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286화-선택 (2)
투기장.
그런 걸 왜 이런 외딴곳에 만드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아미타불……. 혈향이 짙습니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 담긴 무해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외진 곳에 투기장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투기장은 도시에도 꽤 있다.
가장 흔한 건 동물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투견장이나 투계장.
뭐, 이건 이 시대의 상식으론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서 관리들도 즐긴다.
동물 학대 같은 개념 따윈 없는 세상이니까.
사람 목숨도 파리처럼 사라지는 세상인데, 동물 학대 같은 개념이 있을 리가 있나.
여하튼, 그다음으로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투기장은 맨손 격투장이다.
말 그대로 맨손으로 싸우는 것.
상의를 탈의하고 바지도 무릎까지만 가리는 옷을 입는다.
무기나 암기를 숨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드러낸 상태로 오직 맨손만으로 승부하는 격투장.
놀랍게도 이런 종류의 투기장도 합법이다.
서로가 동의했으니 뭐 싸우다가 다치는 정도야 큰 문제가 안 되니까.
문제는 출전하는 선수가 동의하지 않는 형태의 투기장.
즉, 강제로 끌려온 이가 명백하게 자신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상대와 싸워야 하는 투기장이다.
상대가 뛰어난 무인일 수도 있고, 맹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약자의 처절한 발악과 끝없이 비참한 그 결말이다.
뒤틀린 인간들의 가학 심리를 노리고 만든 투기장.
당연히 불법이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이런 짓을 대놓고 허용할 리가 없으니까.
허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는 법.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이를 악문 창천단원의 말에 설천위는 가만히 산채를 바라봤다.
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
그 열기에 결코 밀리지 않는 짙은 혈향.
단순히 납치한 노예를 일대일로 두들겨 패서 죽이는 종류의 투기장이 아니었다.
“사, 살려 줘……!”
크르르르르.
환호성 속에서 얼핏얼핏 들리는 비명 뒤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따라붙고 있으니까.
[범이 노예들을 사냥하고 있다.]
공중에서 내부를 확인하고 돌아온 암영의적의 말에 설천위는 말없이 산채를 바라봤다.
“스님.”
“……아미타불, 예, 시주.”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겠다.
그 한마디가 어찌 이리도 서늘하게 들릴까.
차마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 설천위를 멍하니 바라본 무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물러나 있겠습니다.”
“무요, 너도.”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서는 무요.
눈치껏 함께 물러난 창천단원들까지 뒤로하고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뭐 하는 놈이냐?”
대놓고 수상하게 걸어오는 설천위의 모습에 경비를 서던 이들이 바짝 긴장한 채 도를 움켜쥐었다.
단정한 차림새에서 오는 깔끔함.
정파 특유의 느낌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곳까지 흘러온 정파 놈들도 이곳에 오면 잘못되었다고 크게 항의한다.
물론, 적당히 겁준 뒤 안에서 즐기게 놔두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놈들과는 쉽게 칼부림이 난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네놈들이 다치는 건 싫은가 보구나.”
그리고 그런 경계심 가득한 태도에 설천위는 무덤덤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저 안에서 싸우기 싫어하는 이가 억지로 범과 싸우고 있는데, 너희는 아픈 것이 싫은가 보구나.”
“뭐야, 안에 들어갔던 놈이었어? 괜히 정의로운 척하지 마라. 그런다고 빚 안 깎아 주니까.”
지금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설천위의 말에 사내는 경계심을 풀었다.
이런 놈이 시비 거는 이유야 뭐 몇 가지 없지.
안에서 내기를 하다가 돈을 잃은 화풀이일 거다.
아니면 분탕 좀 치면 잃은 돈을 얼마간이라도 돌려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네놈이 건 시간보다 안의 녀석이 못 버텼다고 해서 우리가 돈을 돌려줄…….”
“그만.”
사내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담담하게 말했다.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
그 말에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그 순간.
사내는 깨달았다.
‘아!’
나, 죽었구나.
* * *
“뭐? 정문에 어떤 놈이 쳐들어왔다고?”
부하의 보고에 산채의 주인, 규막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뭐 그딴 걸 일일이 보고하고 있어! 당장 쫓아내!”
“그, 그것이 경비를 서던 녀석들의 목이…….”
목이.
