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302화-창단 (6)
‘이게 그 소문의……!’
아중과 달리 한 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두정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달려들던 아중을 그대로 감싸 버린 검은 기둥들.
흑관(黑棺)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무공이 아닌 술법의 일종으로, 그 위력이 너무 강해 무인조차 묶어 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술법.
과연 별호에 흑룡(黑龍)이 들어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인이라면 특기가 되는 무공이 별호가 되는 법.
상당한 수준으로 도와 검을 다룬다고 들었음에도 별호엔 도와 검이 들어가지 않아 의아했는데.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압도적인 술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심지어, 지금은 그 별호의 이유인 흑룡은 현현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만귀단이나 백화단의 단주급은 돼야 가능하다는, 실체를 가진 술법.
흑룡을 불러내지 않고도 그런 것이 사용 가능하다는 건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남을 증명해 준다.
거기다.
‘……무(武)도 화경급이라면.’
말도 안 되는 괴물이다.
무림학관의 갑(甲) 졸업이 거짓일 리는 없으니 괴물 확정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다만 저 멍청한 아중 놈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다.
아무리 대의 규모가 비슷하다고 하지만, 저런 멍청한 놈이랑 경쟁 관계였다니…….
혀를 찬 두정은 결국 아중을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괜찮나?”
“괘, 괜…….”
바들바들 떠는 여인.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듯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인.
그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봤다.
흑관에 이곳저곳이 묶여서 그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모습.
상황 파악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길을 찾고 있는 것인가.
가만히 사내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망설임 없이 찔렀다.
어깨를 관통한 검에 사내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시내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기엔 너무나도 강렬한 비명.
허나, 설천위는 담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볼 뿐 검을 거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전부터, 무언가 간질간질 거슬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툭툭 신경을 건드리는 무언가.
무엇이 원인이지?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가만히 사내를 노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만히 있진 않았다.
까각!
“끄아아아아아아!!”
어깨를 파고든 검이 비틀어지며, 뼈를 긁어내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터진다.
순식간에 거칠어지는 호흡.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격통에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사내.
그런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남는 손으로 사내의 품을 뒤졌다.
이자가 그 약을 유통하는 자라면, 남는 약을 가지고 있을 터.
꿈쩍도 하지 못하는 사내의 품을 뒤져 이것저것 꺼내던 설천위는 이내 작은 단지를 찾아냈다.
안을 열자, 보이는 작은 단환들.
거기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와 기분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향만으로 이 정도 작용이라.
[특수한 처리를 거친 마약이구나.]
[으음, 이건 보통의 약사는 꿈도 못 꿀 수준인 것 같다만.]
혼들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단지를 품에 넣고 다시 사내를 바라봤다.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닐 텐데, 흔한 쌍욕조차 내뱉질 않는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약상이 마약에 손을 대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입이 무거워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마치 구멍 뚫린 댐처럼 가진 정보를 모조리 토해 내야 정상인데.
아무리 약 기운에 취해 있다고 한들 이건…….
가만히 사내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뭐가 됐든, 이 이상 마을 안에서 이렇게 피 냄새를 풍기는 것은…….
“흐흐.”
검을 뽑고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사내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분의 낙원에서 영원히 살아가리라.”
기억 속에 흐리게 남아 있는 문장.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설천위는 그제야 아직 자신이 듣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보고한 놈!”
“예, 예?!”
“이놈을 누가 압박했냐?”
마약에 취한 인간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경찰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에게 들켜서 잡힐 위기에 처해야 한다.
약쟁이라고 아무런 이유 없이 광견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마구 물어뜯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 최초에 이놈을 찾아 압박한 이가 있을 터.
그 녀석에게 정보를 들어야…….
“아, 압박 따윈 없었습니다! 저놈이 갑자기 인질을 잡고…….”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대원.
허나 설천위는 이미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흐흐흐흐흐!”
뒤틀린 웃음을 토해 내는 사내.
그리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꺄아아악!”
“뭐, 뭐 하는 짓이야!”
“놔, 놔라!!”
그리 크지 않은 마을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소란 속에 모인 이들 사이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인질극.
주위의 인간을 붙잡은 놈들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인다.
“그분의 낙원에서 영원히 살아가리라.”
홀린 듯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인질들의 목에 닿은 칼이 깊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흑관(黑棺)]
즉시 반응한 설천위의 흑관이 눈에 보이는 모든 인질범을 속박했다.
허나.
“꺄, 꺄아아아아!”
“이, 이 미친놈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엔 강렬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퍼지기 시작하는 강렬한 혈향.
“그분의 낙원에서! 컥!”
그 혈향에 자극받은 것일까. 사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물론, 그 즉시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말을 끊어 버린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늦은 상황.
거기다 저 사내가 소리치던 것.
‘그분의 낙원에서 영원히 살아가리라.’
어떤 놈을 믿는 광신도들의 외침이다.
게임 속에서도 몇 번 봤던 놈들.
‘이렇게 빨리?’
다만,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아니기에 잊고 있었던 놈들이다.
게임과는 다르다는 것인가.
순서 따윈 상관없이 이 세상에 퍼져 있다는 거겠지.
상황 파악이 끝난 순간, 설천위는 곧바로 움직였다.
영역(靈域)을 펼쳐 마을 일대를 자신의 품 안에 넣고 상황을 읽어 낸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피 냄새에 이끌린 잡귀들이 마구 요동친다.
