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290화-청란초 (2)
용과 뱀.
언뜻 보면 전혀 싸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승부였으나, 청각사는 용감했다.
샤아아아!!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청각사.
물 위를 스치듯 타고 움직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짐승의 그것이었다.
강렬한 바람을 만들어 내는 그 재빠른 속도로 단숨에 패융에게 접근한 청각사가 몸을 비튼다.
독니를 박아 넣는 것이 아닌, 몸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공격.
쿵!!
그 공격에 당한 패융의 몸이 잠시 흔들렸지만, 패융은 금세 균형을 되찾고 주둥이를 벌렸다.
콰득!
샤아아아!
패융이 거침없이 몸을 깨물자, 청각사가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허나, 그럼에도 뱀은 뱀.
본능처럼 움직인 몸체가 단숨에 패융을 휘감는다.
그대로 조여서 뼈를 으스러트리겠다는 듯.
허나, 용은 용.
[크롸아아아!!]
강렬한 포효와 함께 몸을 비트는 패융에 의해 청각사의 몸이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오!”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아니 한 번 보면 평생을 두고 안줏거리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은 놀라운 광경에 남궁선은 검을 늘어트렸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청각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소리는 듣긴 했지만.’
청란초는 무림맹에서 주기적으로 채취하러 오는 약초다.
원래는 부단주급이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채취했었다.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청각사들의 몸집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 몇 년 정도는 만독단주(萬毒團主)가 직접 움직였다고 들었는데.
‘……장난 아닌데.’
고작 그 정도로 충분한가 싶다.
생각보다 만독단주가 더 강한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아버지랑 동년배의 고수신데.
“누님.”
“응?”
“이거 맞아요?”
“뭐가?”
“제 입으로 말하기 힘든데, 저 상태의 패융 겁나 강한데요.”
화경급 고수의 강기(罡氣)에 아직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단순 전투력만 보면 거의 화경급인 패융이다.
저 거대한 덩치가 덩칫값을 못 하는 물몸이 아니라는 소리다.
물론, 실제로는 초절정 정도만 되어도 나름대로 공략을 짜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여하튼 단순 파괴력만 보면 화경에게도 안 밀리는 게 [암천룡(暗天龍)] 상태의 패융인데…….
샤아아아아!
[크라라라라!!]
저 미친 뱀 새끼는 어떻게 호각으로 싸우고 있는 건지.
패융을 휘감고 미친 듯이 몸을 비트는 청각사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끈덕지게 패융을 옥죄었다.
거기다.
쾅!!
패융의 비늘을 뚫기 위해 내려치는 머리.
뱀의 박치기가 무슨 위협이 되겠냐 싶겠지만, 그 뱀의 대가리에 거대한 뿔이 달려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웬만한 사람 크기의 뿔을 긴 몸체를 휘둘러서 찔러 넣는데, 그게 위협이 안 될 리가 있나.
거기다 강기(罡氣)나 검기(劍氣)처럼 깨달음을 통해 위력을 끌어올린 건 아니더라도 짙은 기(氣)를 품고 있는 뿔이다.
웬만한 사람은 맞는 순간, 땅 밑의 염라대왕과 대면해야 하는 흉기란 소리다.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해야 하는 거 맞죠?”
“음.”
설천위의 질문에 남궁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각사는 청란초의 핵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청란초가 제대로 자라려면 청각사가 필요하다.
청각사의 둥지에서 청각사의 기(氣)를 받아 자라나는 약초가 청란초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죽이면 더 이상 청란초를 채취할 수 없다.
청란초는 내상을 다스리는 데 특효인 소청단의 재료인 만큼, 청각사를 절대 죽여선 안 된다.
내상은 무인들의 고질병이니까.
무공 수련 중에 조금만 무리해도 내상을 입으니 특효약은 반드시 필요했다.
전투 중에도 내상을 다스릴 수 있다면 생존 가능성이 확 올라가기도 하고.
“죽이지 않고 제압하긴 해야 하는데…….”
상당히 힘든 일이 될 것 같은데.
청각사의 힘을 확인한 남궁선은 살짝 힘이 빠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은 게 있어서.”
“예?”
살짝 처진 남궁선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고.
딴 곳을 바라보는 남궁선의 모습에 서늘함을 느꼈다.
“그…… 한 마리가 아니거든.”
늘어트렸던 검을 다시 세우는 남궁선.
한 마리가 아니다.
