武人)으로서의 역량도 충분히 오존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여실히 증명해 냈다.
무려 넷이나 되는 화경급 고수를 여유롭게 막아 내는 것으로.
힘의 증명.
그 이후로 그녀의 무력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던 이들은 전부 사라졌다.
살존(殺尊)이란 이름이 다시금 무림에 뚜렷하게 새겨진 것이다.
그리고 수월(水月)은 그녀의 독문절기 중 하나다.
그것도 그녀가 가장 자주 그리고 유용하게 쓰는 전투 기술.
무엇보다 암살자의 힘을 정면 승부까지 끌어들인 기술.
그리고 유예린은 그 기술을 손에 쥐었다.
졸업하고, 그 얼마나 갈고닦았던가.
어렴풋하게 손에 닿았던 경지를 향해 얼마나 이를 악물고 나아갔던가.
그렇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녕 기술을 갈고닦는 최고의 무대는 실전임을.
흐려진 세상 속에서 유예린은 걸었다.
자신의 존재조차 흐려진 이 세상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
행동을 하겠다는 사고(思考)뿐.
살의(殺意)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의지를 품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 그저 단순한 생각일 뿐이다.
여기서 저기로 간다.
검을 휘두른다.
그런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고만을 품는다.
의지(意志)를 지워 망아(忘我)에 이르고.
망아(忘我)에 이르러 은(隱)의 극(極)에 도달하니.
의지 없이 그저 물 위에 비치는 달이 되리라.
그것이 바로 수월(水月).
다만,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정신적인 환상의 기술 같은 건 아니었다.
발걸음부터 손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사각으로 향하며.
내공을 특수한 방법으로 운용해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절기다.
즉, 극에 이른 은(隱)의 이해도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비현실의 극치.
그 비현실 앞에서 소궁주는 침음성을 삼켰다.
궁에서는 본 적 없는, 실로 말도 안 되는 은신술.
아니, 궁 밖이라고 해서 쉽게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이런 기술을 흔히 볼 수 있다면, 이 무림에서 살수의 길을 걷는 이가 그리 적을 리 없을 테니까.
집착에 가까운 연구.
자학에 가까운 수련.
이상을 현실로 체득시키는 정신 나간 과정이 수반되어야만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일 테니까.
감탄할 새도 없이 옆구리에서 느껴진 통증에 소궁주는 거칠게 창을 휘둘렀다.
주변 일대의 기(氣)를 일그러트리는 영력과 내공의 돌풍.
창을 휘감고 공기를 찢어발긴 돌풍이었으나, 결국 가른 것은 허공일 뿐.
‘……빠르기까지.’
아니, 자신이 느린 것인가.
옆구리를 슬쩍 바라보니, 이미 상처가 벌어진 상태였다.
베인 순간에 눈치채지 못하고 베인 뒤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흐르고 난 뒤에야 알았다는 증거.
베이는 그 순간조차도 은신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영력조차 감출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군.’
영력이란 보통의 무인은 결코 감출 수 없는 기운이다.
애초에 제대로 느끼질 못하는 이가 대부분이니 당연하다.
풍문으로 오존(五尊)의 일인인 살존(殺尊)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듣긴 했으나.
그건 정녕 괴물의 영역에 들어간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고작 이제 스물 남짓한 어린 여인이 실현해 내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세상이란 언제나 기이하군.]
그리 짧은 세월을 산 것도 아닌데 이리도 처음 보고 겪는 것이 많다.
이 무림이란 것이 그렇다.
어제 하나에 익숙해지면, 내일 낯선 둘을 만난다.
그것이 사람이든, 괴이든, 짐승이든 간에.
이 세상은 그리도 낯선 것투성이다.
인간은 그 낯섦에 결코 적응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부적응은 공포로, 고통으로 이어진다.
쿵!
창을 강하게 바닥에 찍은 소궁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나는 제5 소궁주.]
소궁주의 앞에 놓인 숫자는 강함의 순위가 아니다.
그저 만들어진 시기를 헤아리는 것뿐.
그렇기에.
[궁주께 받은 이명은 가해(可解).]
제3 소궁주에게는 없는 이명이 그에게는 있다.
창을 눕히며, 가해의 두 눈이 섬뜩하게 일렁인다.
천희만락궁의 소궁주는 모두가 마(魔).
악귀와 인간의 결합체.
인간이면서 악귀인 존재.
인간도 아니고, 악귀도 아닌 존재.
그리고 가해는 그런 자신의 존재를 이해(理解)했다.
그렇기에 가해(可解).
존재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받아들인.
[너를 제거하겠다.]
마(魔).
어깨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예기.
아니,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파고들었다가 나가는 도중이다.
허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들어오는 도중이건, 나가는 도중이건 그 끝에 검을 쥔 주인이 있으리란 것은 명확하니까.
막대한 영력을 품은 창이 그의 사선 방향으로 찔러 들어간다.
