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301화-창단 (5)
많은 이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고대부터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대화의 수단은 폭력이었다.
지성도, 지식도 필요 없었다.
생물의 본능에 새겨진 그것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아,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아프구나.
이러면 안 되겠구나.
부정적인 학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
물론, 야만적이기 그지없다.
뛰어난 조련사는 짐승조차도 폭력 없이 교육시킬 수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 대상이라면?
당연히 말만으로 의사소통이 되고, 서로의 뜻을 교환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허나.
“내 부족함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줄 수 없으니, 전부 내 부덕의 소치로다.
입꼬리를 비튼 표정으로 땅을 검집으로 툭툭 치는 설천위.
그 모습에 객잔에서 나왔던 이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뭐 하는 새끼지?’
소랑대의 대주 두정은 최대한 침착성을 유지하며 상대를 관찰했다.
조금 전에 날아간 아중과 자신의 실력은 호각.
일류 초입 정도의 실력이다.
웬만한 공격 정도는 충분히 반응해서 대응할 수 있는 수준.
그런데도 아중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갔다는 것은…….
‘절정.’
끔찍하다.
사파에서도 거물 취급을 받을 만한 인간이 대체 왜 여기에?
아니, 저런 외모의 고수가 사파에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설마 음지의 세력인가?
최근 소문이 흉흉하게 돌고 있는 혈교 같은?
“크아아아! 노오오옴!”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움찔한 두정은 먼지바람을 헤집고 나오는 아중의 모습에 작게 안도했다.
멀쩡한 모습.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확실하게 반응해서 막아 냈다는 증거였다.
날아간 것도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일부러 날아간 거겠지.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상대란 소리.
절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다.
공적을 나눠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아중과 협력해 밀어붙인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쳐 죽여 주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중이 고함과 함께 달려든다.
그 모습에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며 계획을 세우던 두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무식한 놈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아중.
그 모습에 혀를 차며 그 뒤를 쫓는 두정.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적을 때려눕힌 다음에 그 뒤를 생각하는 게 더 낫다.
아중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고 있으니 자신은 그 뒤에서 합만 맞춰 주면 될 것이다.
2대 1.
수적 우위란 것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니까.
단숨에 달려가는 아중의 뒤를 따른 두정은 아중이 거칠게 주먹을 내지르는 것을 확인했다.
상대가 막거나 피하거나 혹은 반격으로 아중을 날려 버리거나.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단 한 순간의 빈틈은 반드시 존재한다.
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뻗었던 손을 회수해야만 검을 다시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그 빈틈을 노린다.
자연스럽게 빼 든 검을 날카롭게 세운 두정은 적당한 거리에서 일단 몸을 멈췄다.
일순간의 제동.
앞서 달려든 아중의 공격이 상대에게 닿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린 것이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
그야말로 극한까지 끌어올린 집중력으로 상대를 관찰하는 두정.
그리고 그 순간.
“커헉!”
검집이 복부를 깊숙이 파고들자, 거친 기침과 함께 아중의 허리가 꺾인다.
아예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그 아찔한 광경에 대원들의 표정마저 아찔해지는 그 순간.
홀로 기회를 노리던 두정의 검이 빈틈을 찔렀다.
고개를 숙인 아중의 머리 위를 지나는 일격.
상대의 목을 노리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살수.
그 일격을 내지른 순간.
“흠?”
상대와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무리라고.
몸이 묵직한 충격에 뒤흔들린다.
검을 내질렀던 팔이 위로 튕겨 올라가고, 나아가던 몸은 뒤로 밀려난다.
그 원인이 되는 건 다름 아닌 아중이다.
복부를 맞고 허리가 꺾인 아중을 그대로 검집으로 들어 올려 이쪽으로 던진 것이다.
상당한 거구인 아중을 검집으로 밀어서 들어 올리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얼마나 내공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돌진해 오는 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단순히 제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밀어내 뒤를 따르던 자신까지 함께 날려 버릴 정도의 힘이라니!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괴력에 충격을 받고 두정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어영부영 상대해서 될 적이 아니다.
