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299화-창단 (3)
“그래, 감상이 어떤가?”
친선 비무가 있고 다음 날.
아침에 연무장에 모인 이들 앞에서 설천위는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괸 채 물었다.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
허나 그 목소리를 듣는 이들은 결코 가볍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친.’
설천위가 앉아 있는 바위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성인 남성 셋이 팔을 벌려도 못 안을 것 같은 크기의 바위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등으로 짊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 위로 조금 튀어나온 양손.
그 두 손이 바위를 들고 있었다.
즉, 저 바위의 무게를 양팔로 견뎌 내고 있다는 소리다.
거기다 쪼그려 앉았다 서는 것을 반복하기까지.
인간의 육체로 저게 가능한 일인 걸까.
그런 의문이 절로 드는 말도 안 되는 훈련.
요 며칠 구석에서 조용히 수련하던 철백의 수련을 제대로 눈앞에서 목도한 이들은 그 모습에 압도되어 입을 열지 못했다.
“음, 다들 만족한 모양이네?”
‘아니, 대체 무슨…….’
왜 침묵이 만족으로 이어지는데.
설천위의 말에 화들짝 놀란 백리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 않는가.
일단은 조장이니까.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오, 그래? 어떤 부분에서?”
“모든 부분에서 느꼈습니다.”
“응. 그래, 그렇다면 충분하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바위 위에 앉은 채 백리와 그 뒤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두 눈에 불꽃이 일었다.
첫날 왔던 다 꺼져 가던 불씨가 아닌, 장작을 받아먹고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이길 수 없는 시합을 시켰는데도, 이곳에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이지?”
“…….”
설천위의 질문에 백리는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만다행으로 뼈는 다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다행히도 뼈는 다치지 않았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싸웠는데도.
어깨의 통증을 느끼며 백리는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아마 저 사람이 손을 썼기 때문일 거다.
목검이라고 한들 그렇게 맞았는데, 뼈가 성할 리 없었다.
자신 혼자라면 몰라도, 이곳에 있는 전원이 그랬단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예!”
“그렇습니다!”
기합 넘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설천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휘릭 뛰어오르는 설천위.
그리고.
“그럼 맡긴다.”
“음.”
철백의 가슴을 툭툭 두드린 설천위는 그대로 떠났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설천위.
그 모습에 제대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그 순간.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떨어졌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이군.”
바위를 가볍게 옆으로 내려놓고 똑바로 허리를 펴는 철백.
거대한 절벽 앞에 선 것 같은 위압감에 백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다.’
항상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수련만 해서 제대로 대화도 나눠 본 적 없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사내는 말도 안 되는 괴물 중 하나라는 것을.
단순히 무지막지한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근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눈빛.
마치 거대한 금속 덩어리를 보는 것 같은 단단한 눈빛은 보통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단의 부단주 겸 너희들이 속할 대(隊)를 맡게 된 철백이다.”
“부단주 겸 대주…… 입니까?”
“그래.”
그건 좀, 아니 상당히 독특한데.
어떤 단에서 부단주가 대주를 맡아…….
부단주란 단주의 대리 자격을 갖춘 이를 말한다.
단주가 통솔권을 행사할 수 없을 때 대신 단 전체를 통솔하기도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몇 개의 대를 이끌어야 할 수도 있다.
그냥 단주의 업무를 도와주는 게 부단주가 아니란 소리다.
그런 부단주를 맡으면서 한 개 대의 대주까지 맡는다니.
보통은 하지 않는 일이다.
단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끌기도 바쁜데 대를 따로 맡는다는 것이 쉬울 리가 있나.
무엇보다 부단주가 이끄는 대에 대한 특혜 의혹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은 직위 배분.
그런 점을 백리만 느낀 건 아닌지 뒤에 있던 조원들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군.”
“그…… 건 아닙니다만…….”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이해심은 깊은 사람인 것 같은데…….
