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296화-졸업식 (5)
“혈교와 악연이 깊구나.”
철백이 도착하고 이틀.
학관장실에서 팽후와 마주한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자꾸 걸리네요, 이놈들이.”
“질긴 놈들이야. 여태까지 쉬지 않고 이리 집착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팽후는 차분한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용케 참았구나.”
“뭐가요?”
“네 성격에 오늘쯤이면 달려 나갔을 것 같은데.”
“의미 없으니까요.”
“냉정하구나.”
설천위의 대답에 팽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긴, 애초에 열정적인 것이지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심장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가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나저나 예정대로 닷새만 미뤄 두면 되겠느냐?”
“네. 두 사람 다 슬슬 거동 정도는 가능해졌어요.”
“그렇게 부상이 가벼워 보이진 않았던 것 같다만?”
“두 사람 다 몸이 튼튼하니까요.”
자고로 무인에게 몸이 튼튼하단 말은 단순히 무르지 않고 굳세다는 의미로만 쓰이진 않는다.
부상 중에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과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능력도 포함된다.
이 시대의 의료 기술을 생각하면 바이러스나 균에 저항하는 능력도 물론 포함이고.
튼튼하다=생명줄이 질기다.
거의 같은 의미다.
그리고 철백과 서하영은 무인 중에서도 진짜 튼튼한 인간들이고.
“좋은 약도 먹이고 있으니까요.”
[음, 특효지.]
거기다 신의의 특효약까지 더해지면 닷새 정도면 전투는 무리더라도 거동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까지는 회복될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좋은 소식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가 보거라. 아까부터 엉덩이가 슬슬 올라오는구나.”
“크흠, 감사합니다!”
팽후의 배려에 잽싸게 학관장실을 나온 설천위는 즉시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하던 도중에 불려 갔던 터라 영 대화에 집중이 안 됐던 게 사실이니까.
“벌써 왔어요?”
“할 얘기만 빠르게 하고 왔어.”
애초에 얘기할 내용도 별거 없었다.
철백과 서하영의 상태 보고 겸 팽후가 이쪽의 상황을 살피려 했던 것이니까.
아마 가겠다고 하면 말릴 생각이었겠지?
팽후의 의도를 짐작하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한쪽에서 쉬고 있는 주현운을 바라봤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주현운도 마찬가지다.
철백과 서하영이 그렇게 돼서 돌아온 뒤, 주현운도 훈련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다.
졸업식의 영향으로 놀 거리가 많은데도.
소윤혜와 나들이를 나가기보다는 훈련장에 처박히기를 선택한 거다.
위기감이 들었겠지.
지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철백이나 서하영 둘 다 주현운보다 약하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니까.
그런 두 사람이 크게 다쳐 죽음 직전까지 몰린 것을 봤으니 위기감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철백이니까 서하영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틀 가까이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릴 수 있는 건 철백 정도나 가능한 일이니까.
그렇다면, 설천위와 주현운이 그 상황에서 연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후우.”
강해지는 것.
지금의 자신보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손에 넣고 적을 짓밟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다.
주현운에게서 관심을 거둔 설천위는 자신의 자리에 서서 검을 들었다.
마침 지금 자신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성공하면 몇 단계나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과제가.
소령연화(燒靈燃枠).
무려 혼원패공과 같은 최상(最上)급 스킬이다.
단 두 개뿐인 최상급 스킬.
물론, 그 사용에 따른 반동을 이겨 내지 못해 발동만 해도 정신을 잃을 정도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화경(化境)에 오르면 어떤 식으로든 쓸 수 있기야 하겠지만.
‘……너무 늦어.’
화경은 옆집의 개 이름이 아니다.
지금 설천위는 초절정 수준의 힘으로 어떻게든 꼼수를 부려 화경급의 전투력을 갖추긴 했지만, 진짜 화경의 경지는 높다.
하물며 설천위가 가진 무(武)의 재능이라면 몇 년이 걸릴지 감도 잡을 수 없다.