아니,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일단 후퇴해서 맹에게 알려 지원군을 받아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군?”
겨우 균형을 잡고, 아중을 받아 내 균형을 다잡던 두정은 상대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헛소리! 우리는……!”
“당당한 무림맹의 무사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검집으로 다시 땅을 짚으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 파악도 못 했으면서 대뜸 살수나 쓰는 놈이 어딜?”
당연하다는 듯이 목을 노린 시점에서 이미 탈락이다.
정파(正派)는 무슨.
일부러 몇 가지 힌트를 줬음에도 알아 처먹지도 못하고 상대를 죽일 생각부터 하는 놈들이 무슨 정파냐.
검이 아닌 검집을 쓰고 있고, 처음 달려든 녀석을 별 상처도 없이 날려 보냈다.
심지어 이쪽은 아무런 살기도 품고 있지 않은 상황.
그런데 이런 노골적인 살수라니.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짐승조차 폭력 없이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을 교육할 때 이렇게 폭력이 수반되어야만 하다니.
통탄할 일이로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사이, 멀쩡하게 일어나 자세를 갖춘 녀석들의 표정이 꽤나 볼만하다.
“뭐 하는 놈이냐…….”
“어쭈? 좀 처맞으니 사태 파악이 되나 보지?”
무식하게 달려들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위축된 모습.
아중의 신중해진 태도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검을 어깨에 걸쳤다.
“아적대의 대주 아중, 소랑대의 대주 두정.”
“……우릴 아는 것이오?”
“너희 부하 놈들이 다 불었지. 거, 평소에 좀 믿음을 줬어야지. 애들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야 쓰냐.”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서 설천위는 히죽히죽 웃었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구먼.
“나는 설천위라고 한다. 조만간에 새롭게 생길 단의 단주가 될 사람이지.”
“……흑룡성!”
“그런 낯부끄러운 별호는 내 면전에 들이대지 말았으면 하는데.”
흑룡성(黑龍星).
나쁘지 않긴 한데, 면전에서 들으면 왠지 미간이 찡그려진다.
누가 들으면 사파 쪽 고수인 줄 알겠어.
“여하튼, 정식으로 단을 만들기 전에 가벼운 임무나 맡으러 왔는데 완전히 개판이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이시오!”
“지금 이건 명백한 업무 방해요!”
어쭈? 기가 오히려 살았네?
같은 무림맹 사람이니 죽을 일은 없다, 이건가?
정체를 밝히자마자 한마음 한뜻으로 악을 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하여튼, 조금만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면 이 꼴이지.
“뭐, 업무 방해고 나발이고 내가 말했지? 썩어 빠진 사고방식을 뜯어고쳐 주겠다고.”
“흥! 단주도 아닌 인간의 말을 우리가 왜 들어야 한단 말이오?”
“우리의 일에 방해 놓은 것을 맹에 정식으로 항의할 셈이오!”
거, 말할 거면 서로 의견은 조율해서 해라.
정식 임관이 아니니 무시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인정할 테니 이번 일을 걸고넘어지며 항의하겠다는 거야.
깊은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것이 훤히 보인다.
참.
“최대한 말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초반에 조금 강하게 나가긴 했어도 나름대로 한 대를 책임지고 있는 녀석들 아닌가.
부하들도 보고 있으니 적당히 말로 타일러서 알아들었으면 나중을 기약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말로 해선 안 되겠다.”
정식 임관 전에 사고를 치고 싶진 않았지만.
불의(不義)를 보고 그냥 참을 순 없지.
암.
나는 불의(不義)도, 불이익(不利益)도 못 참는 인간이거든.
“대가리 딱 대, 새끼들아.”
몽둥이 대신 검을 검집째 들어 올린 설천위가 단숨에 두정과 아중의 코앞으로 도약하는 그 순간.
