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291화-청란초 (3)
청각사를 통으로 날려서 남궁선을 의도치 않게 구해 버린(?) 설천위는 헛기침과 함께 주위를 둘러봤다.
상황은 상당히 좋았다.
청각사가 강하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화경급 고수 둘.
고작 효과 좋은 내상약에 쓰일 재료를 모으겠다고 움직일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전에는 어떤 사람이 왔었는지는 몰라도…….
“어림도 없지.”
날아간 충격을 이겨 내고 몸을 일으키는 청각사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휘휘 돌렸다.
근육이 갑자기 활성화되어서 그런가.
수축된 것처럼 근육이 뻐근했다.
물론, 그래도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아니, 오히려 움직일수록 몸이 풀리는 것처럼 뻐근함이 사라져 기분이 좋을 정도다.
“드루와!!”
샤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청각사.
그런 청각사를 향해 달려들어 힘 싸움을 벌이는 설천위.
인간이 길이가 6장(약 18m)이 넘는 거대한 뱀과 맨몸으로 싸우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남궁선은 멍하니 검을 늘어트렸다.
아니, 싸우는 건 괜찮다.
무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권법은 어디다 엿 바꿔 먹었니?
현란한 보법은커녕, 주먹을 휘두르는 것에도 권법의 형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설천위가 형(形)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고수는 아니니…….
“……무식한 녀석.”
단순히 힘으로만 몰아붙이고 있다는 소리다.
추측할 수 있는 원인으로는…….
‘적응하지 못한 건가?’
과도하게 늘어난 근력에 맞춰 권법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권법은 그냥 전력을 다해 휘두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전혀 아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목숨을 건 혈투만을 겪으며 자란 무인(武人) 중에선 극도로 힘 조절에 약한 이들이 있다.
전투에 들어간 순간, 반사적으로 전력을 내 버리는 경지에 도달한 이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전투가 곧 생존을 향한 발악이 된 이들.
그런 이들은 분명 빠르게 강해지나, 벽을 뛰어넘는 데 큰 곤욕을 치른다.
힘 조절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의지대로 힘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소리와 같으니까.
극에 이른 섬세함을 요구하는 초인들의 영역에서 그런 결함은 아주 치명적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으로 그것을 어떻게든 무마할 순 있겠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설천위는 지금 그런 사람들과 비슷한 상태에 이른 것 같다.
육체의 힘이 너무 강해져 섬세함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상태.
분명 겉으로는 큰 힘을 보여 줄 순 있으나…….
‘무인을 상대로 쓸 수 있는 방식은 아니네.’
동급의 무인에게 썼다간 힘도 제대로 못 다루는 머저리 취급이나 당할 거다.
화경급 고수 중에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는 극히 드무니까.
그리고 이런 남궁선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내가 다 부끄럽구나…….]
[허허.]
[무식한 놈.]
물론, 그 정도가 조금 심하긴 했다.
혼들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정도로!
[내가 분명 혼에 새길 정도로 수련을 시켰거늘…….]
[대체 몸이 강해졌다는 이유로 권법을 잊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아, 그럴 수도 있죠!’
[쾌(快)의 권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는데…….]
설천위의 작은 항의에 천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식한 놈은 근력이 너무 강해지자 속도를 잃어버렸다.
아니, 근력이 강해졌으면 그냥 속도만 빨라지면 되지, 왜!
[통제를 못 하냔 말이다!]
근력이 강해진 정도로 몸의 연계가 엉망이 됐다.
주먹에 체중을 싣는 가장 간단한 방법도 꽤나 복합적인 동작이 요구된다.
하체를 움직이고, 허리를 틀고, 상체를 비틀며 근육을 쥐어짠다.
이런 복합적인 연결이 있고 나서야 주먹에 체중이 실려 강한 위력을 낸다.
하물며 어느 정도의 위력을 유지하면서 속도까지 추구하는 주먹은 더욱 복잡한 과정을 요구한다.
문제는 설천위, 이놈은 근력이 과하게 증가한 것 하나만으로 그 과정 전부가 어긋나 버린다는 점이다.
허리에 힘이 너무 들어간다거나, 근육을 너무 조인다거나 하는 등등.