말끝을 흐린 부하의 말이 뭔지는 쉽사리 짐작이 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한가락 하는 놈인가 보지?”
단숨에 목을 베어 냈다는 것 자체가 꽤나 높은 경지의 무인이란 소리였다.
최소 일류 이상.
그런 놈들은 돈을 잃으면 손부터 쓰는 법이지.
“쯧.”
일이 귀찮아졌다는 것을 깨달은 규막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류쯤이라면 자신이 제압해도 되겠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이럴 때를 위해 돈을 처바른 것이 아닌가?
“선생님, 아무래도 이 흥겨운 시간을 방해하는 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됐네. 다 들었으니.”
조심스러운 규막의 태도에 손을 내저은 사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반라의 여인들이 떨어졌다.
동공이 뚜렷하지 않게 풀린 이들.
약에 취한 노예들이다.
“나도 밥값은 해야겠지.”
‘양심은 있군.’
툭툭 옷을 털며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에 규막은 안도했다.
나름대로 사파에서 유명한 인간이다.
물론, 사고를 쳐서 도망쳐 온 인간이지만.
숨겨 주고 먹여 주고 다 해 줬는데, 이럴 땐 움직여 줘야지.
희끗희끗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며 자신 있게 걸어 나가는 사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규막은 이내 고개를 돌려 투기장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 내기는 사흘간 굶은 범에게서 사흘간 굶은 인간 여덟이 살아남는 경기다.
물론, 여덟 전부 죽진 않을 거다.
약으로 범의 흉포함을 끌어올리긴 했어도 굶주린 상태에서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사냥을 멈출 테니까.
그게 참 아쉽다.
범은 재미로 사냥하진 않으니까.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하지 않으니 경기에 긴장감이 부족해진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충분하지.
‘저런 것도 나름대로 보는 맛이 있고.’
살아남기 위해 옆에 있는 이를 밀치고 자빠트리는 광경은 꽤나 우습다.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끼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쯧쯧.
뭐, 자신이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피식 웃으며 규막은 다음 경기를 떠올렸다.
다음은 분명…… 사파 쪽 놈이랑 노예 셋이었나?
그놈한테 적당히 하라고 하긴 해야 하는데.
피 맛을 너무 봤는지 최근 눈깔이…….
“뭐야!”
“넌 뭐 하는 새끼야!”
갑자기 들려오는 욕설에 규막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경기장을 바라봤다.
온갖 욕설과 함께 날아드는 술병 사이로 한 사내가 서서 범을 막고 있었다.
‘……젊은 놈이 뭐 하는 짓이지?’
돈 잃고 화풀이로 경기를 망치기로 했나?
그럼 본때를 보여 주…….
“음?”
순간 젊은 놈의 허리에 매달린 검과 도를 발견한 규막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화제가 된 신진 고수가 있었다.
검과 도를 차고 다니는, 흑룡성(黑龍星)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생긴 젊은 신인.
무려 그 유명한 호남설가의 자식으로, 무림학관에서 갑(甲)이라는 말도 안 되는 등급까지 오른 괴물.
생긴 것도 아주 잘생겨서 여자들 사이에서 꽤나 화제라는…….
‘……그러고 보니 저렇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대충 들은 외견이 딱 저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순간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본능.
여태까지 자신을 살아남게 해 준 그 본능이 규막을 자극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규막이 떨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훑어보기 시작하는 그때.
“미안하다.”
설천위는 자신의 기세로 제압한 범을 보며 사과하고 있었다.
범의 눈동자 안에서 혈기가 느껴진다.
약으로 깃든 흉포함이 범의 심신에 완전히 깃들었다는 증거.
거기다 사람을 사냥해 그 맛을 봤으니 풀어 줘도 사람을 주식으로 삼을 거다.
외진 곳을 다니는 이들이나 그런 곳에 사는 이들이 막대한 피해를 볼 터.
“고통 없이 보내 주마.”
단숨에 휘둘러진 도(刀)가 범의 경추를 끊어 낸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
범은 자신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목이 떨어져 나갔다.
직접 범의 눈을 감겨 준 설천위는 어느새 술병 던지던 것을 멈추고 바짝 굳어 있는 관중들을 바라봤다.
“도망칠 생각은 마라.”
“네, 네놈이 뭔데!”