허나 그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지도, 패도적인 기세를 품은 것도 아니다.
그저 찌르기.
명확하게 방향을 정하고 찌른 찌르기일 뿐이다.
허나.
[이해했다.]
적이 그 자리에 있음을 이해(理解)한 창은 명확하게 그 존재를 향했고.
유예린의 어깨를 관통했다.
자상이 생겼던 곳을 꿰뚫은 창.
그 끔찍한 고통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올 상황이었으나 가해는 망설임 없이 창을 뽑았다.
비틀어 상처를 벌리는 불필요한 동작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理解)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고통에 머뭇거리지 않으리란 것을.
멈추지 않으리란 것을.
즉시 당긴 창으로 목을 노리던 비수를 튕겨 낸다.
소검과 달리 던지는 형태의 공격.
튕겨 나가며 울리는 맑은소리.
직후 파고드는 소검을 막아 내는 순간, 가해는 이해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이미 상대가 없음을.
‘……대단하군.’
그렇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해는 무공이 아닌 술(術)의 영역에 있는 힘.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에 있는 힘이다.
그런 힘의 영역을 가볍게 벗어나는 은신이라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은신을 파훼하기 위해선.
[언제든 덤벼라.]
자신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필요가 있음을.
상대가 도망치면 어쩌느냐고?
그럴 리 없다.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적은 자신이 또 다른 소궁주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자신의 아군에게 짐을 더 지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 될지라도.
[네 고통을 내가 끝내 주마.]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그 고통을.
내가 끊어 주마.
* * *
[후욱! 후욱!]
더욱 거칠어진 숨.
정녕 오랜만에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제3 소궁주는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이 사고가 이어지질 않을 테니까.
‘내가 느려지는 것인가, 아니면 도(刀)가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인가.’
둘 다일 수도 있나.
설천위의 압도적인 공세를 받아 내며 소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저 괴물은 자신과 무(武)를 겨누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다른 수를 쓰고 있었다.
흑룡을 움직이고.
검은 관을 만들어 움직임을 제약한다.
영력을 다루는 데 익숙한 자신이기에 급하게 펼쳐진 술법의 틈을 파고들어 벗어날 수 있긴 했지만…….
‘만약 제대로 펼쳤다면…….’
도저히 단숨에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막는 무인이 하나 있고, 이자가 뒤에서 술법을 펼쳤다면 아마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을 거다.
상대의 술법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그야말로 괴물.
무공 자체는 초절정 수준이지만, 악귀와의 합일로 화경급의 존재가 된 자신이 이리도 버거운 상대라니.
거기다.
‘……가해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아까 허겁지겁 달려온 혼에게 가해의 인상착의를 들은 놈의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면 그럴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런 것인지.
공격이 조금씩 조급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힘이 빠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 흑룡의 거친 견제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상대의 위기를 짐작했을 때도 부동심을 유지하던 녀석이 흔들린다는 것은 가해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할 정도다.
가해(可解)의 능력은 이해.
대상과 일정 시간, 일정 횟수 이상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한번 이해를 마치면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워진다.
설천위의 반응을 보면 아마 가해가 상대하고 있는 인물은 유예린일 터.
은검(隱劍)이라 불리는 그녀는 이해당하는 순간, 숨긴다는 선택지를 잃게 된다.
암경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그녀에게는 막막한 벽이 될 터.
심지어 가해는 그런 이해를 하지 않고도 그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조급해질 만하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상대가 가해의 능력을 알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성립되어야 한다.
가해의 인상착의만 듣고 유추가 가능할 리가 없는데.
대체 왜?
어떻게?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소궁주는 털어 냈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상대의 공격이 허술해졌다는 점 하나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지쳐 가는 자신이 상대의 공세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이 틈을 이용해 상대에게 깊은 상처 하나만 남기면 시간을 끄는 게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한 번만……!
“후.”
검을 쥐고 날카롭게 상대를 살피던 소궁주는 설천위가 토해 내는 숨소리에 움찔 놀랐다.
여태까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공격을 퍼붓던 녀석의 도(刀)가 멈췄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에 여유가 담겨 있다.
마치 큰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죽겠군.”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설천위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무슨 짓이지?]
“뭐가?”
[갑자기 대화나 하면서 놀자는 건가?]
“뭐, 비슷한데?”
고개를 끄덕이며 설천위는 도를 어깨에 턱 걸쳤다.
“급한 불은 껐거든.”
[……급한 불을 껐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설천위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던 소궁주는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약해져 있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설천위의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마치 다른 일에 큰 힘을 쓴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여하튼 이제는 제대로 간다.”
영문을 파악 못 한 소궁주가 얼굴을 구기는 사이, 소궁주를 향해 도를 겨눈 설천위의 기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짓밟아 주마.”
패도(覇道)를 걷는 자.
그 존재감이 소궁주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