혼들의 조언이 있으니 언젠가는 오를 테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설천위의 재능으로는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여하튼,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설천위는 한 가지 의문점에 닿았다.
혼들은 설천위의 몸으로 어떻게 강기를 만들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천마는 이리 말했다.
[기(氣)의 완벽한 장악이다.]
그리고 옆에서 듣던 소백진은 이리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의지이니라.]
거기까지 들은 현태중도 고개를 끄덕였고.
암영의적은 그냥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여하튼, 저 두 가지가 혼들이 임독양맥이 막힌 설천위의 몸으로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란 소리다.
그래서 설천위는 연습을 시작했다.
임독양맥이라는 거대한 길을 거치지 않고도 강(罡)을 피워 내는 연습을.
“후.”
물론.
“커헉!”
여태까지 다 실패했다.
“설 형!”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설천위에게 재빨리 다가온 주현운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혈을 짚었다.
“……이러다가 제가 주화입마 치료의 초고수가 되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설천위가 수련하는 내내 설천위의 주화입마에 응급조치를 취하던 주현운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의의 조언까지 있으니 진짜 주화입마의 전문가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끄윽……. 될 것 같았는데…….”
“뭘 될 것 같았는데예요? 여태까지 전부 실패했으면서.”
“아니, 분명 그때 단주패에 새기려고 할 때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뒤틀린 속을 다스리기 위해 [회복]을 사용하며 설천위는 몸을 일으켰다.
슬쩍 꺼낸 단주패.
검기로 만든 작은 흔적만이 있는 단주패의 뒷면을 보며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분명 느낌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그대로 발동했다면 한 획 정도 그린 후 주화입마로 몸져누웠을 게다.]
[쯧, 정말 몸뚱이 하나는 튼튼하단 사실에 감사하거라.]
[그게 아니면 이 재능으로 이렇게 못 성장했겠지.]
거, 말이 깁니다. 어르신들.
[회복]으로 통증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스킬이 없었으면 진짜 답이 없긴 했지.
혼들의 말도 안 되는 수련을 버텨 낸 원동력이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이런 미친 짓도 이 스킬 덕에 가능한 거고.
“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내상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다시 일어나서 검을 잡았다.
최소 졸업식 전까지는 감을 잡아 놓으려 한다.
다시 일어서서 미친 짓을 시작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몇 번이고 말렸던 주현운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건 알았으니 쓰러지면 빠르게 달려갈 준비를 하면서.
* * *
[껄껄, 참 기대한 대로구나.]
[음음.]
“……하지 마요.”
[허허, 졸업식 전까지는 감을 잡겠다던 녀석은 어디 갔느냐?]
“아! 쫌!”
낄낄거리며 놀리는 혼들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얼굴을 구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업식 당일.
새벽부터 일어나 수련한 설천위는 여전히 [소령연화(燒靈燃枠)]의 머리털도 구경하지 못했다.
발동만 하려고 하면 기절하니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천위, 여기 있었군.”
“뭐야, 벌써 준비 끝났어?”
대충 물로 땀과 먼지를 씻어 내고 옷을 갈아입던 설천위는 철백의 방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수련을 안 하니 시간이 남더군.”
그 모습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철백은 성큼성큼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성과는 있었나?”
“씁, 너까지?”
“없었나 보군.”
철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위.”
“어.”
“단(團)을 만든다면 나는 나만의 대(隊)를 만들려고 한다.”
“벌써부터 주지도 않은 고기를 생각하고 있냐?”
단(團)의 규모는 상당히 크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수천 명 단위일 때도 있다.
당연히 밑으로 세분화해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가 대(隊)이고.
단 아래에 몇 개나 되는 대가 움직이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아쉽게도 허가해 줄 수가 없다.
“넌 부단장을 해야 하거든.”
“부단장은 유 소저가 하는 거 아니었나?”
“부단장이 꼭 한 명이라는 법은 없지?”
