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화
295화-졸업식 (4)
붉은 피가 허공을 물들인 그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철백이었다.
단숨에 몸을 돌려 서하영을 감싼다.
그의 등 뒤로 날카로운 일격이 파고들었지만, 거기까지.
고작 가죽을 베어 내는 데 그쳤다.
“우웅?”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
이건 아이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반으로 예쁘게 짝 갈라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전, 괜찮아요……!”
철백의 품에서 이어지는 후속타를 그가 막아 준 것을 깨달은 서하영은 손으로 그를 밀어 냈다.
창을 움켜쥐고, 몸을 비튼다.
어깨에서 피가 솟구쳐 얼굴을 적실 정도였음에도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움직임.
‘정녕 독하구나……!’
왼손으로 휘두른 검이 막힌 것을 확인한 혈사자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창에 담긴 힘이 약해지긴 했으나 자신도 익숙하지 않은 왼손이었기에 뚫어 내지 못했다.
강하게 밀려오는 반탄력에 거리를 벌리자, 순식간에 자세를 고치는 서하영.
그리고.
“후우.”
호흡을 고르며 혈귀를 바라보는 철백.
끓어오르는 분노와 걱정을 가라앉힌 철백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에 동료가 아군에게 물어뜯겨 죽었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없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다음에 죽는 게 자신의 차례가 될지도 모르는데.
적의 손에 죽는 것도 아니고, 아군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게 광신자(狂信者).’
독하다.
너무나도 독하다.
혈교가 왜 무림의 적인지 알 것 같다.
자신의 목숨조차 발판으로 여기는 자들이 타인의 목숨을 아낄 리가 없을 테니까.
거기다.
“혈귀(血鬼)인가.”
언제가 설천위에게 경고를 들은 적이 있다.
혈교와 싸울 때, 아이가 있다면 조심하라고.
옛날 자신들이 싸웠던 그곳에서도 이런 혈귀를 만들고 있었다고.
어린아이들의 육체와 피 그리고 혼을 재료로 만드는 괴물.
그 강함은 기본적으로 초절정 이상이며, 가끔씩 화경급의 괴물도 있다고 했다.
눈앞의 녀석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최소한 초절정 중에서도 상위권은 되는 수준이다.’
초절정이라고 묶어서 부르지만, 그 안에서도 당연히 급이 있고 상성이 있다.
눈앞의 혈귀는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데, 상성도 좋지 않은 상대.
일단 속도가 빠르다.
작은 몸을 하고 있는 이유가 다 있다는 듯 움직임이 몹시 빨랐다.
거기다 강력한 한 방은 아니지만,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내가중수법.
‘단련하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다.’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기에 특별히 내부까지 단련한 철백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수준의 공격들.
그런 공격을 당연하다는 듯이 쓰던 녀석이 사람을 먹어 치우더니 자신의 피부를 뚫을 정도의 원거리 공격까지 가능하게 됐다.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자신이 혈사자로 보이는 이의 손목 하나를 뜯어 놨다는 점이다.
승률이 높은 도박이긴 했지만, 위험을 감수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큰 이익.
그걸 바탕으로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 한다.
다만.
‘하영이의 부상이…….’
서하영의 부상이 철백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상대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서하영도 만만치 않은 수준의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거의 파내듯 깊게 들어간 일격.
왼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끔찍한 고통까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일 수가 없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은 깊었지만,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하나밖에 없다.
자신이 눈앞의 혈귀를 제압하는 것.
2대 2의 상황을 2대 1로 바꾸는 것.
주위에 있는 다른 놈들은 자신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들을 포착한 순간, 참고 몸을 피했을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하나만 잡으면……!
“제가, 이쪽이에요.”
순간, 자신을 자연스럽게 미는 창대의 힘에 버티려던 철백은 서하영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었다.
순식간에 바뀐 자리.
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혈사자.
조금 거칠어진 서하영의 숨소리.
그 순간, 서하영의 의도를 파악한 철백은 이를 악물었다.
말리고 싶다.