완벽하게 제어되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동작이 힘의 증대로 끊겨 버린 것이다.
덕분에 [섬벽권(閃霹拳)]이라는 좋은 권법을 두고 저 뱀들과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오는 길에 보았던 설천위의 말도 안 되는 체력에 자신들의 혹독함을 반성했던 혼들이 정신을 차릴 정도의 끔찍한 재능.
그야말로.
몸치 그 자체.
아니, 최근에는 그나마 좀 나아진 것 같았는데 대체 왜…….
혼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사이, 권법을 포기한 채 청각사들과 치고받고 싸우던 설천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니, 사람이 좀 적응이 느릴 수도 있지.
거, 너무들 하시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청각사의 꼬리를 붙잡은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쿵!
그대로 휘둘러 청각사의 머리를 땅에 한 번.
쿵!
그대로 또 한 번.
두 번 만에 기절한 청각사를 휙 던지고 곧바로 다음 청각사를 상대한다.
그냥 무대포로 휘두른 주먹에 날아갔다 돌아온 청각사가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달려든다.
그런 청각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설천위는 주먹을 휘둘렀다.
허리의 힘이 과하게 들어가 속도랑은 거리가 아주 먼, 천마가 절로 탄식하게 만드는 일권(一拳)!
청각사도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설천위도 무림학관에서 지낸 세월이 어언 수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무림학관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런 청각사의 움직임도 따라가지 못하겠는가!
권법을 과감하게 포기한 만큼 전력으로 방향을 트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그대로 팔꿈치를 찍었다.
형(形)이 없는 막무가내 주먹이기에 가능한 변화.
[그냥 중심이 없는 주먹이지 않느냐!]
제대로 꽂혔어도 제 위력을 내지 못할 주먹을 다른 공격으로 바꾸는 게 뭐가 어렵다고!
정말 오랜만에 듣는 천마의 호통과 함께 청각사의 몸체에 꽂힌 팔꿈치가 깊게 박힌다.
짧은 비명과 함께 축 늘어지는 청각사.
천마의 호통을 가볍게 무시한 설천위는 튀어나오려는 입을 집어넣으며 당당하게 섰다.
“덤벼라, 이놈들아!”
* * *
“아직도 수련이 한창 필요하겠네.”
“……흠흠.”
청각사가 둥지를 틀고 있는 동굴.
비릿한 냄새가 가득한 동굴로 들어서며 설천위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수련은 원래 평생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응, 그런데 넌 그걸 감안해도 더 필요할 것 같아.”
“……누님!”
이 사람이 진짜.
정말 가감 없이 말하는 남궁선의 말에 설천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 누나한테 욕을 할 순 없지.
[맞는 말이다.]
[확실히 단주쯤 되니 눈이 좋군.]
……맞는 말이기도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혼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설천위는 다시 남궁선을 바라봤다.
“……누님?”
“응?”
“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
“……그냥, 단련 열심히 했구나 싶어서.”
옛날에 가르칠 땐 이 정돈 아니었는데.
[패룡기(覇龍氣)]를 거둔 설천위는 아직도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약초를 캔 뒤에 강에서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동굴에 들어가서 어떻게 더러워질지 모르니까.
덕분에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근육들이 동굴 속 희미한 빛을 받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철백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한 무인 정도는 가볍게 따귀를 때릴 수 있을 것 같은 근육.
“흠흠, 그렇죠?”
남궁선의 칭찬에 만족스럽게 웃은 설천위는 근육을 꿈틀거렸다.
[패룡기(覇龍氣)]의 여파로 근육통이 장난 아니지만, 계속해서 [회복]을 돌리면 금세 해결될 문제다.
내공이야 뭐, 아직 한참 여유가 있으니 문제없고.
“근육의 밀도가 장난 아닌데.”
“여러 방식으로 수련했습니다.”
남궁선의 칭찬에 설천위는 당당하게 수련에 과한 썰을 풀었다.
물론.
“……대단한데?”
“그렇죠?”
대부분의 내용이 수련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는 소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남궁선은 크게 놀랐다.
기초 훈련을 그렇게까지 쌓는 무인은 생각보다 흔치 않아서다.