웃으며 옷의 매듭을 지은 설천위는 철백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다면 부단장이 대(隊)를 맡지 말라는 법도 없지.”
“음.”
설천위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한 철백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맡겠다.”
“꽤 힘들 텐데?”
“힘들다고 물러설 것이었다면 무(武)의 길을 걷지도 않았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철백의 단호한 대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검과 도를 챙겼다.
“그럼 가자. 뭐가 됐든, 끝내야 할 것을 끝내야 시작도 할 수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서는 설천위.
그 뒤를 따르는 철백.
성큼성큼 걸어가던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서하영이 웃으며 따라붙었다.
조금 어색한 걸음걸이.
그 걸음걸이에 철백의 표정이 굳었지만, 설천위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걷는다.
몇 년간 함께 걸어왔던 익숙한 풍경의 길을.
밝게 웃으며 떠드는 서하영의 말소리를 배경음 삼아.
들뜬 분위기 속을 걷는다.
흩날리는 꽃잎과 바람 속에서.
“그럼 졸업식을 시작하겠다.”
팽후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새로운 단(團)이라…….”
“참 힘든 일을 하네.”
무림맹 소속 고주대의 대주 고규는 부하들의 말에 혀를 찼다.
“쓸데없는 말들 하지 마라. 그래도 단주는 화경급 고수니까.”
“아니, 그것도 의문입니다. 계(癸)에서 갑(甲)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설가에서 압박 넣은 거 아닙니까?”
“확실히 그게 더 가능성 있지 않나?”
계(癸).
무림맹에도 계(癸)에 관한 악명은 널리 퍼져 있긴 하다.
왜냐하면 무림맹에도 계(癸) 출신의 무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혹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계(癸)를 단 상태로 꾸역꾸역 졸업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런 이들이 무림맹에서 받는 등급은 말단 중 말단.
인식이 좋을 수가 없다.
임무에서 1인분을 못 해 폐를 끼친다는 인식이 퍼져 있기도 하고.
잡일도 제대로 못 한다고 욕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녀석들 중 하나가 갑자기 이삼 년 만에 갑(甲)이 되어 단주로 취임한다고?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다.
“야, 견졸(犬卒)! 넌 어떻게 생각하냐!”
대주를 향해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던 대원 하나가 옆에 있던 대원을 발로 차며 물었다.
반항도 하지 않고 밀리는 대원.
대원들 사이에 완전히 우열이 갈려 일방적인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이었으나, 대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저, 저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인 견졸이라 불린 대원의 모습에 질문했던 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다시 한번 발로 그를 찼다.
“말 좀 답답하게 하지 말라니까!”
“그쯤 해라.”
마지못해 말리는 것처럼 대원을 말린 고규는 견졸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대원을 바라봤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큰일이 날 터이니 밖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
“좋은 말이네요. 입은 만악의 근원이죠.”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오싹함을 느낀 고규가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이미 세 번 정도는 죽었으니, 검을 뽑기엔 늦었죠.”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팔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고규는 고개를 돌려서 상대를 본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유 부단주!’
하필이면 이 사람한테……!
엄격하고 일 처리가 확실하기로 소문난 유예린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접근한 것도 필시 대원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 터.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은…….
“생각이 하찮군요.”
고규의 표정에서 마치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기세를 푼 유예린은 고규와 대원을 지나쳐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견졸의 앞에 섰다.
“백리 맞나요?”
“네, 네……. 맞, 맞는데요?”
한껏 긴장한 백리를 잠시 바라본 유예린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차출 명령서입니다. 내일부터 새롭게 만들어질 단(團)으로 오세요.”
“예?”
“참고로 입단 시험도 있을 테니 마음의 준비는 하시고요.”
“예?”
아니, 그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차마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한 백리가 멍하니 유예린을 바라볼 때, 주위를 둘러본 유예린은 혀를 차고 있었다.
“이런 곳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곳에.
그 한 마디에 백리는 자신도 모르게 서신을 내려다봤다.
꾹.
서신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