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297화-창단 (1)
백리.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물론 어릴 때 무인의 꿈을 품고 무림학관에 들어갔단 점에서는 조금 독특하지만.
합격할 줄 몰랐던 무림학관에 합격해서 그 얼마나 기뻤던가.
물론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금세 계(癸)로 강등당해 치욕적인 시간을 보냈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자신을 무시하는 주위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남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 한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자신에게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졸업해서 무림맹에 들어가면 다를 거라고.
가서 공적을 세우고 계속 갈고닦아서 위로 올라가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무림맹에 도착했는데…….
‘뭐? 계(癸)? 아니, 뭐 이런 놈이 우리 대(隊)에…….’
‘가서 빨래나 해, 새끼야!’
한번 찍힌 계(癸)라는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멸시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임무에서 배제시켰다.
그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끔 나가는 임무에서도 허드렛일이나 할 뿐.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아니, 사실 있었다.
한번 범죄자와 만나서 그를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공적마저 같이 갔던 녀석이 뺏어 갔다.
대주라는 인간은 그것을 알아채고도 그냥 무시했고.
그래서 절망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武)에 바친 세월이 얼마던가.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다?
그럴 땅이 어디에 있다고?
소작농으로 착취만 당하다가 죽겠지.
상인?
아무리 봐도 자신의 성격에 상재는 없었다.
호위 무사나 표사?
그건 계(癸)라는 낙인이 발목을 붙잡는다.
무림맹을 나가도 딱히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포기하고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꿀꺽.
‘……지, 진짜네.’
현판이 없는 장원.
새롭게 생긴 단(團)이 자리 잡은 장원이라고 한다.
자신이 있던 대(隊)급의 건물과는 크기부터가 다른 장원.
거기다 담벼락도 끝이 잘 안 보이는 것이…….
‘훈련장도 엄청 넓겠는데?’
넓으면 청소하기 힘든데…….
순간, 그쪽으로 먼저 흐르는 생각에 백리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새롭게 만들어진 단(團)에서 자신을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허드렛일이든 뭐든 새로운 기회가 된다면 붙잡아야…….
“……어?”
“……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꽤나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백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과 같은 계(癸) 출신의 무인.
이름은 모르지만, 받는 취급이 비슷해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상대도 그랬는지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뭐 하나? 안 들어오고?”
“죄,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고개를 까딱이는 철백을 마주한 두 사람은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바들바들 떠는 것도 비슷했고.
“……쓸데없는 사과는 그만하고 들어와라. 조금 있으면 시험을 시작할 테니까.”
그 모습에 고개를 저은 철백은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철백이 고개를 저은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앞에 온 모든 이들이 같은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겁먹은 듯 잘게 떨며 당연하다는 듯이 사과하는.
그런 모습을 모두가 취했던 거다.
* * *
“음, 다 모였네?”
넓은 훈련장에 서서 기다리던 백리는 이내 건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다.’
설가(雪家)의 막내라고 했던가.
딱 듣던 이야기대로의 외모였다.
흑룡성(黑龍星)이라는 살벌한 별호랑은 영 맞지 않는 외모.
듣자 하니 민간인도 수틀리면 두들겨 팬다던데.
‘……그래 보이진 않는데.’
웃으며 단상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자자, 내가 굳이 너희들을 이곳에 모은 이유가 궁금하겠지?”
저것 봐.
저렇게 목소리가 부드러운…….
“계(癸)라는 패배자들을 모아 놓은 이유가 궁금할 거야. 쓸모도 없는 녀석들을 왜 모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지.”
“…….”
대답 없이 조금 싸늘해진 공기가 훈련장에 감돈다.
개개인의 위축된 감정은 별개로, 이렇게 모아 놓은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모욕하면 분위기가 좋을 리 없다.
그러나.
“눈 깔아, 자식들아.”
설천위의 한 마디에 금세 싸늘해진 분위기가 풀렸다.
그가 딱히 기세를 일으키지도 않았음에도.
위협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냥 눈을 내리깔아 버린 것이다.
‘…….’
그 속에서 함께 고개를 숙인 백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이곳으로 온 거 아닌가?
자신들을 뒤에서 비웃던 고주대의 동료 놈들의 조롱을 무시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가?
‘바뀌기 위해서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백리는 고개를 들었다.
바뀌기 위해선 앞을 봐야 한다.
무림학관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졸업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학관을 떠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배우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앞을 보…….
“…….”
“…….”
설천위와 그대로 눈이 딱 마주치자 흐르는 미묘한 정적.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설천위의 시선에 백리는 입을 우물거렸다.
물론 고개는 당장에라도 내려갈 것처럼 목 근육이 요동쳤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서 고개를 숙일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하나 있네. 나쁘지 않아.”
피식 웃는 설천위의 모습에 백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그럼 백리, 네가 지금부터 조장이다.”
“……예?”
“뭘 들었으면서 또 되물어? 네가 조장이라고.”
“그렇지만, 그게 무슨…….”
조장.
그 말에 백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과 같은 계(癸)급의 무인이 열하나.
자신을 포함하면 열둘이다.
한 개의 조를 이루기엔 충분한 인원수.
“시험은 간단해.”
짧게 말을 끊은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주일간 우리의 수련에 따라올 것. 그것뿐이다.”
* * *
수련에 따라오라니.
그게 시험이라고?
그런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일이다.
수련이란 것은 결국 몸의 단련이다.
체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가해질 수 있는 고통에도 한계가 있다.
근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백리는 솔직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근성으로 이 악물고 버텨 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끄윽…….”
