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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11화 (311/624)

제311화

310화-꽃은 피어오른다 (3)

“쯧, 아직 다 못했는데.”

유예린에게 붙였다가 돌아온 흑사의 보고에 설천위는 혀를 찼다.

틈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몸을 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암영의적과 흑사를 붙여 줬던 건데.

“생각보다 더 무난하게 흘러갔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고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궁주를 자극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긴 하지만, 보고가 들어간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다.

확신과 추측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확신을 주지 않는다면 궁주는 움직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 괴물은 자신의 보신에 최선을 다하는 놈이니까.

‘승률은 2할 정도 되려나.’

사실 그것도 좀 높인 거긴 하지만.

현경(玄境)급 괴물은 아직 무리니까.

화경이 인간을 벗어난 초인의 시작이라면 현경은 그 초인의 극(極)이다.

워낙 크게 뭉뚱그려 말하는 거라 같은 현경 내에서도 급의 차이가 꽤 심하긴 하지만.

‘일격에 산을 무너트리는 고수’라는 전설을 실현할 수 있는 괴물들.

급이 낮으면 정상을 깎아 내는 정도이지만, 현경 내에서도 끝에 다다른 자들은 정녕 작은 산 하나 정도는 무너트릴 수 있다.

그만한 괴물이 현경이고.

이 무림에서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있는 정도로 소수다.

궁주는 그중 하나고.

몇몇 괴물들이 깨어나면 전장에 서는 최소 조건이 현경이 되어 버리는 끔찍한 사태가 도래하기도 하지만…….

그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최대한 대비하는 수밖에.

그래도 아직 몇 년 정도는 시간이 있으니까.

천희만락궁의 궁주 정도는 그 전에 해결해 놓는 게 좋겠지.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이 정도 건드렸으면 됐나.”

신도를 꽤나 해방했고, 지부도 꽤나 부쉈다.

놈들이 시간을 쓰면 복구될 피해이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췄다는 사실에 만족하자.

다만.

“위험은 없을 것 같네.”

천마의 제안 때문에 행동하긴 했지만,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움직인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천마는 위험 속에서 성장하라고 하긴 했지만…….

‘궁주는 너무 위험하긴 하지.’

뒤를 남겨 놓을 수밖에 없다.

궁주나 되는 괴물이랑 지금 부딪히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게임이 아니니까.

재시작이라는 선택지가 없는 이상, 안전이 최우선이다.

목숨이 하나라면 설령 게임일지라도 조심에 조심을 더해 움직이는데, 이쪽은 목숨이 달린 현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좋아. 일단 합류할까.”

대충 생각을 정리한 설천위는 도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마음을 꺾기 위해 일부러 잔인한 방식으로 제압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다.

피 냄새는 심하지, 보기에 안 좋지.

천희였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장면들인데.

……뭐 천희였을 때도 슬래터 무비 같은 건 잘 보긴 했지만.

설천위랑 천희 둘 다 잔인한 건 상관없는 성향일지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도를 정리하던 설천위는 옆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크큭.”

“……아직 안 죽었냐?”

출혈 때문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확실히 쇼크사의 걱정이 없으니 잘 안 죽겠네.

사지 중 무려 세 곳에 절단상을 입은 주제에 아직도 살아 있는 주교를 보니 고통이란 게 참 위험하다 싶다.

물론, 없으면 없는 대로 위험한 게 고통이기도 하지만.

도를 주교의 목 위에 올린 설천위는 주교를 내려다봤다.

“이제 즐거움 따윈 없는 지옥으로 떨어질 텐데, 감상은?”

“하! 우리는 죽어서도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뿐이다……!”

코웃음을 치는 주교.

고통이 없기에 웃음을 잃지 않는 주교는 하나 남은 손으로 몸을 일으키며 설천위를 비웃었다.

“네놈은 결국 그분의 손에 진정한 고통의 늪에 빠질 것이다……! 그분의 길을 막은 죄는……!”

“크다고?”

주교의 말을 끊으며, 도를 주교의 어깨에 천천히 박아 넣은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날붙이가 파고들고 있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움찔하는 게 사람이거늘.

“인간이 아니구나.”

“흥! 그분은 인간을 초월하신 존재!”

