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298화-창단 (2)
‘이게 무슨…….’
백리는 떨리는 손에 힘을 더했다.
물론, 그렇다고 떨림이 멈추진 않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눈앞에 목검을 들고 서 있는 녀석이 있어서다.
가소롭다는 감정을 넘어서 철저하게 두들겨 패겠다는 분노가 가득 깃든 눈빛.
감히 자신에게 덤빈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눈빛이다.
조장이라는 이유로 첫 번째 희생양이 된 자신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고.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백리는 목검을 세웠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어라 반항할 거다.
까짓것 한 방 먹이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삼류 무인이고, 상대는 이류 무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밀어붙이면 한 방 정도는 먹일 수 있겠지!
이를 악문 백리는 천천히 움직이며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싶은 건 싶은 거고.
현실이란 녹록지 않은 법.
감정에 휩쓸려 막무가내로 싸우면 그나마 조금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최근 며칠간 한 수련이 무엇인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인내해 가며 육체를 단련하는 것 아니었던가.
약간의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확실하게 적을 찌를 수 있는 한순간의 틈을 노린다.
한껏 경계하는 백리의 태도에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튼 상대가 움직인다.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보법.
꽤나 숙달된 보법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히는 것과 동시에 공격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
공격과 보법의 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깔끔한 일격.
딱!!
겨우 막아 낸 백리는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일단 방어다.
죽어라 버텨 주마!
* * *
백리를 상대하는 소구막은 화를 삼켰다.
뜬금없이 찾아온 임시 단주.
아직 단주로 취임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 실력은 확실하기에 최대한 예로 대하려고 했는데…….
‘이런 쓰레기들이랑 손을 섞으라니……!’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녀석을 포함한 다른 놈들도 전부 쓰레기들 아닌가.
무림학관을 계(癸)로 졸업한 버러지들.
밖에서 낭인 생활을 하다 온 놈들보다도 못한 버러지들이다.
낭인 출신들은 싸울 때 독기라도 있지.
실력도 더 좋은 편이고.
무림학관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배우고도 제대로 검을 휘두르는 법조차 깨닫지 못한 머저리들이랑 친선 비무라니.
수치심에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그나저나 이놈이?’
새로 온 단주의 막무가내 제안에 비무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금방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열 명 전부 자신이 상대할 마음이었는데…….
눈앞의 녀석은 왜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는 거야?
고작 삼류인 녀석을 상대로 몇 합이나 검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소구막은 그만 부아가 치밀었다.
이러면 자신이 너무 약해 보이지 않는가.
‘끝낸다!’
결심을 세운 순간, 소구막은 조금 강하게 발을 내디뎠다.
이미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대의 정면으로 파고드는 왼발.
단숨에 축을 잡은 발을 중심으로 힘을 끌어올린다.
내공이 아니다.
삼류 무인을 상대로 내공을 쓰는 것 자체가 수치다.
무(武)의 차이로 짓밟아 주리라.
다리를 축으로 돌아가는 허리와 어깨, 팔을 타고 목검에 묵직한 힘이 실린다.
이대로 상대의 목검을 부러트리고 어깨를 작살내 주리라.
엄하게 손을 쓰면 다시는 이런 주제도 모르는 짓은 못 하겠지.
독심을 품은 소구막의 목검이 묵직한 힘과 함께 떨어진다.
당연히 그 강맹한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 백리의 목검은 허망하게…….
‘읍?!’
순간 팔에서 걸리는 기이한 감촉에 소구막은 눈을 부릅떴다.
한 걸음.
이 미친놈이 자신의 검이 더 빠를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것이다.
손 바로 위, 즉 진검으로 따지면 코등이의 바로 윗부분이 어깨와 맞부딪쳤다.
실제 진검을 상대할 때 가장 적게 베일 수 있는 부분.
그걸 목검으로 바꾸면…….
“으아아압!!”
가장 부상이 적은 부분이란 소리다.
고작해야 뼈에 금이 가는 정도가 최선인 수준의 부상.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는 수준의 부상이다.
기합과 함께 고통을 날려 버린 백리의 목검이 움직인다.
