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311화-꽃은 피어오른다 (4)
검을 세운다.
순전히 본능에 따른 반응.
심장을 파고든 창의 앞을 가로막은 검은 수천수만 번 반복한 대로 창을 그대로 흘려 냈다.
동시에 옆으로 몸을 틀어 그 창이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 낸다.
빠져나가는 창.
허나.
“흡!”
그 뒤를 따라오는 풍압에 유예린은 아예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창을 찌르는 것으로 생기는 바람 정도야 내공을 두른 몸으로 견뎌 내도 되겠지만…….
본능이 외쳤다.
위험하다고.
[까다롭군.]
감정이 없는 눈으로 창을 찔러 넣던 상대의 눈빛이 변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방어에 흥미가 생긴 것일까.
공허했던 눈동자에 미묘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상대는 창을 당겨 자세를 갖췄다.
마치 서하영을 보는 것 같은 깔끔하기 그지없는 자세.
그 자세를 확인한 순간, 유예린은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뿜어내는 영력과 달리 무(武)를 갈고닦은 달인임을.
그래.
‘……설 공자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무(武)를 갈고닦아 영(靈)과 섞어서 보통의 무(武)와는 다른 무(武)를 완성한 설천위.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한다면.
‘상대하기 까다롭겠군요.’
머리가 아파 올 정도다.
자신이 아는 무(武)의 상식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공격과 방어가 무자비하게 펼쳐질 테니까.
모든 상황에 맞춰 대응해야 할 유연함이 필요해진다.
육체는 물론, 사고도 유연해져야 한다.
그러니 머리가 아파 오지 않을 수가 있나.
어느새 거리를 다시 좁혀 오는 상대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숨을 고르며 검을 세웠다.
창을 상대로 거리를 벌리는 것은 하책(下策).
제자리에 서서.
아니,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유예린은 검을 움직였다.
보통의 검보다 검신이 짧은 검.
애초에 자신에겐 상대를 향해 파고든다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기에.
* * *
‘괴물이로군.’
설천위와 마주한 제3 소궁주는 검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영력을 뿜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건 설천위의 도(刀)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압박하는 영력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흑룡까지.
소문으로 들은 거대한 흑룡은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아니.
‘거대한 흑룡이라면 차라리 더 상대할 만하겠군.’
그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 눈앞에서 달려드는 이 작은 흑룡보다 더 상대하기 쉬웠을 것 같다.
[크르르르!]
시종일관 낮은 울음소리만을 흘리며 끊임없이 파고드는 흑룡.
덕분에 신경은 끊임없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 명의 적에게 합공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버겁다.
다른 소궁주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못 버티고 죽을 수도 있겠군.’
눈앞의 이 괴물은 자신의 강점을 깡그리 무시한다.
마(魔)이기에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장점.
혼의 잠식과 영력을 통한 방어.
이쪽이 뿌리는 음의 영력은 인간의 혼을 좀먹는다.
얕게는 잡념을 늘리고, 깊어지면 잡념이 번뇌가 되어 환(患)이 된다.
마음과 혼이 병들기 시작하면 그 육체가 그에 따라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거기다 영력을 통한 방어는 상대의 검기와 검강을 약화시킨다.
짙게 깔린 영력의 저항을 상쇄하느라 무기에 두른 검기나 검강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걸 이겨 내려면 더 많은 내공을 사용해야 하고, 이건 내공의 빠른 소모로 이어진다.
여러모로 상대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힘이다.
물론, 이쪽의 공격은 정통적인 무인의 공격만큼 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장점들이다.
그렇기에 무인과의 전투는 시간을 끈다는 전제하에 무조건 자신들에게 유리해야 정상이거늘…….
‘오히려 이쪽이 밀린다.’
무(武)의 수준은 오히려 엇비슷한데 영력에서 이쪽이 크게 밀리고 있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는 수준.
겨우 자신의 존재와 영역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수준이었다.