철백의 이해한다는 말에 백리가 묘한 마음으로 철백을 바라보는 그 순간.
“몸이 편하니 잡념이 생기는 것이지.”
“……예?”
“쓸데없는 잡념은 전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게 지금 무슨…….
대체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이런 흐름으로 갈 이유가 어디에 있는…….
“그러니 내가 그 잡념들을 전부 날려 주마.”
담담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서 철백은 순식간에 백리의 앞에 도착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작하지.”
* * *
“끄으아우ㅡㅏ오ㅓㅏ헝나!!”
음, 갈수록 사람의 말에서 벗어나는데.
훈련장에서 조금 떨어진 휴식소 겸 식당.
그곳에서 간단하게 조식을 먹던 설천위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백이 제대로 하고 있나 보네.”
“그러게요.”
“기대하고 있었으니까요.”
아, 그래?
서하영의 말에 철백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설천위는 만족했다.
본인도 하고 싶었다고 하니, 다행이네.
괜히 짬 때린 건가 싶어 조금 미안했는데.
“그나저나, 여 소저.”
“네.”
“정말 후회 안 하겠어요?”
“물론입니다.”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여웅.
그 모습에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형이랑은 떨어져 지내야 할 텐데?”
“……애초에 같은 단이 아니었습니다.”
“어, 그래요?”
난 또 영락없이 같은 단인 줄.
잠깐.
“……서로 같은 단이 아닌데, 벌써 그렇게?”
“어흠.”
“누님은 눈치가 빨라요. 형수님.”
“…….”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여웅.
여장부 중 여장부인 외관을 해도 사랑 앞에선 작아지는 게 사람이지.
피식 웃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본인이 원한다면 받아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여웅은 훌륭한 인재니까.
절정급 무인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그걸 거부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조금 걸리던 형과의 인연도 뭐 상관없다고 하니까.
떨어져도 이어져 있다.
뭐 그런 거겠지.
음음.
“……방금 실례되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닌데요?”
“말씀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형수님한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럼 오케이.”
그럼 문제없지.
절정급 전력 겟이다.
자, 그럼.
“일단 전력은 한참 부족하네.”
“애초에 소수 정예로 갈 생각 아니었나요?”
“음, 그렇긴 한데…….”
머릿수가 많아지면 배신자를 관리하기 어렵다.
애초에 단(團)이라고 꼭 엄청 많은 머릿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구단(九團)이랑 경쟁할 것도 아니니 그리 많이 필요 없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만.
알짜배기들로만 채워 넣으면 된다.
그 선별은 게임에서 얻었던 지식으로 하면 되고.
키울 수 있는 이들은 미리 데려다가 키우고.
저평가를 받고 있는 이들도 찾아다가 키운다.
그러면 쓸 만한 녀석들로 꽤나 알차게 구성할 수 있을 거다.
거기다.
“술사들도 섞을 생각이야.”
“음.”
술사를 섞는다.
그 말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술사와 무인.
무림맹에는 두 존재 다 있지만, 두 존재는 잘 섞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사가 볼 수 있는 것을 무인은 보지 못하고.
무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술사는 하지 못한다.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이 없으니 사이가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나마 단(團) 단위에서 나누어져 있기에 두 존재 간에 충돌이 없는 거다.
섞으려 하면 충돌이 생길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침묵 속에 담긴 걱정을 읽은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그런데, 알잖아? 하나만 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설천위의 말에 서하영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혈귀는 무인이 이기기 힘든 존재였어요.”
기이한 재생력과 인간의 것이 아닌 움직임.
무인(武人)이라면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철백이 새로운 힘에 눈을 뜨면서 단기간에 끝냈기에 망정이지 만약 싸움이 길어졌다면 서하영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최소한의 수련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혈교도, 혈사련도 술사 없이는 상대하기 힘들어. 게다가 사혈천 같은 경우엔 술사가 중심이고, 무인은 곁다리가 될 수밖에 없고.”