이 거리에서 검으로 벤다는 건 악수(惡手).
백리는 과감하게 검을 포기했다.
대신.
손잡이를 휘둘러 상대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허나 상대는 이류.
뒤늦게 반응해 고개를 뒤로 뺀 소구막의 관자놀이는 멀쩡했다.
대신.
“……이 개……!”
이마를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손잡이에 스쳐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베인 것도 아니고.
찢어졌다.
동네 아이들이 홧김에 돌을 던져 난 상처처럼.
결코 무인의 상처라고 하기 힘든 형태로.
치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떤 소구막이 다시 목검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
“여기까지.”
소구막과 백리 사이를 가로막은 도가 섬뜩한 예기를 흘렸다.
이 이상 움직였다가는 정말로 베일 것 같은 그런 예기(銳氣).
“안타깝게도 우리의 패배다.”
목소리가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눈빛으로 소구막을 밀어냈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물러서는 소구막.
어깨의 부상과 과격한 움직임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백리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설천위를 올려봤다.
“저, 저는…….”
“나쁘지 않아.”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백리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칭찬했다.
“훌륭했다.”
백리의 멀쩡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설천위는 그대로 백리와 함께 물러섰다.
물론.
“다음!”
친선 비무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 * *
“얘기 들었나?”
“그 새로 온 단주? 흑룡성?”
“계(癸) 출신 놈들을 데리고 친선 비무를 다닌다고 하더군.”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심지어 전패라더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놈들이 이길 수 있으면 계(癸)였겠나?”
조롱과 조소가 난무하는 객잔.
무림맹에서 소문은 참 빨리 퍼졌다.
설천위가 계(癸) 출신의 무인들을 모아 친선 비무를 다닌다.
어디에선 두 명이 싸우고.
어디에서는 한 명이 싸우고.
어디에서는 네 명이 싸운다.
그야말로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비무.
심지어 그 비무의 대상들은 전부 소규모 대(隊)뿐이었다.
설천위의 이름값에 비무를 거절할 수 없는 이들.
그런 곳을 돌아다니며 친선 비무를 하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있나.
거기다 이긴 녀석이 한 놈도 없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제 막 단을 만들어서 잡일이라도 할 놈들을 모아 놓은 거다.
단주가 계(癸) 출신이라 동정심에 그러는 것이다.
등등.
온갖 추측과 낭설이 무림맹에 파다하게 퍼졌을 때.
“음, 맛있는데?”
설천위는 그런 소문이 나도는 중심지인 객잔에서 고기를 먹고 있었다.
양념으로 졸인 돼지고기.
무림맹 근처라서 그런가, 엄청 맛있네.
“이야기를 많이 하는군.”
“그러게.”
함께 온 철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무림맹 근처에 있는 객잔에서 3층인 이곳은 꽤나 직책이 있는 이들이 자리 잡는 곳이다.
가장 큰 이유는 비싸서.
덕분에.
“흠흠.”
저렇게 눈치 없이 오는 놈들도 있지만.
직위는 낮은데 가문이 부자여서 돈 자랑이나 하려고 이런 곳에 오는 놈들이다.
“소저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자리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함께 있는 설천위와 철백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유예린과 서하영에게 추파를 던지는 놈들.
그 모습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쪽을 흘겨보며 경악하고 있는 놈들도 있고.
그나마 저쪽은 눈치가 있는 것 같네.
나름 머리에 든 게 있어서 이쪽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다.
“예의라곤 없는 분이군요.”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용기가 무례함으로 보였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응.
멍청함으로 보여.
웃으며 나름 멋있는 척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상대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꺼져. 밥맛 떨어지니까.”
“……지금 뭐라고?”
“꺼지라고.”
“이익!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몰라, 새끼야. 관심도 없고.”
탁, 젓가락을 내려놓은 설천위는 삐딱한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수준은 이류 끝자락 정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일류에도 오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다.
그런 상태인데 이런 곳에 와서 여자나 꼬시고 있다?
심지어, 이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돈 좀 있는 머저리인가 본데, 몸 성히 걸어 나가고 싶으면 꺼지라고.”
