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304화-창단 (8)
“허…….”
검은 화염이 허공을 집어삼킨 마을.
그 마을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소천은 헛웃음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극양의 기운을 다루는 고수라도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것이 술법인가.”
단숨에 악귀를 태워 버리는 불꽃이라니.
술사는 이런 것까지 가능한 것인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압도적인 힘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소천은 감상을 털어 버리고, 발을 바삐 움직였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압도적인 힘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사, 살ㄹ…….”
“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에게 달려가 재빠르게 응급조치를 하는 소천.
하지만 상대의 상처를 살피는 소천의 눈엔 무력감이 깃들었다.
‘……무리군.’
상처가 너무 깊다.
지금 당장 약을 바르고 지혈을 한다고 해도 고통스러운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생존 가능성이 한없이 무(無)에 가까운 상황.
신의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상처에 대한 응급조치를 끝내고 수혈을 짚어 상대를 잠재운 소천은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악귀에 씐 사람에게 공격당한 이들.
까득.
“……개X끼들.”
소랑대와 아적대가 있었다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거다.
악귀에게 씐 사람이라고 해도 일반인.
무인인 자신들이 나서면 충분히 제압 가능한 수준이다.
내부에서 악귀에 씐 사람이 나오더라도 충분히 감당 가능했을 수준.
그 예로 자신은 움직이면서 멀쩡하지 않은가.
부대주급 이상의 정신력이라면 악귀의 술수에 쉽사리 당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결론적으로 좋게 흘러간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설천위라는 고위 술사가 자신들을 부리려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부대주급 정도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거란 소리다.
설천위의 소문의 반이라도 믿고 그를 따랐다면…….
자신을 향한 미지의 위협에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미안하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이의 눈을 감겨 줄 일도 없었을 텐데.
이미 손을 쓰기에 늦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의 눈을 손으로 쓸어내린 소천은 죄책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여태까지 참았지만, 이제 한계다.
이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항의하고 집법당(執法堂)에 고발할 것이다.
물론 이길 확률은 극히 낮지만…….
그런 작은 반항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깊게 다짐하며, 소천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아직도 다쳐서 도움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응급조치로 몇이나 살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만큼은 전부…….
“허?”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소천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랐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응급조치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것도.
‘……깔끔해.’
자신의 솜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방법으로.
예상치 못한 광경에 더욱 발길을 재촉한 소천은 이내 이 깔끔한 응급조치를 펼친 이를 만날 수 있었다.
“왔나?”
피가 묻은 손을 내공으로 씻어 내며 일어서는 설천위.
그의 물음에 소천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하군.’
아까 보았을 때와는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가.
아까 하늘 전체를 뒤덮은 그 불꽃.
아무리 단주급의 괴물이라고 해도 쉽사리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으니.
거기다 입가에 흐른 피를 훔쳐 낸 자국까지.
확실하다.
지금 흑룡성은 상당한 내상을 입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천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돕겠습니다.”
“고맙군. 거절하지 않겠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악귀가 일을 벌이자마자 설천위가 제압을 시작해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진 않았다.
1차 피해에서 끝났다고 해야 할까.
처음 악귀에 씐 사람과 그 주변에 있다가 피해를 본 이들.
그 정도가 피해의 전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상황.
상황 파악이 끝난 소천은 설천위의 지시에 따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설천위의 의술이라면 자신은 구하지 못했던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흐음…….”
백화단의 단주, 성화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갑작스럽게 올라온 보고로 다급하게 움직이는 상황.
악귀의 출현이라는 말에 휘하에 있는 대(隊)가 움직일 예정이었으나, 보고한 이들에게서 흘러나온 소리가 성화린을 움직이게 했다.
사건 현장에 흑룡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었다는 증언.
말 그대로 추정일 뿐 본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지만…….
‘남궁 동생의 말에 설 단주가 움직인 건 사실이야.’
본인일 확률이 9할 이상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커진다.
설천위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데도 막지 못해 같이 있던 무력대를 퇴각시킬 정도라면…….
‘재(災) 등급의 악귀를 각오해야 할 수도.’
단주급 이상의 술사들만이 상대할 수 있다고 하는, 재(災) 등급의 악귀.
거의 모든 경우에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 대량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선 많은 수의 인원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인 재앙.
‘마을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 찼을 거다.
두 존재가 싸우는 여파만으로 죽음이 사방으로 뿌려졌을 테니.
만약 아직도 결판이 나질 않았다면, 자신의 가세로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한다.
이쪽도 급하게 오느라 준비가 미흡하니까.
다만, 자신과 설천위가 힘을 합치면 이제 막 탄생한 재(災) 등급의 악귀라도 충분히 상대할 만할…….
“……어떻게 된 일이죠?”
마을에 도착한 성화린은 고개를 돌려 선두를 달리던 무인을 노려봤다.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무인.
무엇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눈치다.
아니, 알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인가.
작게 고개를 저은 성화린은 쓸데없는 대화 대신 기감을 넓혔다.
그러자 그나마 크기가 큰 집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
“저쪽으로 가죠.”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가자고 하니 가는 무인.
그 뒤를 따르며 성화린은 마을의 분위기를 살폈다.
음울하고 슬픔이 느껴졌지만, 그 농도가 생각보다 옅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분위기.
거기다.
‘악귀의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퇴치가 끝난 것인가.
그렇다면 재(災)일 가능성은 한없이 줄어든다.
마을의 분위기가 이 정도로 유지된다는 것은 피해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는 소리.