그 말에 설천위는 거대한 청각사의 위용에 순간 까먹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청란초를 지키는 청각사는…….
샤아아아아아!!
샤아아아아아!!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었지.
물속에서 솟구치는 네 개의 대가리.
방금 등장한 청각사보다는 작지만 머리에 달린 뿔과 푸른 비늘이 그들도 청각사라는 것을 증명했다.
“제압하자!”
“이런, 미친!”
제압이 아니라 도망쳐야지!
달려드는 청각사를 향해 뛰어가는 남궁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은 설천위는 즉시 도(刀)를…… 뽑으려다가 검을 뽑았다.
아무리 그래도 제압에는 소백진의 도(刀)보다는 현태중의 검(劍)이 더 나으니까.
그리고 검을 꺼낸 순간.
쾅!!
강렬한 충격이 몸을 덮친다.
검으로 겨우 막아 냈지만, 몸 전체가 저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
뱀 특유의 유연하고도 강한 근육이 만들어 낸 강렬한 꼬리치기.
설천위가 막았다고 생각했으나, 막아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꼬리가 막힌 순간부터 단숨에 파고든 청각사는 아예 이쪽을 휘감아 으스러트릴 생각인지 그대로 몸을 휘감아 왔다.
순식간에 설천위를 휘감는 청각사의 몸.
그 비늘에 옷이 찢어지고 단련된 근육이 드러난다.
옷과 함께 찢어진 피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 그 순간.
미세한 혈향을 맡은 청각사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자그마한 짐승들은 아무리 힘이 강해도 이렇게 휘감는 순간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안에서 자신의 비늘을 찌르는 등 반항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야 참고 조이면 되는…….
“후우우우.”
깊게 숨을 토해 내는 소리와 함께 설천위를 휘감은 청각사의 몸 사이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피 냄새가 옅어진 것을 깨달은 청각사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강하게 조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가진 전부를 쥐어짜서 조여야…….
“흐읍!”
짧은 기합성과 함께 조여 들어가던 청각사의 몸이 순간 정지한다.
아니.
샤아아아!
오히려 밀려난다.
비늘에 긁혀 난 생채기 따윈 하나도 남지 않은 육체가 서서히 벌어지는 청각사의 몸 사이로 드러난다.
굵게 선 핏줄.
피부 밑으로 그 결이 드러날 정도로 부풀어 오른 근육.
평소 옷 속에 숨어 있던, 압도적인 근육이 청각사의 몸을 밀어낸다.
핏발이 선 턱 선이 그대로 드러나며, 설천위의 두 눈이 떨리고 있는 청각사의 눈과 마주한다.
“힘으로 한번 해 보자는 거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 홍채는 인간의 것이 아닌, 마치 자신의 동료의 것과 같았다.
경직된 청각사의 몸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억지로 벌리며 설천위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했다.
철백이라면, 이대로 붙잡은 청각사의 몸을 찢어 버릴 수 있었겠지만…….
자신은 그 정도의 근력은 안 되는 데다 그래서도 안 된다.
죽여서는 안 되니까.
뼈를 부러트리는 건…….
참자.
아무리 영물이라도 야생에서 뼈가 부러지면 죽는 선택지밖에 없을 것 같으니.
꽈아아악
샤아아아아!
자신의 몸을 힘껏 움켜쥔 설천위의 손아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청각사가 거칠게 반항했으나, 힘의 주도권은 이미 설천위가 쥔 상태였다.
반쯤 풀어진 청각사의 몸 사이를 빠져나온 설천위는 그대로 청각사를 붙잡고…….
샤아아?
휘둘렀다.
몸의 중간부터 갑자기 끌려 들어가 허공을 날게 된 청각사가 영문 모를 울음을 토해 내고 족히 육 장(六丈:약 18m)은 될 것 같은 청각사의 몸이 붕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간다.
[허허허허, 무식한 놈.]
[우리가 너무 과했나…….]
무공이고 나발이고 힘으로 청각사를 다루는 설천위의 모습에 혼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능이 없어서 미친 듯이 육체 단련만 시켰더니 자신들이 봐도 몸이 참…….
[패룡기(覇龍氣)]를 휘감고 꿈틀거리는 육체가 참으로…….
‘감탄이 나오는구먼.’
‘우리가 했지만, 좀 과했나 싶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몸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은 아닌데…….’
같은 운동을 해도 누군가는 근육이 많이 붙고, 누군가는 적게 붙는 것처럼.