허나, 지금 저 선택이 연인으로서가 아닌 동료로서 한 선택이라면.
‘나 또한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다.’
철백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여태까지 철저하게 서하영의 뒤를 지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
그 순간, 철백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한 혈사자는 즉시 검을 세웠다.
“저년을 죽여라!!”
날카로운 외침.
그 순간, 혈교인들이 즉시 서하영을 향해 달려갔으나 철백은 멈추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혈사자의 앞에 선다.
그리고.
‘……허.’
자신을 내려보는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마주한 혈사자는 직감했다.
자신이 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음을.
* * *
혈사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선천지기까지 폭발시켜 철백에게 대항했다.
공격?
필요 없다.
그저 시간만 끌면 된다.
자신이 죽더라도, 조금만 더 늦게 죽으면 된다.
그것만으로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 된다.
물론 자신이 죽으면 혈귀의 제어가 조금 힘들어지겠지만, 눈앞의 두 연놈들을 잡아먹은 혈귀는 결국 교의 흥복이 되리라.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된다.
진짜,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쿨럭.”
손목이 잘린 오른팔을 미끼로 던졌으나.
오른팔만 더 크게 뜯겨 나갔을 뿐 만들어 낸 것은 생채기뿐이었다.
적의 몸을 조금 뚫고 들어갔으나, 왼손을 잃었다.
어떻게든 보법으로 시간을 벌려 했으나 피가 부족한지 주춤거리는 순간이 생겼고, 그 즉시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리고 복부에 맞은 일격.
그것만으로 내장이 완전히 파열됐음을 솟구치는 피를 토해 내는 것으로 혈사자는 깨달았다.
선천지기를 쥐어짰음에도 피부와 근육을 조금 뚫는 것이 고작인 강철의 육체.
“괴…….”
칭찬의 한마디를 꺼내던 혈사자의 목이 그대로 돌아간다.
정녕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확인 사살.
그리고 즉시 몸을 돌린 철백은.
“으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포효했다.
대지가 뒤흔들릴 정도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늘어트린 창을 쥔 손이 떨린다.
그럼에도 서 있었다.
필사적으로 회피와 방어를 반복하며 시간을 끈 서하영은.
“히히?”
화하게 웃는 괴물 앞에서.
서하영을 상대한 혈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녕 괴물이다.
왼쪽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전방위를 아우르는 압도적인 방어.
대체 어떻게 하면 창을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서하영의 방어는 철벽과도 같았다.
허나, 절대적인 철벽이란 없는 법.
혈귀의 공격으로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파고든 혈교인들의 검은 서하영의 몸에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세는 것조차 힘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흐른다.
죽음.
지금은 서 있을 수 있으나,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죽음을 지척에 둘 정도의 출혈량이다.
제대로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상태.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버텨 냈다.
창을 들었다.
“제가, 나머지를.”
제대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면서도 서하영은 창을 들어 혈교인들을 겨눴다.
그리고.
“히히!”
그 모습에 달려드는 혈귀.
그녀의 다짐 따윈 상관없다는 듯 그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드는 혈귀였으나.
쾅!!
강렬한 충격이 그 몸을 날려 버렸다.
허공에서 자세를 고친 혈귀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
허공에서 부딪치는 주먹과 주먹.
철백이 내지른 철권과 혈귀의 주먹이 맞부딪히는 순간, 혈귀의 주먹이 짓뭉개졌다.
서하영의 창조차 막아 냈던 손이 단숨에 으스러진다.
그제야 혈귀는 눈치챘다.
상대의 몸을 기이한 은빛 기류가 휘감고 있음을.
그것은.
절대 꺾이지 않는 고고한 강철의 힘.
억겁에도 불변하는 지고한 금강의 힘.
흩뿌리는 피의 검기가 철백의 몸 위에서 부서진다.
은빛 기류는 그 육체를 휘감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육체에까지 깃들었다.
단숨에 상대를 붙잡은 철백의 손이 그대로 그 부위를 뜯어낸다.