“우리는 그냥……!”
화를 내는 인간.
변명하는 인간.
도망치기 위해 눈알을 굴리는 인간.
참으로.
“역겹네.”
역겹기 그지없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다가 자신들에게 조금의 위협이 다가오려 하니 한껏 움츠려 경계하는 꼴이라니.
흥건한 피로 질척해진 투기장 안에서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저놈이 이곳의 주인이구나.]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눈깔을 돌리고 있는 인간을 찾아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들의 말대로 아무리 봐도 저놈이 이곳의 주인으로 보였다.
주위에 시중드는 인간도 많았고.
헐벗은 여인들 중에서 제대로 움직이는 이들은 족쇄를 차고 있고, 족쇄가 없는 이들은 흐물흐물 늘어져 있었다.
“네놈!”
상황 파악을 끝낸 설천위가 움직이려는 순간.
투기장으로 난입한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다.
살벌하게 뿜어내는 기세.
[절정이구나.]
[절정이야.]
[그쯤 되어 보인다.]
“어린놈이 아주 오만방자하구나!”
거세게 콧김을 뿜어내며 삿대질을 한 사내는 허리춤에 있는 도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무림의 어른으로서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응?
왜 소리가 안 나지?
위협할 겸 거칠게 뽑아낼 생각이었는데?
도를 거칠게 뽑아낼 생각이었던 사내는 도와 도갑의 쇠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순간.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 피가 퐁퐁 솟아나고 있는 자신의 손이.
더불어 거세게 피를 뿜어내고 있는 손목도 함께.
“끄아아아악!”
뼛속까지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내.
그런 사내를 보며 설천위는 가볍게 도를 털어 냈다.
[훌륭하다.]
[조잡한 놈이 상대였지만, 훌륭한 일격이었다.]
혼들의 칭찬에도 설천위는 말없이 자신의 도(刀)를 바라봤다.
자연스러움.
소백진이 추구한 완벽한 일격을 좇다가 손에 넣은 기술.
자신의 손목을 베였음에도 상대가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기술이란 말인가.
만약 목을 베었다면, 저놈은 아무런 고통 없이 죽었다는 소리 아닌가.
아까 입구에서 경비들에게 썼을 때, 그 편안한 표정을 보고 목을 노리지 않길 잘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할 일.
“동작 그만.”
내공을 품고 크게 울려 퍼지는 설천위의 목소리에 관중석에 있던 이들의 몸이 일제히 굳었다.
깨달은 것이다.
지금 투기장 가운데에 서 있는 젊은 놈은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면 술병을 던질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그 많은 술병들 중 어느 하나도 놈에게 적중한 게 없었으니까.
다들 술에 취해서 제대로 조준을 못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 도망쳐야 해!’
‘걸리면 죽는다!’
‘이런 곳에서 붙잡히면……!’
각자 다른 사정, 다른 생각으로 빈틈을 찾는 이들.
그 속에서 설천위는 담담하게 몸을 돌렸다.
“스님.”
설천위의 뒤를 따라 사람들을 제압하며 들어오던 무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투기장에 서 있는 설천위.
일행이 산채처럼 생긴 이 작은 마을에서 이곳 투기장으로 곧장 향한 것은 사실 간단했다.
혈향이 가장 짙었고, 가장 규모가 컸다.
다른 작은 집들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물론 마을보다는 산채에 가까운 작은 규모라서 이 투기장이 너무 눈에 띈 점도 있었지만…….
그나저나, 대체 왜 나를 찾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든 무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설천위는 움직였다.
가볍게 손을 튕긴다.
딱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이 투기장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자 들리기 시작한다.
보이기 시작한다.
[흑흑]
[살려 줘…….]
[저주할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울고, 좌절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이들.
이미 목숨을 잃어버린, 뒤틀린 죽음 속에서 승천하지 못하고 현세에 묶여 버린 망자들.
피가 짙게 배어 질척해진 땅이 발을 붙잡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본래 짙었던 혈향이 한층 더 짙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착각이 아닌가.’
절규로 가득한 공간.
“스님.”
“……아미타불.”
그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갑게 일렁이는 설천위의 눈빛에 결국 눈을 감았다.
“저는 납득했습니다.”
이곳에서 묻히는 피는 씻어 낼 수 있는 피다.