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293화-졸업식 (2)
졸업식 시작과 함께 극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철백.
그 모습에 화가 솟구친 설천위가 학관을 박차고 나가려는 그때.
“잠깐만요!”
그나마 설천위와 친분이 있는 제갈소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냉정해지세요! 학관장님이 닷새라는 시간을 준 건 두 사람이 회복한 뒤에 졸업식에 참석하라는 의미……!”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그래도 닷새 안에 회복해서 졸업식에 참석하는 건…….
[가능하다.]
“……가능하다고요?”
[무림인의 회복력이라면 거동 정도는 가능해지겠지.]
[그러니 일단 침착하게 기다리거라.]
혼들까지 말리자, 설천위는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정말 오랜만에 [부동심]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정도로 화가 솟구친 느낌.
“후.”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제갈소를 바라봤다.
“정보는?”
“그, 그게 아직 없어요…….”
“그럴 수가 있나?”
철백이 저렇게 달려오는 걸 아무도 못 봤…….
아!
[저놈은 말보다 빠르니 말이다.]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깨달았다.
철백이 진짜 전력으로 달렸다면 이 세계의 정보 전달 수단으로는 정보가 먼저 올 수 없다는 걸.
전서구는 생각보다 귀한 수단이다.
교육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무림맹은 몰라도 무림학관에서 넉넉한 숫자의 전서구가 있을 리 만무.
철백이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저렇게 달려왔다면 정보가 먼저 도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도 철백의 기척을 느끼고 얼마 안 있어 철백이 연무장에 도착했을 정도의 속도라면 더더욱.
“바로 조사를 시작할게요. 일단 철 소협이랑 서 소저를 챙겨 주세요.”
“……알았다.”
제갈소의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없다면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게 없었다.
정보야 철백에게서 얻어도 되니까.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물러서자, 제갈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저희도 바로 움직일게요!”
* * *
“다행히 안정됐다고 해요.”
철백과 서하영이 쉬고 있는 병실에 도착한 설천위는 주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들이 놀라던데요.”
“당연하지.”
누가 한 치룐데.
“추가적으로 치료할 게 더 있나요?”
[지금 필요한 탕약 짓는 법을 알려 주마. 아침저녁으로 먹이거라.]
“네.”
신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그대로 신의가 가르쳐 주는 방법을 외웠다.
한 번 들은 것만으로 전부 외운 설천위는 그대로 약제당의 의원을 불러 약재를 부탁했다.
약재가 모이면 직접 탕약을 만들 생각이다.
신의의 조언을 들을 수 있어야만 약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벌써 일어났냐?”
그렇게 여러모로 생각하던 설천위는 슬쩍 눈을 뜬 철백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그 옆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천위.”
“그래.”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는데.”
“졸업식, 망쳤지 않느냐.”
“됐다. 졸업식이 뭐라고. 그리고 어차피 닷새 정도 미뤄졌다.”
“미뤄졌다고?”
“그래. 학관장님이 연기해 주셨어.”
물론 그렇게 해서 손님들에게 발생한 시간적 손실은 이쪽이 메워야겠지만.
여러모로 손해가 막심할 거다.
팽후가 호의로 그것을 대신 지불해 준다고 해도 갚아야 할 빚이라는 건 명백했다.
“……다행이군.”
설천위의 말에 살짝 안도한 철백은 자신의 옆쪽 침상에 누워 있는 서하영을 바라봤다.
졸업식을 기대했던 서하영이 우는 모습은 안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맙다.”
다시 고개를 돌린 철백의 인사에 설천위는 손을 저었다.
“그 말은 학관장님 오시면 그분께 하고.”
조금 표정이 굳은 설천위는 본론을 꺼냈다.
철백이 일어났으니, 굳이 질질 끌 필요가 없다.
“내가중수법에 당했네.”
“달리면 달릴수록 내상이 심해지더군.”
“그랬겠지.”
왠지 장난 아니게 심하더라.
신의가 철백에게 죽음을 경고할 정도면 정말로 끔찍한 수준이라는 건데…….