어깨, 팔, 몸 가릴 것 없이.
잡히는 족족 뜯겨 나간다.
허나, 아직 불완전한 힘이어서 그럴까.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철백의 육체에 깃든 기(氣)가 줄어들며 그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다만.
“끼히?”
혈귀는 이미 그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뜯겨 나간 곳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꿀렁이지만, 그 액체는 형체를 이루지 못했다.
본래라면 복원됐어야 할 육체가 재생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철백이 두른 은빛의 기류 때문이다.
그의 몸에 막대한 기가 깃들어 만들어진 철기체(鐵氣體)와 설천위와 함께하며 쌓였던 영력, 철백의 고고한 정신이 합쳐 만들어진 힘.
금강호령(金剛皓靈).
그 힘이 혈귀의 혼 자체를 뜯어낸 것이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혈귀.
그 혈귀에 손을 뻗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철백은 즉시 몸을 돌렸다.
시체 위에 서 있는 서하영.
버티기만 해도 될 터인데, 기어코 남은 적들을 전부 베어 넘긴 것이다.
“하영!!”
철백의 부름에 안도한 듯 서하영의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 * *
“그 뒤로 신의가 만들어 주신 약을 꼼꼼히 바른 뒤에 바로 이곳까지 달려왔다.”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한 철백의 말에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혈귀랑 싸운 몸으로 그대로 달려왔다고?”
“서 소저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신의가 아니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맞는 판단이었다. 아마 어중간한 의원에게 맡겼다면 악화되어 죽었을 게다.]
너무 심각한 상처는 실력이 없는 의원이 잡을 수 없다.
상처를 전부 잡지 못하면 당연히 몸은 서서히 약해지고 죽음에 이른다.
다행히 신의가 미리 내준 약이 출혈을 잡아 줘 과다출혈로 죽는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사람은 의원을 가장 먼저 찾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소중한 이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은 판단력을 흐리기에 충분한 요소다.
그럼에도.
[강철 같군.]
[허허, 참…….]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고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것은 대단하다.
그리고 도망친 게 아니라는 말을 왜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적들을 전멸시켰으니 추적해 오는 이들은 없었을 테니까.
“……저, 학관장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부탁하지.”
상황 파악이 끝난 주현운이 보고를 위해 병실을 나갔고,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탕약 끓여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고맙다.”
철백의 인사에 대충 손을 저으며 병실을 나선 설천위는 마침 재료를 구해 왔다고 알리는 의원과 마주쳐 탕약실로 향했다.
까득까득.
탕약실로 향하는 내내, 설천위의 눈을 도저히 마주칠 수 없는 의원은 빨리 탕약실에 도착하길 기원했다.
이를 가는 설천위에서 흘러나오는 살의에 숨이 막힐 것 같았으니까.
* * *
“제4 혈사자가 죽었다고?”
“예, 확인했습니다.”
“……혈귀는?”
“소멸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소멸(燒滅).
인위적으로 만든 악귀를 빚어낸 육체에 가둔 혈귀는 죽지 않는다.
육체는 새로 빚어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악귀 즉 영체 자체에 손상이 가해지면 심한 경우 아예 존재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소멸은 혈귀의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
“……예상치 못한 피해로군.”
제4 혈사자는 술법에도 능해 많지 않은 혈귀를 육성할 수 있는 혈사자다.
술법으로 본인의 몸조차 최대한 젊게 유지할 수 있는 뛰어난 술사.
그런 술사이기에 혈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며 키울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인재가 죽었다는 것은 교에 크나큰 손해다.
다만.
“조사만 하고, 보복은 미뤄 두도록.”
“예.”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처리를 우선시해선 안 된다.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 사내는 홀로 걸었다.
동굴의 더 깊은 곳으로.
등불 하나에 의존해 나아가는 사내의 눈에 여태껏 모아 온 교(敎)의 힘이 들어온다.
붉게 요동치는 거대한 피막.
“천신강림 혈세도래.”
세상은 머지않아 피로 씻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