“크, 큰일 났습니다!!”
* * *
“저리 꺼져!!”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악을 쓰는 사내의 손에 잡힌 여인이 몸을 잘게 떨었다.
공포.
풀려 버린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목을 휘감은 팔 때문에 쓰러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
어쩌다 자신이 인질로 잡힌 것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내가, 내가 그냥 죽을 것 같아?!”
악을 쓰는 사내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렸다.
인질이 다칠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저 칼에 혹 자신이 다칠까 봐서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밀어내고 공간을 확보한 인질범.
붉게 충혈된 그 눈동자에는 기이한 살기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쯧쯧, 이래서 약을 하는 놈들은…….”
부하의 보고에 이제야 현장에 도착한 아중은 혀를 차며 사내의 앞으로 나섰다.
“어이, 헛짓거리 그만하고 칼 내려놔라.”
“꺼지라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악을 쓰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양새가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혼자 억하고 죽을 것 같다.
허나,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이 작아진다.
저놈을 잡아서 그 뒤까지 캐내야 제대로 된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계산을 끝낸 아중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지? 우리는 인질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악(惡)과의 타협은 없다!”
우람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위압적으로 기세를 뿜어내는 아중.
그 모습에 움찔한 사내는 이내 이를 악물고 칼을 여자의 목에 들이댔다.
“꺼, 꺼지라고!! 다 꺼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모습.
그 모습에 이거 잡아도 제대로 심문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아중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벨 거면 베라. 단, 그 순간 네놈의 목숨도 없는 것이니까.”
“그, 그딴 협박에 내가 쫄 것 같으냐!!”
발악하듯 외치는 사내의 모습에 그 심중을 헤아린 아중은 미간을 찡그렸다.
약을 팔다 걸리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차원에서 그냥 목을 쳐 버릴 테니까.
어차피 죽은 목숨.
이대로 인질이라도 잡고 도망치는 게 그나마 살 가능성이 높다.
그리 판단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겠지.
물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생각이지만, 약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인간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약 기운으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사내는 벌벌 떨면서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인질로 잡힌 여인의 피부를 살짝 파고든 칼날을 따라 흐르는 핏방울.
이대로 더 접근하면 그대로 목을 그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인질을 살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춤할 수밖에 없는 상황.
허나.
“흥!”
아중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들과 타협하는 것은 정파의 무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고로 타협 없는 악의 구제야말로 자신들의 업!
그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희생은 대업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막말로, 여기서 저 인질범의 말을 따라 준다고 한들 저 여인이 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빠르게 포기하고 확실하게 놈을 잡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그것이 정도(正道)다.
두 눈을 부릅뜨고 거침없이 걸어가는 아중.
그 모습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이들이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에라도 노점에서 만두를 팔던 젊은 아가씨의 목에서 피가 솟구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정파 놈은 애초에 저 아가씨를 구할 생각도 없었다.
이 마을에서 그 난리를 쳐 놓고도.
끔찍하다.
끔찍해.
수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에 두 눈을 꼭 감은 그 순간.
“이 새끼 보소?”
긴장감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의식을 사로잡는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사내.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선 설천위는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중을 노려봤다.
“이 개X끼야, 넌 타협이 없는 게 아니라 노력이 없는 거야.”
상대는 고작해야 삼류 언저리의 약쟁이.
차분하게 계획을 짜서 움직이면 충분히 인질도 살리고 인질범도 잡을 수 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뭐?
이런 호로잡놈의 새끼를 봤나.
“흐, 흥! 월권이오!”
억지로 코웃음을 친 아중은 고개를 돌려 인질범을 노려봤다.
저놈만 잡으면 공적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된다.
결과.
오직 결과만 있으면 된다.
지금 다른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니.
내가 끝낸다.
생각을 끝낸 아중이 땅을 박차고.
그 모습에 인질범이 반사적으로 칼을 찔러 넣으려는 그 순간.
“하.”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흑관이 땅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