거기다 공간에 남는 악귀의 잔흔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재(災) 등급의 악귀가 날뛰었다면 반드시 남았을 악의(惡意)의 흔적도 없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성화린은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왕! 왕!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작은 강아지.
크기를 줄인 청랑이다.
밝은 얼굴과 시원하게 움직이는 꼬리를 보아하니 주인도 멀쩡한 것 같고.
“오랜만이구나.”
말 위에 있는 자신의 품으로 단번에 뛰어든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성화린은 말에서 내렸다.
청랑의 존재가 불편할 법도 하건만, 능숙하게 말에서 내린 성화린은 그대로 걸어 문 앞에 섰다.
“들어오세요.”
부르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성화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보이는 것은 위급해 보이는 사람의 몸에 침을 놓고 있는 설천위였다.
그 뒤에서 신의(神醫)라 불리던 혼이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신의의 모습을 살짝 살핀 성화린은 조용히 걸어 빈자리에 앉았다.
설천위의 일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린 지 일각쯤 됐을까.
“후.”
깊은 숨을 내쉰 설천위가 일어섰다.
“오셨군요.”
“네. 아무래도 제가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모양이네요.”
설천위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지만, 성화린은 멀쩡하게 움직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안도했다.
“걱정했던 일과는 다른 일은 일어났지만요.”
성화린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 설천위는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백화단주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무인.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성화린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그 얼굴을 확인한 설천위의 몸이 성화린의 앞에서 사라졌다.
“컥!”
“호오, 낯짝이 꽤나 두껍군.”
성화린의 길 안내를 했던, 아적대 소속의 무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잡아 제압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잘됐군. 네놈들과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 * *
무림맹이 크게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게 된 유예린은 일의 전말을 전해 듣고 미간을 찡그렸다.
“……쉽지 않겠군요.”
인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악질적인 행동이지만, 그것이 잘못됐냐고 물으면…….
글쎄……. 그렇다고 꼭 집어 말하기도 애매하다.
규정에는 술사가 없는 상태로 악귀와 조우 시 무인들은 퇴각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유야 간단하다.
영적인 내성이 없는 무인이 악귀에게 홀려 민간인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피해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민간인의 피해는 물론이고, 무림맹의 명성에도.
그렇기에 악귀의 등장에 도주한 아적대와 소랑대의 행동을 딱히 규정 위반이라고 말한 순 없었다.
오히려 규정을 잘 지킨 편이라고 할 수 있지.
다만 이쪽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설천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규정에도 명시되어 있듯, 술사가 없는 경우에 도주가 허락된다.
그런데 술사가 있었다면?
당연히 안 된다.
상대할 방법이 있는데, 도망친다니.
그딴 걸 허락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전투를 전제로 깔고 있는 조직에서 무분별한 도주를 허가할 리가 없었다.
설천위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그의 능력을 알고 있음에도 도주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죄다.
문제는 설천위의 정체를 저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냐는 점이다.
“……불리하네요.”
당시 설천위는 단주패가 없었다.
즉, 본인을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는 소리.
적들이 그걸 걸고넘어지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정황상 설천위임은 알 수 있었지만 확신이 없어서 퇴각했다고 변명하면 그것을 책망할 순 없었다.
오히려 불확실한 일에 부하들을 내모는 것이 지휘 능력의 부족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흥, 귀찮게 하는군.”
“쓸데없는 짓을…….”
저들이 저리도 당당한 것이겠지.
설천위의 요청으로 벌어진 재판.
집법당(執法堂)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재판이다.
그리고 배심원 격으로 각 단의 단주들이 소집된 상황.
단주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흥미로워하는 이, 짜증을 내는 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
각양각색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단주들.
그들 전부의 시선을 받으며 유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자신의 낭군님.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허나, 그런 걱정과 무관하게 재판은 시작됐다.
“그럼 먼저 설천위 임시 단주 발언하십시오.”
집법당의 당주, 여공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설천위가 중앙으로 걸어간다.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쏠리는 순간.
중앙에 있는, 낮은 단상 위에 올라선 설천위는 재판을 맡은 여공진이 아닌,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온 이들을 바라봤다.
“이번에 새롭게 단주의 자리를 맡게 된 설천위라고 하오.”
짧은 포권과 함께 작게 숙이는 고개.
단주들이 아닌, 청중에게 하는 그 인사에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본인은 이 무림맹에서 단주를 맡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정의를 지키며, 올바른 선을 지키는 이들과 함께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설천위는 구경 온 이들을 바라봤다.
“한데, 내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랐소.”
그 시선은 이내 고발당한 입장인 소랑대와 아적대로 향한다.
설천위의 메마른 시선에 움찔 놀라는 이들.
그들의 그 행동에도 별 반응 없이 몸을 돌린 설천위는 재판을 맡은 집법당주의 뒤, 가장 상석에 앉은 무림맹주를 바라봤다.
무림맹의 절대자.
사천맹의 맹주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천금의 무게가 담긴 정파의 최고 권력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가 그동안 해 온 일이 결코 하얗지만은 않으리라.
그렇기에.
“맹주, 저에게 무슨 단을 만들고 싶으냐고 물으셨지요?”
“허허, 재판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는가? 설 단주.”
“이것이 재판의 과정입니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설천위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으로 단주패가 날아간다.
그리고.
우뚝
허공에서 멈춰 서는 단주패.
그 기묘한 광경에 많은 이들이 감탄하는 그 순간.
단주패에 적힌 글자가 그들의 눈에 박혔다.
[흑룡단(黑龍團) 설천위(雪闡偉)]
“저는 악을 물어뜯는 흑룡(黑龍)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