육체의 성장에도 재능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당연히 설천위는 그쪽에도 재능이 없는 편이고.
그걸 오로지 단련만으로 극복해서 저런 몸을 만들었으니…….
새삼스레 자신들이 얼마나 악독한 스승이었는지 깨달은 혼들이 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제압한 청각사를 멀리 날려 버린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패융은 아직도 가장 거대한 청각사와 싸우고 있었고.
남궁선은 두 마리의 청각사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이곳저곳 찔러서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중검(重劍)이 특기라지만, 저 나이에 화경에 오를 정도의 재능이면 웬만한 건 다 가능하다는 증거다.
다재다능하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각사를 바라봤다.
자신의 동료가 오로지 힘에 의해 날아간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는지 거리를 벌린 채 한껏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론.
“덤빌 거냐?”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샤아아아아!
누가 봐도 겁을 먹은 것처럼 살짝 물러나는 청각사.
그런 청각사를 향해 설천위는 거침없이 다가갔다.
아까 그놈 때문에 옷이 넝마가 되었다.
부풀어 오른 상체 근육에 의해 상체 부분이 찢어졌다.
[패룡기(覇龍氣)]를 최대로 운용하니 이렇게까지 근육이 활성화되네.
자잘했던 상처는 전부 치료된 상황.
육체의 활성화가 극한까지 이루어져 압도적인 힘이 근육 속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다.
학원장이랑 비무를 할 때도 이렇게까지 활성화시키진 않았었는데.
‘나쁘지 않네.’
물론 끝나면 조금, 아니 상당히 통증에 시달리겠지만.
그거야 뭐 회복으로 치료하면 되니까.
과한 힘에 파열된 근육도 근육이지만, 그 힘을 견뎌 내는 뼈와 인대의 통증이 상당하다.
회복 아니었으면 도저히 못 쓸 힘이지.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며 설천위는 천천히 청각사를 향해 걸어갔다.
“시간 길게 끌기 싫으니 빨리빨리 끝내자.”
* * *
‘……장난 아닌데.’
청각사 사이로 이리저리 피하며 검으로 톡톡 청각사들의 약점을 찾던 남궁선은 한쪽에서 펼쳐진 광경에 그만 혀를 내둘렀다.
진짜 끝내주네.
추릅.
근육이 무슨…….
살짝 흐르려는 군침을 삼킨 남궁선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동생의 친구인 데다 약혼자까지 있는 녀석인데 무슨.
거기다 장난으로 한 유혹이었지만, 그렇게 냉정하게 쳐 낸 놈이다.
그쪽으로는 관심 두지 말자.
그나저나.
‘……확실히 단련의 수준을 뛰어넘었는데.’
육체를 강화하는 술법이라도 쓰고 있는 건가?
명백하게 평소보다 과하게 활성화된 설천위의 근육을 남궁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약물은 아닌 것 같고, 술법의 일종 같은데…….
몸에 흐르는 저 검은 연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잠시 설천위의 상태를 관찰하던 남궁선은 이내 관심을 끊었다.
자신도 지금 상대해야 할 적이 있으니까.
자세한 건 일이 끝나고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음……. 선배의 위엄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겠는데.”
후배가 저렇게 쉽게 청각사를 잡고 있는데, 자신이 쩔쩔맬 수는 없지.
시간을 들여서 아예 상처 없이 제압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속도를 올려 볼까.
쾅!
회피를 멈추고 방어를 선택한 남궁선은 쳐 낸 꼬리 뒤로 파고들지 않는 청각사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저놈들, 친구가 당하는 걸 보고 이쪽도 저럴 거라고 생각한 건가?
저런 무식한 방법을 쟤 말고 누가 쓸 수 있…….
‘……철백, 걔도 가능할 것 같기도.’
음, 분명 가능할 것 같네.
가볍게 고개를 저어 순간 떠오른 잡념을 털어 낸 남궁선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청각사를 검으로 겨눴다.
그리고 그 순간.
쿵!
그녀의 주위에 있는 물의 수위가 한 뼘 이상 낮아진다.
중천(重天).
제왕검형의 본래 이름.
거듭되어 겹쳐진 하늘은 대지와 생명을 짓누르니.
압도적인 무게 속에서 느려진 청각사를 향해 남궁선은 검을 겨눴다.
“얌전히 물러서…….”
쾅!
뜻을 알아듣는 영물이기에 대화를 시도하려는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청각사가 청각사 하나를 날려 버렸다.
“아,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