영력을 이용한 장점이 전부 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상황.
저 괴물 같은 영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쪽의 혼을 잠식해 오고 있었고.
‘무겁군.’
영력과 내공을 섞어 검기를 일으킨 검은 상대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마치 납을 단 것처럼 무거워진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그 격의 차이를.
이쪽의 발악이 상대에겐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음을.
그래.
‘……궁주님 같군.’
그 괴물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녀석에게 보이는 것 같다.
다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리 버티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일 테니까.
거기다.
몸을 억누르는 압도적인 기세와 달리 공격의 날카로움은 그럭저럭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아직 부족함이 많다는 뜻일 터.
‘버틴다.’
있는 걸 전부 쥐어짜면 그 녀석이 합류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3 소궁주는 희망을 품고 검을 움직였다.
검으로는 설천위의 공격을 막아 내고.
쥐어짠 영력으로는 그의 기세를 필사적으로 밀어내 숨구멍을 튼다.
그 처절한 발악에 혀를 내두른 천마는 가만히 설천위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씩 흐트러지는 숨.
미묘하게 어긋나는 움직임.
‘……내상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군.’
설천위 특유의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회복했다고는 하나 애초에 부상 자체가 너무 깊었다.
저 멍청한 놈은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고통을 참고 움직일 수 있었기에 그리 티가 나진 않았지만.
‘죽지 않은 게 다행인 상처였거늘.’
임독양맥이 뚫리지 않은 상태로 무리하게 화강(化罡)을 만들어 냈다.
그걸 써서 적을 불살라 버리는 것 자체도 무리였는데.
그에 그치지 않고 단주패에 글자까지 새겼다.
그것도 상당히 멋들어지게.
설천위가 만든 단주패를 본 사람들 중 눈이 있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안에 담긴 힘과 경지를.
문제는 설천위가 그 힘과 경지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그것을 끌어냈다는 점이었다.
내장이 진탕되는 건 물론이고, 혈도와 단전까지 뒤틀렸다.
보통이라면 수년 단위의 요양이 필요할 정도의 크나큰 부상이다.
설천위이니까 그나마 멀쩡히 움직이고 무공도 쓰고 할 수 있는 거다.
설천위가 [암천룡(暗天龍)]이라 칭하는 거대한 패융과 [패룡기(覇龍氣)]라 부르는 힘을 쓰지 않는 건 스스로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일 터.
유예린의 위기에 조급해진 마음에 억지로라도 힘을 끌어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구나.’
지금 억지로 힘을 끌어올렸다가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아니, 눈앞에 있는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또 하나의 적을 처리하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옳았다.
눈앞의 적은 지금의 설천위도 충분히 할 만한 상대.
그저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다.
폭발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니 공격에 위력이 부족해 빠르게 끝내지 못할 뿐이다.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서서히 영력으로 좀먹어 나가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문제는…… 유예린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데.
‘아니.’
버티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군.
유예린이 있는 방향을 보는 천마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 * *
확실하게 적의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피를 닦지 않는 건가?]
생채기가 늘어만 간다.
상대의 도발인지 조롱인지 모를 물음에 유예린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상대의 공격을 막는 데 온 정신을 기울여야 했으니까.
기술의 수준 자체는 별 차이가 없었다.
만약 기술에서마저 상대가 우위를 점했다면 이렇게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으리라.
문제는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기술에서는 동격.
속도는 엇비슷하나 이쪽이 조금 밀리고.
힘은 확실하게 밀리며.
‘……심해지는군요.’
주위를 좀먹는 기운은 확실하게 상대가 우위에 서 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거슬림이 생기고.
상대를 관찰하는 도중에 흐려짐이 생긴다.
육체를 좀먹어 가는 기운.
아니.
‘……혼인가요.’
혼을 좀먹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설천위의 곁에 있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다만, 그 결이 다르다.
실전과 연습의 차이.