“크, 크하하하!”
그리고 그 기색을 읽었는지 온몸을 필사적으로 비틀며 웃음을 터트리는 사내.
“드디어! 드디어 그분의 분신이……!”
“개소리 마라.”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내의 얼굴에 한 번 더 주먹을 먹인 설천위는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분신이면 그놈도 살아 있는 놈은 아니니까.”
“그분은 신! 당연히……!”
“아오!”
말이 통해야지.
약쟁이와 대화가 통할 리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설천위는 이번엔 혈을 짚어 사내의 몸을 마비시켰다.
죽이기보다는 이대로 끌고 가서 심문할 생각이다.
그놈들도 움직이고 있다면, 제대로 대응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 전에 먼저 이 상황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아중을 묶고 있던 흑관을 풀어 버린 설천위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 아중과 두정을 바라봤다.
“일단…….”
“죽어어!”
설천위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지척에서 검을 휘두르는 대원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두정도 검을 뽑았다.
허공에서 맞부딪히는 검.
‘……힘이?!’
헌데 대원의 검에 실린 힘이 심상치가 않았다.
순간 뒤로 주춤 물러난 두정이 놀라는 그 순간.
“쓸데없이 빠르네!”
단숨에 다가와 대원을 날려 버린 설천위는 거품을 물고 다시 일어서는 놈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평소에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바로 침식당하냐.
내성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모습이네.
“내공을 돌려라! 지금 사방에 퍼진 힘에는 현혹의 술법이 섞여 있다!”
설천위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이들이 재빨리 내공을 돌렸다.
몸 곳곳으로 돌리고, 특히 머리와 가슴에 신경을 쓴다.
그곳이 침식당하면 현혹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얼추 제정신을 유지하는 이들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주민들의 대피를 도와라! 현혹된 이들은 기절시켜 끌고 가도록! 조금 과격하게 손을 써도 좋다!”
본래라면 강력한 각성 상태가 되어 기절 따위 안 하겠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키는 것이 어렵긴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 과정이 조금 과격할 테니 깨어나면 골병이 든 것처럼 이곳저곳 아프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혼자였다면 대피에 차질을 빚어 꽤나 애를 먹었겠지만, 마침 머릿수는 충분한 상황.
주민들을 대피시키면, 이곳에 소환된 악귀 자체는 쉽게 박멸할 수 있다.
사람이 많을 땐 까다로운 놈이지만, 사람이 없다면 단순한 놈이 되니까.
빠르게 계획을 세운 설천위는 즉시 가슴 앞으로 양손을 모았다.
일단 적의 본체를 찾는 게 먼저다.
몇 개나 되는 미끼를 뿌려 놨을 테니 가려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단숨에…….
“퇴각! 퇴각이다!”
순간,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보인 것은 목이 터져라 퇴각을 외치고 있는 아중의 모습이었다.
이쪽의 지시 따위 아예 머릿속에 담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하, 하지만……!”
그 와중에 설천위의 지시를 들은 부대주의 불안한 눈빛에 아중은 코웃음을 쳤다.
“악귀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즉시 무림맹으로 돌아가 보고한다!”
그게 원칙이니까!
걸릴 게 없다는 당당한 태도.
허나 설천위의 살벌한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개를 돌린 아중은 움찔 놀랐으나 이내 고래고래 소리쳤다.
“네놈이 흑룡성인지 뭔지 알게 뭐냐! 단주패도 없는 인간의 말을 어찌 믿고?”
신분 증명의 수단이 없으니 자신들은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
허나, 그 주장에 두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설천위는 여태까지 단주패를 내밀지 않았다.
아직 받지 못했거나 두고 왔다는 소리.
위급 상황 시 발휘되는 단주의 명령권이 아니라면 자신들은 설천위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상대는 딱 봐도 사람이 아닌 존재.
자신들이 대응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이쪽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굳이 이곳에 남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아중의 말에 명분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한 두정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설천위의 살벌한 기세가 이쪽으로 향했지만, 뭐 어쩔 건가?
명분은 자신들에게 있고, 지금 퇴각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걸 설천위도 알고 있으니 저렇게 조용히 있는 것일 터.
“우리도 퇴각한다.”
허나 아중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며 주변에 인지시킬 필요는 없지.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조용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두정이 움직이고, 설천위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말릴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아중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아적대와 소랑대.
혼란과 공포에 빠진 민간인들의 비명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
설천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홀로 남아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는 남자.
그가 소랑대의 부대주임을 알고 있는 설천위는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이름이 뭔가?”
“소랑대 부대주, 소천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소천.”
[크르르르르르.]
울려 퍼지는 짐승의 울음소리.
그와 함께 사방을 잠식하는 압도적인 무언가.
그것이 분노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소천은 몸을 떨었으나, 설천위는 담담한 목소리로 소천을 향해 말했다.
“네가 꽤 많은 사람을 살렸다.”
“……예?”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뜻 모를 소리에 당황한 소천의 물음에 설천위는 몸을 돌려 다시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사람들을 최대한 한곳으로 모으도록.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이는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무력화시켜라.”
“……예!”
과격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고개를 끄덕인 소천이 몸을 돌려 움직이는 그 순간.
짝!
설천위의 손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기파가 마을을 단숨에 훑어 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섬뜩한 귀곡성을 만들어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