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292화-졸업식 (1)
“……뭔가 어색한데.”
[뭐가 말이냐?]
“아니, 왜 아무도 습격해 오지 않는 건가 해서…….”
[……그래서 가는 내내 잔뜩 경계하면서 움직였던 게냐?]
설천위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천마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청란초를 캐서 가장 가까운 무림맹 지부에 맡긴 뒤 설천위는 곧바로 남궁선과 헤어졌다.
보고는 남궁선이 전서구로 보냈겠다.
애초에 아직 무림맹 소속도 아니니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어서 곧장 학관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달렸던 거고.
문제는.
“정보가 안 샜을 리가 없는데…….”
[무림맹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구나.]
무림맹에서 정보가 샜다면 공격해 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미친 듯이 달리며, 설천위는 연신 주위를 훑었다.
매복이라도 있으면 즉시 대응하기 위해서.
진짜 정보가 안 샜나?
무림학관이 상당히 가까워질 때까지 아무런 습격도 없는 상황.
진짜 안 샌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열심히 달리던 설천위는 한참을 뛰어가고 나서야 멈췄다.
“후우.”
[슬슬 야영을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네.”
죽어라 달리고 있긴 하지만, 역시 시간이 걸린다.
남궁선처럼 앞에서 끌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속도가 조금 덜 나는 느낌이다.
물론, 무리해서 좋을 건 없기에 혼들도 재촉을 안 하고 있지만.
‘……꽤 여유 있는데?’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한 이틀 전쯤에는 도착할 것 같다.
졸업식 참가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가능할 것 같은 상황.
문제는…….
“씁, 오히려 불안한데.”
모닥불에 장작을 더 넣으며 설천위는 목을 삐딱하게 꺾었다.
아니, 왜 습격이 없지.
혈교나 혈사련, 아니면 다른 이름 모를 놈들이라도 노리고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쯧쯧, 쓸데없이 걱정만 많구나.]
“아니, 그렇잖아요.”
자신이 혼자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철천지원수를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 독한 놈들이?
이상한데…….
[갑(甲)이라는 등급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그런가?”
[이 무림에 화경급 이상의 고수가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꽤 흔하지 않나요?”
당장 무림맹에만 해도 열 명은 있는데.
구단(九團)의 단주들에다 맹주까지.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집법당(執法堂)의 당주도 화경급 고수다.
본인은 숨기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지.
무림맹에만 11명.
사천맹도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꽤 많은 숫자의 화경급 고수가 있을 거다.
아무리 무림맹에게 사천맹이 필요악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힘의 수준이 맞아야 대치도 가능한 거니까.
사천맹은 속이 구린 놈들이 많아서 겉으로 드러난 숫자보다 더 있을 테고.
또, 두 조직에 속하지 않는 화경급 이상의 고수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살존(殺尊)이 있다.
이 사람은 사파(邪派)로 규정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사지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천맹 소속도 아니고, 무림맹 소속도 아닌 데다.
사파, 정파 가리지 않고 의뢰를 받으니까.
물론, 정파에서는 사람 목숨으로 장사하는 살수를 인정할 수 없다며 사파로 규정하고 있지만.
거기다 음지에 있는 이들까지.
양손은 물론이고, 발가락까지 다 동원해도 세기 힘들 만큼 이 무림에는 화경급 고수가 많다.
딱히 적다는 생각은 안 들 정도로.
[쯧쯧, 적은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표정이구나.]
“……아니에요?”
[아니다. 화경급 고수의 평균 연령은 마흔이 넘는다.]
“그야 그렇겠죠?”
고된 수련 끝에 올라가는 경지가 화경이니까.
솔직히 남궁선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재능이고.
구단(九團)의 단주들은 대부분 대형 문파나 가문의 최고수가 맡고 있다.
그리고 그런 최고수는 대체로 문주 혹은 가주와 같은 항렬에 있는 경우가 많다.
본인인 경우는 더 많고.
남궁선이 단주들 사이에서 어린 취급을 받는 이유가 있다.
다른 단주들의 딸뻘 되는 나이니까.
실제로 남궁선이 단주로 취임하기 전까지 그녀의 아버지가 단주를 맡고 있기도 했고.
여하튼 무림맹의 단주들만 봐도 그 평균 나이가 상당히 높다.
[화경급의 고수는 키워 내기가 정말 힘들다.]
“그렇겠죠?”
재능 있는 사람이 수십 년을 수련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니까.
[헌데 너는 그 경지에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도달했지.]
[거기서 다른 놈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네게 자신들의 화경급 고수를 보냈을 때의 최악을 말이다.]
[널 이긴다고 확신해도, 아무런 손해도 없이 돌아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지.]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리면 더 이상 화경급 고수라고 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잃어버린 무력을 회복할 수 있더라도 정말 긴 시간이 걸릴 거다.
화경급 고수는 키워 내기 정말 힘든 전력.
아무리 설천위가 눈엣가시라고 해도 무리하게 전력을 투입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네 녀석은 갑(甲)에 오르기 전에 화경급 고수를 죽인 전적이 있지.]
“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네가 갑(甲)에 오르면서 더 강해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러네.
혼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불쏘시개를 들었다.
뭐, 그럼 이대로 돌아가서 졸업식만 하면 되겠네.
* * *
“진짜 별일 없이 도착했네.”
무림학관의 정문.
생각했던 대로 졸업식 이틀 전쯤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느긋하게 정문을 통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과 직원들.
졸업식 준비가 한창인가 보다.
무림학관의 졸업식에는 이름 있는 사람들도 꽤 오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다들 열심히 일하네.
나름대로 평화로운 광경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던 설천위는 반가운 얼굴에 손을 흔들었다.
“현운아!”