“놈! 말이 아주 오만방자하……. 컥!”
복부를 파고드는 일격에 허리가 접힌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떤다.
……배가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아래인 것 같은데?
가서 허리라도 좀 두들겨 줘야 하나?
“소중한 시간입니다.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하며 지풍을 쏜 손을 거둔 유예린이 눈짓하자.
“이, 이게?!”
허공에서 나타난 이가 사내를 끌고 사라졌다.
“아직도 데리고 있어?”
“제 휘하의 이들이니까요.”
암은단을 나오면서 두고 온 게 아니었구나.
암혈단(暗血團).
무림맹 소속이 아닌 섬서유가 소속의 조직.
즉, 사조직이다.
암은단은 섬서유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
그곳을 나왔으니 가문의 후계랑은 멀어졌고 당연히 암혈단은 두고 올 줄 알았는데.
완전히 먹어 치웠구나.
유예린의 카리스마에 감탄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음? 뭐가?”
“계(癸) 출신의 분들을 모아서 이러는 이유요.”
유예린의 말에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철백과 서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상한 놈이 깝죽거릴 땐 관심도 없더니…….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고 입을 열었다.
“근성 있잖아.”
“근성 말인가요?”
“응. 근성.”
“확실히 있다고 볼 수 있죠.”
계(癸)는 말이 계급이지 거의 퇴학이나 마찬가지다.
무림학관의 최하층.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해 주는 수준의 극약 처방.
그냥 학관을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취급을 견뎌 내고 졸업해서 무림맹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라면 근성이 없을 수가 없었다.
진짜 이를 악물고 버텼다는 소리니까.
심지어 버티는 걸 넘어서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기에 졸업까지 할 수 있었을 거다.
즉.
“근성 하나는 확실한 녀석들이긴 하군.”
“수련할 때도 꽤 근성 있었죠.”
철백과 서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근성만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건 설 공자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요.”
“응. 그렇지?”
안타깝게도 그렇다.
계(癸)의 재능이란 것이 그렇다.
자신과 비슷…….
[설천위 정도는 아니더라도 재능이 없는 녀석들이긴 하지.]
[그래도 이 녀석보단 낫지 않습니까?]
[음, 대체로 다 조금씩 더 낫긴 하더군.]
이 양반들이?
……씁.
“어흠, 재능이란 게 꼭 무공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이 바뀌면 꽃피울 수도 있는 거니까.”
“나처럼 말인가?”
“저처럼요?”
“……그래, 너희 둘처럼.”
[음, 확실히 이 녀석은 재능을 꽃피운 건 아니지.]
[영적인 재능이야 뭐, 원래 꽃이 피어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이놈 정도면 우리가 바위가 꽃을 새겨 넣은 수준이지.]
아니, 거 말 좀 덧붙이지 말아요.
혓바닥이 길어지는 혼들을 한번 째려본 설천위는 이내 한숨과 함께 철백을 바라봤다.
“그런 의미에서 철백?”
“음?”
“네가 해 보고 싶다는 거. 쟤들 데리고 해 봐.”
“과연.”
설천위의 제안에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네 취향이긴 하잖아?”
“근성만 있다면, 인간의 한계는 끝없이 늘어나는 법이지.”
나름 마음에 드는 제안인지 철백은 흔쾌히 수락했다.
애초에 새롭게 대(隊)를 만들 생각이 있었던 철백이기에 고민도 없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에 정식으로 단원들을 받을 거야.”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공채 시기군요.”
공채(公採).
말 그대로 공개적인 방법으로 채용한다는 소리다.
무림맹에서 주기적으로 하는 채용.
무림학관을 졸업하지 않은 낭인 출신이나, 외지에서 홀로 실력을 갈고닦은 무인들이 보통 신청한다.
꽝이 더 많지만, 가끔 보석도 주울 수 있는 기회.
“쓸 만한 놈들 있으면, 싹 긁어모을 거야.”
히죽 웃으며 고기를 입에 넣은 설천위는 떠올렸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게임 속에서 머릿속에 쌓은 꿀 같은 인재들의 정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