“아니, 너희를 말하는 건데.”

다시 도를 뽑아서 옆에 있는 천을 당겨 피를 닦아 낸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뼈만 남은 네 몸을 봐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네놈을 봐라.”

인간은 행복을 바란다.

다만 그것은 불행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불행을 모르는 이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이는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열흘을 굶어도 배고픔을 모르는 이는 음식을 찾지 않는다.”

모르기에.

“혹한의 추위에 떨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이는 따뜻함을 찾지 않는다.”

모르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기에 그들은 불행하지 않다.

허나.

“너는 자신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구나.”

설천위의 손이 주교의 머리 위에 닿는다.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네 몸을 봐라.”

뼈만 남은 앙상한 몸.

베어 내는 과정에서도 걸리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근육은 물론 뼈마저도 성하지 않다는 증거.

“너는 인간임을 포기한 것이다.”

약에 빠져.

궁주의 감언이설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린 순간, 인간임을 포기한 것이다.

“끄윽?!”

설천위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간 영력과 패기가 주교의 혼을 침식한다.

혼조차 파괴하는 극악의 저주.

패룡의 낙인.

그것이 주교의 몸을 침식하고.

“끄아아아아악!!”

강렬한 비명과 함께 주교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약해진 몸이니 조금 있으면 숨이 끊어지겠지.

물론, 죽고 나서도 그 혼은 꽤나 고통 받다가 소멸하겠지만.

“슬슬 갈까.”

마무리도 했고.

괜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지.

“끄륵.”

설천위가 몸을 돌리는 순간, 숨이 끊어진 주교의 몸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전혀 상관없기에 그대로 걸어가려던 그 순간.

[잔인하군.]

지척에서 들려온 소리에 설천위의 영력이 반응했다.

강렬하게 일어나 상대를 후려치는 힘.

그 힘을 담담하게 받아 내는 존재.

[과격하기까지 하군.]

설천위의 영력을 털어 낸 존재는 검을 휘둘렀다.

단숨에 베이는 주교의 혼.

[최소한 고통 없이 보내 주마.]

단숨에 주교의 혼을 소멸시킨 존재를 확인한 순간, 설천위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소궁주인가.”

[호오, 나를 아는가?]

“몇 번째냐.”

[……그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말해 줄 생각은 없나 보군.”

[음,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뒷머리를 긁적인 존재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인간의 것이 아닌,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설천위를 직시한다.

[아무래도 네 녀석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 것 같진 않군.]

목소리에 살기가 서린 순간.

설천위는 도를 세웠다.

단숨에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검기.

얼추 막아 내긴 했으나, 자잘한 것을 막지 못해 곳곳에 난 생채기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허어.]

그리고 그런 설천위의 모습에 감탄한 혼들이 상대를 바라봤다.

[소궁주라. 천위, 네가 말한 천희만락궁의 소궁주라는 것이냐?]

[몇 번째냐고 물었으니 이런 녀석이 몇이나 있다는 소리구나.]

천마와 현태중의 감탄에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

[노인네들이 시끄럽군.]

“현태중 아저씨는 젊은 나이에 죽었거든?”

[……자랑이 아니다. 천위.]

“아.”

어설픈 농이나 던지는 설천위의 모습에 소궁주는 더욱 검에 예기를 더했다.

[아버지께서 혼의 소멸을 감지해 우리를 보낸 것이 정답이었구나.]

“……혼의 소멸.”

그게 있구나.

게임에서는 전혀 나온 적이 없어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최대한 여유를 찾으려던 설천위는 소궁주의 말에 결국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경로로 들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하긴, 여태까지 혼을 다루는 걸 너무 치트키처럼 써먹긴 했어.

무림의 주류가 무인인지라 잘 써먹었긴 했지만, 슬슬 부딪힐 때가 됐지.

놈들이 마냥 숨어만 있을 리 없으니까.

“자기소개를 할 시간도 없다면서 친절하게 방법은 말해 줄 여유가 되는 건가?”

[흠, 그것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소궁주는 검을 설천위에게 겨눈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제3 소궁주다.]

“그렇구먼.”

……모르는 놈이다.

생긴 걸 보고 감이 안 잡힐 때 짐작했던 거지만, 역시 게임에서 나온 녀석은 아니다.