‘이,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시작은 기초 훈련부터였다.
구보를 시작으로 마보까지는 평범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기, 이상한 철봉을 들었다 내렸다 하기 등등.
처음 보는 훈련들.
‘주, 죽을 것 같다……!’
문제는 이것들이 여태껏 해 온 수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마치 신체의 한 부위만 정확하게 조져 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 같은 방식들.
철백을 따라 팔 운동에 집중했던 백리는 순식간에 팔을 드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 됐다.
문제는 아직 훈련은 시작도 안 한 것 같다는 것.
“흡! 흡!”
‘대체 어떻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엄청난 무게의 철봉을 들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철백.
그 모습에 백리는 위압감마저 느꼈다.
저게 인간이 할 수 있는 훈련인 것인가.
아니, 저게 가능하다는 시점에서 이미 인간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자자, 일어서. 다리는 멀쩡하잖아.”
멍하니 철백을 바라보던 백리는 어느새 자신의 곁에 온 설천위의 목소리를 듣고 공포에 떨었다.
이 인간도 만만치 않게 미쳤다.
철백에 비하면 가볍지만 그래도 역시 말도 안 되는 무게를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다.
거기다 쉬는 시간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빡세게 굴리는 훈련.
이미 속을 게워 낸 이들 때문에 한쪽에선 악취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운동을 계속시킨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지만…….
“자자, 일단 무게는 가볍게……. 이 정도로 할까?”
강제로 일으켜져 철봉을 어깨에 짊어진 백리는 말없이 다리를 굽혔다.
진짜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움직일 수 있어.’
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면 어떻게든 따라갈 생각이다.
죽어라 따라가서 보여 줄 생각이다.
할 수 있다고.
……물론 끝까지 따라가지 못해 쫓겨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힘닿는 데까지 해 보리라.
그게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길이라면……!
* * *
“……이런 일이 의미가 있을까요?”
저녁 시간.
지쳐서 흐물거리는 계(癸) 출신의 무인들을 대충 숙소에 때려 박고 온 설천위는 자신을 기다리던 유예린의 말에 피식 웃었다.
“왜? 쓸데없어 보여?”
“혹시나 해서 살펴봤지만, 역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나도, 철백도, 서 소저도 계(癸)에서 시작했어.”
“상황이 달라요.”
냉정한 유예린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맞는 말이다.
이쪽에겐 숨겨진 재능이 있었으니까.
유예린이 보기엔 썩 가성비 좋은 행동으로는 안 보이겠지.
하지만.
“가끔 좋은 씨앗은 너무 깊이 박혀서 발아가 늦어지기도 하는 법이지.”
“문 소협 같은 경우를 말하는 건가요?”
문율.
무량대해(無量大海)의 재능을 가진 자.
그에 대한 설천위의 평가를 들은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율은 확실히 느리긴 해도 습득력이 좋은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강해질 것이란 게 보였다.
그렇기에 이번과는 경우가 달랐다.
“아무리 봐도 그들 전부가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것 같진 않던데요.”
“그것도 맞지.”
문율의 재능은 거의 천무지체에 버금가는 특급 재능이다.
성장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성장만 하면 확실하게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재능.
그런 재능이 흔할 리가 없지.
“뭐, 재능을 보고 뽑은 건 아니야.”
열두 명 전부가 시간이 지나면 크게 성장할 거란 생각으로 뽑은 건 아니다.
다만.
“근성이 있으면 바꿀 수 있으니까.”
“버텼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건가요?”
“응.”
계(癸)라는 등급.
그 낙인을 짊어지고 노력을 거듭해 무림맹에 들어왔다는 시점에서 근성으론 합격이다.
물론 현실은 근성 이외의 평가 요소가 너무 많아서 밑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이쪽은 그 근성을 높이 평가해 줄 수 있다.
부족하다면, 채우면 될 뿐이니까.
“뭐, 느긋하게 가자고.”
투박해도 잘 깨지지 않는 놋쇠 그릇이라면 어떻게든 채워 줄 수 있을 테니까.
* * *
“주…… 죽……!”
“안 죽는다.”
훈련 나흘째.
백리는 그야말로 살아서 지옥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반성도 됐다.
훈련이란 것이 이렇게 힘들 수도 있구나.
나는 진짜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었구나.
악을 쓰고 한다고 했는데도 부족했던 거구나.
그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물론, 그런 깨달음과 상관없이 놀란 점도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
훈련 이틀째에 찾아온 이들.
다른 단이나 대에 있다가 이번에 새로 생기는 단에 들고 싶다고 찾아온 이들이다.
듣자 하니 학관에서 설천위와 인연이 있다고 했던가.
놀라운 점은 여웅이 그 사이에 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이름이 들리기 시작한 대주급의 무인.
그런 무인이 대체 뭐가 아쉽다고 이런 갓 창단된 단에 들어오는 건지…….
의문은 남았지만, 해소할 여유는 없었다.
그들도 이 미친 훈련에 동참해 당연하다는 듯이 훈련을 소화해 내고 있었으니까.
“음, 뭐 나쁘진 않네.”
자신의 옆에서 엄청난 무게의 철봉을 짊어진 채 마보를 하고 있는 설천위의 말에 백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걸까.
“흐음…….”
잠시 고민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설천위가 다리를 펴고 철봉을 내려놓는 모습에 백리는 순간 움찔했다.
묵중한 무게의 철봉이 땅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나갈까.”
“……예?”
“친선 비무 하러 가자.”
“……예??”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