내상을 입고도 죽어라 달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용케 도망치는 데 성공했네. 아니, 도망치면서 입은 건가?”
“아니다.”
“……아니라고?”
아니, 그럼 자빠져서 내상을 입었나?
철백의 부정에 설천위를 비롯한 다른 이들까지 고개를 갸웃하자, 철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친 게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무림학관으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할 일이 있어 아쉽게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는 유예린을 뒤로하고 철백과 서하영은 둘이서 무림학관으로 귀환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하는 단둘뿐인 여행.
임무를 떠난 설천위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솔직히 즐거웠다.
가도를 걷는 것도.
가끔 달리는 것도.
마을에 들러 구경을 하는 것도.
노숙하며 밥을 먹는 것도.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것도.
그냥,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는데…….
“……철 가가.”
“음.”
서하영의 부름에 걸음을 멈춘 철백은 몸을 숙여 흙을 만졌다.
“피가 배어 있군.”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은데요.”
주위를 살핀 서하영의 말에 철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리 오래된 핏자국은 아니었다.
거기다.
“꽤나 규모가 큰데.”
피가 스며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산적인가?”
물건을 가지고 이동 중이던 상단이 습격당했을 경우다.
호위의 숫자가 적어 아예 전멸시키고 물건을 통째로 가져갔다고 보는 게 맞다.
거기다 아예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시체 또한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고.
다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데요.”
“음.”
핏자국이 너무 많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최소 스물 이상.
이 정도 숫자의 적과 싸우면 아무리 잘 싸워도 눈먼 칼에 맞을 수 있다.
산적들의 무공 수준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녹림채 직속의 산적들이 아닌 이상, 이만한 숫자를 전멸시키고 약탈할 생각은 안 할 거다.
심지어 이곳은 정파의 영역.
적당히 통행세나 받고 넘어가는 게 최선일 텐데…….
산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격한 방식에 철백도 답을 내지 못하고 주위를 살폈다.
산을 넘어가는 작은 길.
이런 길을 스물이 지나가면 그 행렬이 꽤 길었을 텐데…….
‘도망친 이가 없나?’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잠시 고민하던 철백은 고개를 돌려 서하영을 바라봤다.
“찾아보고 싶은데, 괜찮아?”
“네! 저도 찾고 싶었어요!”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영.
그 모습에 웃으며 철백이 머리를 쓰다듬자 서하영은 작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 취급은…….”
“알았어.”
빙긋 웃은 철백은 조금 더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야 손을 거뒀다.
저렇게 말해도 바로 손을 거두면 아쉬워하는 모습을 몇 번 봤기 때문이다.
“움직이자.”
즐거웠던 여행은 여기까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혹시 모를 적들을 찾기 위해 철백은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남은 흔적들을 찾아 적들을 추적한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시체를 전부 가져갔다는 것.
그게 이상했다.
짐은 돈이 될 테니 당연히 챙겨 갔다고 해도 시체를 굳이?
몇몇 핏자국은 죽음이 확실할 정도로 피가 많이 고여 있었다.
즉, 확실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
아무리 흔적을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산적이 시체까지 가져가나?
약탈한 짐을 가져가기에도 버거울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단순한 산적들의 소행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이 거슬렸다.
분명.
‘뭔가 있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상황.
차분하게 적들의 흔적을 쫓으며 생각에 잠긴 철백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팔에 의해 움직임을 멈췄다.
‘……있어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전음을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다급한 반응.
그 순간, 고개를 든 철백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자신은 다른 무인처럼 민감한 기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내공이 없으니까.
그러니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코를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냄새.
모든 감각에 날을 세운 철백은 서서히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에 귀 기울였다.
“……준…… 거의…….”
“그…… 시…….”
드문드문 끊겨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내용.
그럼에도 철백은 눈을 떴다.
“적이야?”
“……아무래도요.”
자신과 달리 대화를 좀 더 선명하게 들었을 서하영이 있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서하영의 얼굴에 철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출을 최우선으로.”
“네.”
구출 최우선.