정말 이쪽의 혼을 찢어발기려 파고드는가와 위협만 하느냐의 차이.
그 차이가 명백히 느껴진다.
허나.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그럼에도 후자인 설천위의 기운이 더 위협적이었다.
이쪽을 해할 생각 없이 그저 위협만 가하던 것인데도.
혼에 새겨진 감각이 말한다.
지금 자신을 옥죄는 힘은 별거 아니라고.
그 사람의 것과 비교하면 얼마든지 털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이곳에 당신 말고도 온 사람이 있나요?”
[물론이다.]
“그렇겠죠.”
호흡을 가다듬으며 유예린은 흐트러진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치열한 공방 끝에 호흡을 고르는 시간.
상대도 정녕 악귀는 아닌 듯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는 증거.
“그렇지 않다면, 설 공자가 아직도 안 왔을 리가 없죠.”
이만한 영력의 파동을 설천위가 못 느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는 자신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다.
아니, 어쩌면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
자신이 버티고 있는 상대의 눈빛을 보건대 같이 온 이가 딱히 이자의 상급자일 것 같진 않다.
그를 언급하는 눈동자에 위축되는 감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설천위가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소리는…….
‘부상의 여파가 남아 있는 걸까요?’
분명 확실하게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작게 자신을 질책하며 유예린은 검을 세웠다.
검을 세우며 밀려 내려간 소매 사이로, 그녀의 팔이 드러난다.
본래라면 결코 드러낼 일이 없는 맨살.
그 맨살에는 보기 흉한 흉터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찢어지고, 꿰뚫린 흉터부터 시작해 베이고 부러진 흉터까지.
설천위에게 사랑을 말하면서도 아직 그의 품에 안기지 않은 이유.
“이 이상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겠죠.”
호흡은 이미 전부 돌아온 상황.
자신도 상대도.
다시 싸울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자신은 단순히 시간 벌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여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순 없지.
몸 안에 담긴 내공을 빠르게 돌리며 유예린은 움직였다.
서서히 몸을 감춘다.
[호오.]
은(隱)의 극의.
보는 앞에서 모습을 감추는, 초인조차 뛰어넘은 괴물의 기술.
[수월(水月)]
그것은 물 위에 비춰진 달과 같으니.
잡을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무형의 달이니.
눈으로 보는 달은 실체가 아니니.
[흡?!]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
자신을 덮쳐 온 유예린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던 소궁주는 손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 있는가.
[어찌?]
“혼조차 숨기느냐 물으시는 건가요?”
상대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유예린이 서늘한 눈빛으로 검을 겨눴다.
드러난 팔에 새겨진 흉터가 괴물처럼 뻗어 나와 검을 향한다.
그 안에 새겨진 것은 노력인가, 아니면 자학인가.
그 누구도 둘 중 어느 하나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겠으나, 재능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의 뿌리임은 확실했다.
챙…….
울려 퍼지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내공과 극한까지 조율을 시작한 육체.
그 둘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파문.
[음……!]
단숨에 시야에서 사라진 유예린의 모습에 습관적으로 영력을 움직인 소궁주의 침음성이 한층 더 깊어졌다.
영력조차 제대로 감지할 수가 없다.
대체 어떤 무인이 영력마저 감추는 수련을 한단 말인가.
아니, 수련을 한다고 해도 이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초절정 수준의 무인에게 이런 기예가 가능할 리가…….
[……!]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설에 두 눈을 부릅뜨는 소궁주.
그리고.
“잡념이 많군요.”
그의 어깨를 관통한 소검을 놓는 유예린의 모습이 또다시 흩어진다.
우웅!
동시에 울기 시작하는 소검에서 뿜어져 나온 내공이 그 육체를 무너트리기 위해 파고든다.
은(隱)과 음(音)의 조합.
전신을 옥죄는 영력 속을 물 위에 비친 달이 되어 노닐며, 유예린은 깨달았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꽃은 아무래도 저인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