특히, 경지에 오른 무인일수록 기초 훈련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중요한 건 내공이지 외공이 아니니까.
외공은 무공을 펼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준만 유지하면 된다.
당연히 그렇게 긴 시간을 외공 단련에 쓰지 않는다.
초식 훈련은 재미라도 있지.
단순 기초 훈련은 지루하기까지 하니…….
“그런데, 저렇게 제압만 해도 되나요?”
“응. 뭐 얘기로 들었던 것보다 조금 더 강하긴 한데, 문제없겠지 뭐.”
한창 수련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설천위가 뜬금없이 던진 질문에 남궁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청각사에 대해선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강했다.
수개월에 한 번씩 오는 만큼 청각사도 강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금 빠른데.’
영물이란 것이 그렇게 확확 강해지진 못한다.
그냥 얌전히 기(氣)가 강한 곳에서 호흡만으로 기(氣)를 쌓는 영물이다.
딱히 심법이나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렇게 단기간에 강해졌다는 건 나쁜 신호였다.
둘 중 하나.
청각사가 무언가 강해지는 방법을 찾았거나.
누군가가 청각사를 강하게 만들고 있거나.
전자의 경우, 앞으로 청란초를 캐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질 거라는 문제점이 있고.
후자의 경우, 외부 세력이 이 장소를 알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청란초가 남아 있을지도 불확실해지는데…….
“다행이네.”
동굴의 끝에 도착한 남궁선은 작게 안도했다.
다 털렸으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다행히 청란초는 무사했다.
“적당히 캐고 나가자.”
“네.”
밖에 기절시켜 놓은 청각사들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긴 시간 머무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금 정도는 남겨 놔야 다음에 왔을 때 또 캘 수 있기도 하고.
그렇기에 적당량을 재빨리 채취한 남궁선과 설천위는 빠르게 손을 털고 일어섰다.
“자, 그럼 돌아가자.”
“넵.”
미련 없이 남궁선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온 설천위는 슬슬 어둑해지는 햇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산, 그것도 계곡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해가 빨리 넘어가니까.
그러니 이젠 최대한 빨리 산을 내려가는 게 좋았다.
목표도 달성했고.
후딱 돌아가서 졸업식이나 참석해야지.
* * *
“그렇군. 끝났나.”
남궁선이 먼저 전서구로 보낸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맹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요한 집무실.
“생각보다 더 강하군.”
청란초를 얻기 위한 청각사는 사실 많이 필요 없다.
입수 난이도를 생각하면 두 마리 정도가 가장 적절하고 네 마리 이상은 일부러 죽여서 수를 줄이는 게 좋다.
올해는 죽여서 그 수를 줄여야 하는 해.
저번에 갔던 만독단주(萬毒團主)가 일이 급해 죽이지 않고 무시한 탓에 숫자가 꽤 많이 늘어난 상태.
아무리 단주급이 둘이었다고 해도 경험이 부족한 두 사람에겐 나름 위협적인 적이었을 터.
그런데도 이리도 빠르다니.
설천위는 온전히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닌데.
생각과 함께 맹주는 휴식용 탁자 앞에 섰다.
“궁금하구나.”
조용히 차를 우리며, 맹주는 설천위를 떠올렸다.
턱없이 부족한 재능으로 무(武)를 손에 쥐려고 하는 우인(愚人).
그럼에도 끝내 그 무(武)를 손에 쥐어 가고 있는 독종.
“고민되는구나.”
그런 인간을 어디에 써먹어야 할까.
탁자 위 흐트러진 문서들을 보며 맹주의 눈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문서에 적힌 내용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었다.
음지에서 움직이는 조직들의 잔혹한 행동들.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미친 짓을 벌이는 광인들.
양지에 있으면서도 뒤로 구린 짓을 하고 있는 문파들.
이 무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추악함이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너무나도 많아 그 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힘든 악의(惡意) 속에서 맹주는 설천위를 떠올렸다.
“궁금하구나.”
너는 무슨 이름을 지을지.
어떤 길을 천명할지.
어떤 악(惡)이 너와 맞을지. 아무래도 그 이름을 들은 뒤에야 정할 수 있을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