즉, 상대가 강하면 잡혀 있는 이들만 구해서 빠져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소리다.
반대로 말하면.
“컥!”
적의 수준이 비벼 볼 만하다면, 싸우겠다는 소리.
적의 목을 꿰뚫은 창을 단숨에 뽑아내는 서하영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한다.
깊은 내공을 지닌 증거.
초절정에 오른 무인의 격(格).
그 순간, 상대의 강함을 읽은 적들의 몸이 굳었다.
“뭐, 뭐 하는 놈들이냐!”
동료가 공격당했음에도 바로 반격하지 않고 주춤거리는 것이 그 증거.
기세를 가져왔음을 깨달은 철백은 곧바로 움직였다.
뿌득!
단숨에 파고든 철백의 주먹에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한 이가 튕겨 나간다.
완전한 안면 골절.
즉사다.
“네, 네놈들! 무슨 짓이냐!”
“해야 할 말이 틀렸다.”
당황해서 외치는 상대를 향해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그의 뒤로 파고든 누군가의 검이 그의 근육에 부딪혀 부러졌고.
“컥!”
검이 부러져 당황하는 이의 목을 움켜쥔 철백은 윗사람으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진형을 짜라고 말했어야지.”
“끄아악!”
상대의 목을 그대로 꺾어 버린 철백은 담담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무림에는 격언이 있다.
모르는 타인의 일에는 간섭하지 마라.
무림에서 살인이란 악과 선을 가르는 명확한 잣대는 되지 못한다.
불살의 가르침을 받는 스님마저 더 큰 살업을 막는다는 이유로 살계를 펼치는 곳이 무림이거늘.
살인만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어찌 세울 수 있겠는가?
섣불리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괜한 원한만 쌓을 뿐, 절대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허나 그럼에도 철백은 서하영과 함께 간섭했다.
왜?
단순히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놈들이라?
그럴 리가.
철백도 서하영도, 그렇게까지 물렁한 사람은 아니다.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짙은 피 냄새가.
죽음에서 피어나는 절망의 냄새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저주하는 원혼들이.
들리기 때문이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절규가.
“혈교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철백은 물었다.
“……흥!”
대번에 코웃음을 치는 상대.
아까 전까지 당황하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린다.
“어린놈들이 눈치가 빠르군.”
들켜선 안 되는 것을 들켰다는 듯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
도망칠 궁리를 하던 것조차 포기한 듯 사내는 검을 들었다.
“쳐라!!”
“대답 한번 많이 돌려서 하는군.”
달려오는 적의 검을 손바닥으로 쳐서 부러트린 뒤, 그대로 그 목을 붙잡고 꺾어 버린 철백은 자신의 뒤를 서하영에게 맡겼다.
단순한 진형.
그러나.
뚫리지 않는다면 철옹성과 같은 진형이다.
“일제히 파고들어라!!”
사내의 고함에 달려드는 이들.
허나, 뚫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철백은 자신의 몸이 닿는 모든 범위를 완벽히 막아 낼 수 있다.
몸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막아 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서하영의 창을 이용한 제공권은 화경급 고수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수준.
달려가는 모든 적이 분쇄 당하고.
찢겨 나간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적을 몰아붙이던 그때.
쾅!!
“흐읍!!”
강렬한 충격과 함께 철백이 크게 발을 찍힌다.
그 발을 통해 흘러간 강렬한 충격이 대지를 흔든다.
명백하게 여태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공격.
자신의 복부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에 철백은 고개를 내렸다.
“…….”
허나, 철백이 아직 서 있다는 것에 작게 고개를 갸웃한 상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뒤틀었다.
쾅!!
철백이 상대를 붙잡는 것을 피하며 파고드는 일격.
내부를 뒤흔드는 발경에 철백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의 뒤에는 서하영이 서 있으니까!
그녀의 뒤를 열어 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그리고 철백의 그런 다짐과 비슷한 다짐을 서하영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도 지금.
“호오.”
붉은 검기를 뿜어내는 검사가 자신의 제공권을 뚫고 걸어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