정보에서 이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설천위는 도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이면 될 일이다.

천천히 정보를 끄집어내 확실하게 짓밟으면 된다.

천희만락궁의 소궁주는 궁주와 같은 마(魔).

인간과 악귀의 결합체.

그중에서도 소궁주는 궁주가 실험을 통해 만들어 낸 존재들.

불안정한 상태가 약점이다.

대신 불안정한 만큼 출력이 높아서 화경급 수준의 무력을 가졌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자신의 전력이면 별 무리 없이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녀석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무(武)를 닦아 온 것이 아닌가.

고작 이 정도 녀석들한테 밀릴 이유가 없지.

[이쪽의 소개만 듣고 끝인가?]

“아아, 내 이름?”

되물어 오는 소궁주를 보며 히죽 웃은 설천위는 순순히 자신을 소개했다.

“설천위.”

[흑룡성이로구나.]

거봐, 바로 안다니까.

이 무림에 검이랑 도를 같이 차고 다니면서 혼까지 조지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어.

딱히 이름을 말하지 않았더라도 눈치챘을 거다.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대화를 해서 시간을 끄는 게 낫지.

[꽤나 여유 있는 눈동자구나.]

“조급할 이유가 없으니까?”

[흠. 그것도 그렇군.]

여유롭게 영력을 뿌리며 힘을 가다듬는 설천위의 모습에 검을 살짝 늘어트린 소궁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조급하게 만들어 주지.]

살짝 몸을 띄운다.

[이곳에 온 소궁주는 둘이다.]

그 순간 도약.

단숨에 거리를 벌리는 소궁주.

허나.

[크르르르르르!]

귀신처럼 따라붙은 설천위에게서 뻗어 나온 흑룡이 소궁주를 찢어발기기 위해 달려든다.

압도적인 위압감.

허나.

[흡!]

힘 있게 휘두른 소궁주의 검은 패융을 튕겨 내며 여유롭게 거리를 벌렸다.

그대로 옥상을 뚫고 건물의 지붕에 안착하는 소궁주.

그 뒤를 따라붙은 설천위는 지붕에 발이 닿는 순간 즉시 거리를 좁힌다.

거리를 좁혀 물어뜯는 것만을 노리는 움직임.

방어를 도외시한 그 공세에 소궁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흥분했군.’

과연, 대주교 쪽으로 향한 소궁주에게서 연락이 와서 자극해 봤더니 당첨이었나.

상대가 흑룡성인데, 이 반응이라면.

같이 온 여자는 아마 은검(隱劍)이라 불리는 유예린이겠지.

흑룡단의 부단주가 됐다고 하더니 함께 임무를 나온 것인가.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낸 소궁주는 검을 몸으로 당겼다.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무리하게 싸워 줄 이유가 없다.

시간만 끌면, 유예린을 처리한 소궁주가 이쪽으로 합류할 테니까.

그사이에 조급해진 설천위의 체력만 적당히 깎으면 자신들의 승리다.

소궁주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한 그 순간.

쾅!!

거력을 품은 설천위의 도에 소궁주는 눈을 껌뻑였다.

전신이 울릴 정도의 위력.

단순한 검기(劍氣)가 아니었다.

혼을 뒤흔드는 압도적인 영력이 담긴 일격.

마(魔)인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힘.

‘……조금 빡빡할 수도 있겠군.’

* * *

전신을 압박하는 기세.

그야말로 숨통을 조이는 공기 속에서 유예린은 움직였다.

어깨에 남은 긴 자상.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다.

지혈도 빠르게 했으니 출혈도 큰 걱정이 없다.

이 상처를 대가로 대주교라는 인간의 숨통은 확실하게 끊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다만 문제는…….

‘독하군요.’

숨 막히게 퍼지는 기운.

호흡하면 할수록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내공으로 밀어내고 있으나, 단순한 독(毒)이 아닌 듯 서서히 몸을 좀먹어 오는 기운.

도주는 힘들다.

‘……버티는 수밖에 없겠군요.’

소검을 꺼내며 유예린은 눈앞에 마주한 적을 바라봤다.

[빠르게 끝내도록 하지.]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창이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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