물론 여태까지 혈사련 같은 단체는 백화단이나 만귀단이 맡았지만.
“균형이 무너지고 있어.”
음지의 조직은 강함을 추구함에 가리는 것이 없다.
그것이 술법이든, 의식이든, 무공이든 추구한다.
술사에게도 무의 강함이 필요해지고.
무인에게도 술의 강함이 필요해지는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이건 예측이 아니었다.
‘무조건이지.’
게임에서 후반에 술사를 반드시 데려가는 이유가 있다.
게임과 달리 현실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갈 이유가 없다.
“공채 시험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인재를 전부 뽑을 거야.”
“하지만 술사 쪽 인재는 공채로는 거의 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것도 맞지.
술사는 기본적으로 고급 인력이니까.
찾기도 힘들고, 그런 이가 무림맹에 들어오는 것도 흔하지 않다.
무림학관의 술사 버전인 수령원 같은 곳에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정 급하면 내가 키우면 되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그쪽은 확실하니까요.”
그쪽은 확실하다니……. 그럼 다른 쪽은?
서하영의 말에 살짝 상처받은 설천위는 말을 삼켰다.
“여하튼, 그렇게 방향을 잡고 단을 이끌어갈 거니까 알아 두라고.”
“예.”
“알겠어요.”
“좋아. 그럼 해산! 공채 시험까지 몸조리 잘하도록!”
* * *
“꺄하하! 난 또 무슨 짓을 하나 했지!”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니까요.”
설천위의 장원.
저녁 시간에 그곳으로 놀러 온 손님 덕에 작은 술자리가 벌어졌다.
참여 인원은 설천위와 함께 사는 유예린, 철백, 서하영과 놀러 온 남궁선, 성화린이다.
“아, 재미있는 구경이었을 텐데 아쉽네.”
“그리 재밌진 않았어요. 다들 실력은 부족해서.”
“에이, 원래 싸움은 ㅈ…….”
“말.”
천박한 단어를 내뱉으려는 남궁선의 옆구리를 찔러 멈춘 성화린은 한숨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동생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니?”
“아니 언니,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뭐예요!”
“허례허식이 아니라 예의라고 하는 거란다.”
오오.
거침없는 남궁선을 가볍게 억누르는 성화린의 모습에 감탄한 설천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죠~?”
“아, 아닌가?”
눈을 부라리는 남궁선의 모습에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아직도 단 이름을 못 정했어요.”
“아직도? 그럼 새기는 것도 못 했겠네?”
“그렇죠?”
뭐, 사실 새기는 것도 더럽게 힘들어…….
“어?”
“또 뭐가?”
“잠깐, 백화단주님은 단주패에 이름을 어떻게 새겼어요?”
무인도 아닌데.
술법으로 새길 수 있나?
이름을 새겨야 하니 단주가 새로 취임할 때마다 새기는 거로 아는데?
“비밀입니다.”
“예?”
“알려 주면 너무 쉬울 테니 알려 주지 말라는 맹주님의 말씀이 있었거든요.”
아니…….
이건 좀 섭섭할지도?
설천위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성화린은 아무렇지 않게 외면했다.
“암! 자기 실력으로 해야지!”
“누님, 자기 일 아니라고…….”
“내 일 아니니까!”
자랑이다. 이 양반아.
히히 웃으며 술을 들이켜는 남궁선의 모습에 혀를 찬 설천위가 포기하고 술잔을 쥐는 순간.
“그럼 동생한테 일 한번 맡겨 볼까?”
“예?”
아니, 지금 대화 흐름에서 갑자기 웬…….
“창단이 아직 안 됐을 뿐이지, 무림맹 소속인 건 맞으니까. 작은 임무 정도야 할 수 있지.”
남궁선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히죽 웃었다.
“하고 나면, 단 이름을 정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