“형님! 돌아오셨어요?”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주현운.
[허허, 그새 늘었구나.]
[깔끔하군.]
그 깔끔하기 그지없는 신법에 혼들이 감탄했다.
그런 혼들의 반응에 설천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끝내주긴 하네.
“음? 근데 혼자 오셨어요?”
“어, 잠깐! 철백이랑 서 소저는 안 왔어?”
“네. 아직 안 왔는데요?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요?”
철백과 서하영이 안 왔다.
그 말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딱 맞춰서 오는 일정인가?’
굳이 이틀 전에 도착할 필요는 없긴 한데.
잠깐 고민하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철백과 서하영인데 알아서들 잘 오겠지.
둘이 꽁냥꽁냥 하느라 좀 늦는 거겠지, 뭐.
두 사람을 향한 믿음으로 가볍게 걱정을 털어 낸 설천위는 주현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알아서들 잘 오겠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전 소 소저랑 약속이…….”
“……더러운 배신자 놈.”
* * *
졸업식 당일.
졸업생들을 위한 자리에 앉은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린 채 다리를 꼬았다.
팔짱을 낀 손에는 졸업식 연설을 위한 연설문이 적힌 종이가 펄럭였다.
“늦어.”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에 휘말린 것 같구나.]
걱정이 가득 담긴 혼들의 목소리에도 설천위는 말없이 단상 위를 바라봤다.
셋이서 함께 올라가자고 한 단상.
반드시 셋이서 함께 졸업하자고 웃던 서하영.
그런 서하영을 보며 작게 웃던 철백.
그 모습을 놀리며 히죽이던 자신.
계(癸)라는 이유로 친해져서.
함께 사선을 넘고, 함께 수련하며 정진한 친구들.
“……짜증 나는군.”
그런 친구들 없이, 졸업식 단상 위에 서고 싶지 않다.
제갈소에게 부탁받은 졸업식 연설을 위한 종이가 손안에서 구겨진다.
그래, 이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졸업식이고 나발이고, 두 사람이 없다면 굳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선 설천위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미 시작 시간이 가까워진 졸업식.
팽후의 시선이 자신을 좇는 게 느껴졌지만, 설천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설 형?”
이쪽을 눈치챈 주현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찾으러 간다.”
짧은 대답.
그 대답에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던 주현운의 얼굴이 이내 한숨과 함께 펴진다.
“그럼 미리 움직이시지…….”
말은 투덜거리면서도 설천위에게 따라붙는 주현운.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소윤혜도 따라붙는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설천위는 말없이 걸었다.
설천위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
그 돌발 행동에 졸업식을 준비하던 학생과 교관들은 물론, 찾아온 손님들마저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때.
“어딜 가느냐?”
저 멀리 있음에도 지척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히 들리는 팽후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친구를 찾으러 갑니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 대답에 팽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런 아이지.
그렇기에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고.
허례허식 따윈 없다.
저 녀석이 이 졸업식에 참석하려 했던 이유는 이 행사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니까.
친구들이 없다면, 당연히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멈추거라.”
“……이유가 있으십니까?”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제대로 반항하겠다는 눈빛.
자신을 돌아본 설천위의 그 눈빛에 팽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을 세마.”
“지금…….”
협박하는 것입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순간, 설천위는 이상함을 느꼈다.
“하나.”
바닥이 묘하게 울리는 느낌.
“둘.”
강렬하기 그지없는 기세.
“셋.”
쾅!!
강렬한 소리와 함께 대연무장의 대문이 박살 난 채 날아간다.
“천위!!”
거칠어진 호흡을 내뿜으며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철백의 뒤로 당황한 이들의 표정이 보인다.
거기다 거대한 포탄이 지나간 것 같은 자국까지.
철백을 말리려다가 실패한 이들의 경악 어린 표정.
“치료를!!”
본인부터 피를 한껏 뒤집어쓴 주제에 철백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서하영을 내밀었다.
단숨에 철백의 앞까지 도달한 설천위는 그대로 서하영의 맥을 짚었다.
[위험하다.]
신의의 경고.
그 경고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신의에게 몸을 내줬다.
빙의되자마자, 순식간에 손을 쓰기 시작한 신의.
수십 곳의 혈을 누르고, 평상시에 챙겨 다니던 약을 먹인다.
조금이나마 안정된 서하영의 호흡.
“즉시 약제당으로 데려가 눕히거라.”
[즉시 약제당으로 데려가 눕히거라.]
“예!”
신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철백이 움직이려는 순간.
“너 말고.”
[너 말고.]
신의가 그런 철백을 붙잡았다.
그러자 눈치 있게 다가온 주현운이 조심스럽게 서하영을 챙겨 소윤혜와 함께 약제당으로 달렸다.
“너도 중상이다. 철가 놈아.”
[너도 중상이다. 철가 놈아.]
“저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서하영의 곁에 가려고 일어서려는 철백을 붙잡으며 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내상이 심각하다. 아무리 너라도 이 이상 방치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내상이 심각하다. 아무리 너라도 이 이상 방치하면 죽을 수도 있다.]
피를 뒤집어쓴 철백이지만, 입술과 피부가 드러나 있는 부분이 있다.
거기다 동공의 색, 호흡의 불규칙함 등등.
보는 것만으로 철백의 상태를 꿰뚫은 신의는 철백을 눕히고 혈을 누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철백에게도 응급조치를 한 신의는 즉시 설천위에게 몸을 넘겼다.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신의 감각이 미처 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달려온 철백.
그 품에 안겨 있던, 중상의 서하영.
“학관장님.”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팽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은 닷새 뒤로 연기해 주마.”
철백의 부상 상태를 고려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원인.
닷새면 충분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